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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불편하더라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한걸음!

정여울 작가

정여울 작가

얼마 전 한 공식적인 모임이 끝난 뒤 중년남성들의 푸념섞인 대화를 들었다. 요즘 여학생들이 페미니즘 이슈에 극도로 예민해서 수업시간에 농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이야기, 수업시간에 의도치 않게 여학생들에게 오해를 받을까봐 아예 눈을 마주치지 않고 수업을 한다는 이야기, 성폭력 예방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이 너무 불편하고 무례하게 느껴진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요새 학생들은 이광수의 『무정』을 보고도 미투운동의 잣대로 판단한다고 한탄을 하는 분도 있었다. 『무정』에서 김현수 일당이 영채를 강간하는 장면을 보고 학생들이 ‘미투의 대상’으로 비판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교수님 입장도 난처했겠지만, 학생들 입장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추앙받는 『무정』에 그토록 폭력적인 강간 장면이 지극히 흥미 위주의 묘사로 부각된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지 않았을까. 사회 곳곳에서 미투운동이나 페미니즘 관련 논의가 급증하면서 사실은 서로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남녀의 본질적 입장 차이들이 이제야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삶의 향기 9/15

삶의 향기 9/15

하지만 의견 차이나 갈등이 두려워서 논의 자체를 포기한다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발걸음은 또 한 번 늦춰지지 않을까. 물론 성폭력 예방 교육을 비롯한 각종 조치들이 모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느낌이 들어 불편하다는 남성들의 시각도 이해한다. 성폭력 예방교육 자체가 걸음마 단계이다 보니 미흡하고 어색한 표현들이 많고, 아무 죄 없는 사람, 심지어 여성들을 어디서나 배려하고 존중하는 남성들까지도 불쾌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어 분명 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여성의 성적 자율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임을 이해해준다면, 궁극적인 성평등으로 나아가는 우리 사회의 발걸음이 좀 더 빨라질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변화는 각종 동의서에 마뜩치 않은 심정으로 서명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남성들에게 상처받기도 전에 이미 상처받을까봐 미리 걱정부터 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남성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직장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성희롱이나 성폭력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일자리는 물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하는 위험 때문에 싸움 자체를 포기하는 여성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사람들의 ‘공감’과 ‘연대’야말로 변화의 시작이다.
 
‘요새 여성들이 너무 예민해서 예전처럼 자유롭게 살 수 없다’고 불평하는 남성들에게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아직도 수많은 여성들은 밤에 혼자 길을 걷는 것이 두렵고, 딸을 키우는 어머니들은 딸이 혹시라도 늦게 들어오면 밤새 잠 못이룬다고. 여성들은 주차장에서 행여나 강도를 만날까 두렵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아무리 졸려도 혹시 나쁜 일이 생길까봐 편히 잠들지 못한다. 우리는 평생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토록 힘겹고 불편한데, 이제 처음으로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냐고. 나 또한 평생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핸디캡이었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아무리 일터에서 실력을 발휘해도,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고 성폭력 위험에 노출된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신세 한탄이 아니다. 이제야 시작된 진정한 소통과 대화의 물꼬를 단지 불편하다는 이유로, 단지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틀어막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때문이다. 당신의 마음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한걸음 나아갔으면 좋겠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많이 서운하더라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한걸음 내딛는 용기가 필요하다. 싸우는 페미니즘만큼이나 소중한 것은 대화하는 페미니즘, 소통과 경청을 멈추지않는 페미니즘, 나아가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페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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