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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달아나면서 봐도 아름다운 경치여서 더 슬픈 임진강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강물은 황토 빛으로 흘렀다. 전날 폭우로 어구를 떠내려 보낸 어민들의 안타까움 한 자락을 비출 법도 하지만, 강물은 그저 흐르기만 했다. 강물에게 넘치고 모자람 따위는 애초부터 없는 거다. 물이 불면 거차게, 마르면 쉬엄쉬엄 흐를 뿐이다. 그것에 희비애환을 매다는 건 사람의 몫이다. 강물이 삶의 터전인 어민들은 오히려 초연하다. 그들의 분노는 제때 예보를 못한 기상청을 향할 따름이다. 애꿎은 강물에 울고 웃는 건 평소 강에 무심하던 사람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늘 그렇다.

 
임진강. 북녘 땅에서 발원해 남쪽 바다로 흘러 드는 강이다. 그래서 슬픈 사연이 많다. 물의 속성인 연결이 단절로 바뀌었으니 그럴 수밖에. 물은 무심한데 사람이 그렇다는 얘기다. 70년 전쯤 임진강을 슬퍼한 사람이 있었다. 경기도 고양 출신의 월북 시인 박세영이다. 북한 ‘애국가’를 작사한 그 사람이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 내리고/뭇 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여기에 곡이 붙여지는데 정작 북한에선 금지곡이 된다. 불경스럽게 남쪽 땅을 그리워한다는 이유에서다. 히트한 것은 생뚱맞게도 일본에서다.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라는 포크 그룹이 보다 경쾌한 곡조로 불렀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곧 금지곡이 되고 만다. 북한 체제를 선전한 2연을 개사한 걸 조총련이 따지고 든 것이다. 귀찮았던 일본 당국은 방송을 금지시켜 버린다. 이런 가사다.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협동벌 이삭 바다 물결 위에 춤추니/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임진강 주상절리.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달아나는 와중에 임진강 경치에 반해 시 짓기 좋겠다고 말했다가 입방아에 올랐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임진강 주상절리.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달아나는 와중에 임진강 경치에 반해 시 짓기 좋겠다고 말했다가 입방아에 올랐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북한은 풍년이 들었는데 남한에서는 초근목피로 연명한다니 남한에서도 금지곡이 되지 않을 리 없었다. 한 노래가 세 나라에서 금지곡이 된 것이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2000년대 들어서야 국내에 알려지게 되는데 일본에서 활약하던 가수 김연자가 발굴해냈다. 요즘은 공영방송에서도 원 가사를 들을 수 있으니 인간의 변덕이 이리 심하다. 강은 바뀐 게 없다. 강 따라 이어진 국도를 자동차들이 질주하고, 풀뿌리 캐던 들판에서 벼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게 다를 뿐이다. 금새 간 데 없을 인걸들이 의구한 산천을 희롱하면서도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시인의 슬픔이 크다 한들 백 년도 차지 않은 것이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임진강은 슬펐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에게 생명의 젖줄인 강은 곧잘 죽음의 절벽으로 돌변하곤 했다.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위정자들은 남으로 북으로 강을 건너 달아나기 바빴고 뒤처진 백성들은 도성에서, 강가에서 발을 굴러야 했다.
 
“도성 사람들은 늙은이와 어린이가 넘어지고 자빠지며 자식과 어미 서로 잃어버려 짓밟혀 죽는 자가 들에 가득하고 통곡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했다. 왕이 임진강에 다달아 어가를 강기슭에 대게 하고는 주위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연구(聯句)를 짓기 좋은 풍경이로구나’ 하였다.”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할 때의 모습이다. 순암 안정복의 기록(『동사강목』)이다. 두고두고 비웃음을 사는 장면이다. 종묘사직을 버리고 달아나면서 시를 지을 기분이 나느냔 말이다. 순암은 그래도 왕을 두남둔다. “강민하고 총명한 공민왕이 어찌 그런 말을 하였겠는가. 아마도 병란 속에서 흉흉한 사람들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이덕무의 생각은 다르다. “왕이야 풍류라고 느꼈을지 모르나 (이 말을 들은) 목은(이색)의 눈썹이 잠시나마 찌푸려졌을 것이다.” (『서해여언』) 안동에서도 뱃놀이와 활쏘기를 즐기다 신하의 잔소리를 들었던 공민왕을 생각하면 나는 이덕무에 한 표다.
 
선조는 반대로 임진강을 건너 북쪽으로 달아났다.
 
“저녁에 임진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도 없었다.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동파(東坡)에 닿았다. 상(上)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근처의 인가를 철거하도록 명했다. 적병이 뗏목으로 이용하는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백관들은 굶주리고 지쳐 촌가에 흩어져 잤는데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절반을 넘었다.” (『선조실록』)
 
많이 본 장면이다. 6·25 때 한강다리를 폭파한 것과 데자뷔다. 여기에 또 전설이 있다. 임진나루 언덕 위 화석정 얘기다. 율곡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이곳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논했다. 그런데 늘 기둥과 바닥을 기름걸레로 닦으라고 시켰단다. 율곡이 죽고 8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임진강가에서 발을 구르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율곡의 혜안을 겨우 임금 도망가도록 썼다는 건데 믿을 수 없다. 정작 사실은 그 와중에도 중상모략이 횡행했다는 거다. 당시 우계 성혼이 근처에 살면서 나와보지도 않는다고 이홍로가 무고한 것이다.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 화를 면했지만 두고두고 얘기가 됐었나 보다. 한정유가 스물두 살 세자(정조)의 질문에 대답하는 장면을 홍대용이 『담헌서』에 전한다.
 
“과연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성혼의 집은 큰길에서 수십 리 거리였던바 창졸간 파천됨을 미처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소인이 군자를 무고함이 이렇듯 참독한 것입니다.”
 
화석정에서 임진강을 내려다 보면 공민왕의 심정도 다소 이해가 간다. 벌판에서 훈련 중인 자주포 부대도 산천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보인다. 아름다운 산천도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까닭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1966년 복원한 화석정 현판이 그의 글씨다.
 
그런데 복원된 화석정은 엉터리다. 옛 사진을 보면 정자 한 켠에 방도 있고 구들장도 깔려 겨울에도 사용했다. 놀이터만이 아니라 공부방까지 겸했던 것이다. 제대로 복원하자는 여론이 옳아 보이는데 현판은 그대로 뒀으면 좋겠다. 그것 또한 역사이지 않은가.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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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