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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넘은 노인 강감찬, 어떻게 10만 거란 물리쳤나

기자
김준태 사진 김준태
[더,오래] 김준태의 후반전(16)
지금으로부터 999년 전 한국 역사상 3대 대첩으로 불리는 귀주대첩(龜州大捷)이 일어났다. 칠십이 넘은 노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이 거란군을 격퇴한 것이다. 흥화진에서 거란의 10만 대군에 일격을 가한 강감찬은 귀주(평안북도 구성)에서 이들을 괴멸시켰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문과에 장원급제해 외교부처에 재직
서울 낙성대에 있는 강감찬(948~1031) 장군의 영정. 최선을 다해 나라를 위해 헌신한 덕분에 인생의 후반전에서 자랑스러운 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중앙포토]

서울 낙성대에 있는 강감찬(948~1031) 장군의 영정. 최선을 다해 나라를 위해 헌신한 덕분에 인생의 후반전에서 자랑스러운 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중앙포토]

 
이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무공을 세운 강감찬. 우리는 그를 ‘장군’으로 기억한다. 위풍당당한 풍채에 무예도 뛰어났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강감찬이 고려의 총사령관이었으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문신(文臣)이다.
 
그것도 문곡성(文曲星, 학문을 관장하는 별)이라고 불릴 정도로 철저한 문신이었다. 983년(성종 2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이래 한림학사와 국자좨주를 역임했고, 관직 생활 대부분을 내정과 교육, 외교를 담당하는 부처에 재직했다.
 
그런데 이런 강감찬이 어떻게 ‘장군’이 되었을까? 그것도 매우 늙은 나이에. 우선 문신이 군대를 거느리는 일 자체는 특별하지 않다. 고려건 조선이건 문신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일부 예외를 제외한다면 군 통솔권은 문신이 가졌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효과적인 전략전술을 입안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지략이 뛰어난 문신이 지휘해야 한다는 인식도 있었다.
 
그러나 군사나 병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전장의 현실을 겪어보지 못한 문신이 지휘를 맡는다면 아무래도 실패하기가 쉽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문신이 대승을 이끈 것은 이 귀주대첩 정도뿐이다.
 
따라서 강감찬으로서도 직접 군대를 지휘해 전쟁에 나서는 일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능력이 훌륭하다 한들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니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강감찬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울 낙성대의 강감찬 장군 생가 터에 있던 탑과 강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안국사. [중앙포토]

서울 낙성대의 강감찬 장군 생가 터에 있던 탑과 강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안국사. [중앙포토]

 
강감찬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993년, 고려는 첫 번째 거란의 침입을 맞았다. 서희의 활약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종결되었지만, 강감찬이 북방의 정세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다. 고려-송나라-거란(요)가 얽히고설킨 국제적 역학 관계에서 거란은 언제든 고려를 다시 공격할 수 있다고 판단, 이를 방어하기 위한 전략을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강감찬의 준비는 1010년 거란의 제2차 침입이 일어나면서 처음으로 빛을 발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당시 고려군 총사령관 강조가 포로로 잡히는 등 거란군의 기세가 막강하자 대부분의 신하가 항복을 건의했다고 한다. 강감찬만이 단호하게 반대하며 응전할 계책을 올렸는데, 이를 두고 현종은 “오랑캐의 전란(戰亂)이 있어서 적들이 한강 기슭까지 깊숙이 침범해 왔다.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적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서경유수 자원해 직접 군대 통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강감찬은 자원해 서경으로 갔다. 연로한 나이였지만 기꺼이 어려움을 마다치 않았다. 서경(평양)은 고려 북방의 요충지로 강감찬이 맡은 서경유수는 국경 방위군 중에서도 핵심부대를 통솔하는 자리다. 이곳에서 강감찬은 수년 동안 직접 군대를 지휘해 본 것이다. 그가 귀주대첩이라는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서경에서의 경험이 중요한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강감찬이 국방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나이를 이유로 거절하고 뒤로 물러났다면 어땠을까? 그가 문신으로서 훌륭한 자질이 있었다고는 하나 수많은 신하 중 한 사람으로 남았을 뿐, 역사에 지금과 같은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문곡성’이라 불리며 문신으로서의 면모까지 칭송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노력했고, 물러서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덕분에 인생의 후반전에서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기게 된 것이다.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akadem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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