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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주 논설위원이 간다] 흰머리 날리는 CSI 어벤저스

인생 2막 보람 찾는 과학기술자들 
은퇴 후 협동조합을 만들어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는 전직 과학수사관들이 있다. 사진은 국과수 요원들이 증거를 찾는 모습. [중앙포토]

은퇴 후 협동조합을 만들어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는 전직 과학수사관들이 있다. 사진은 국과수 요원들이 증거를 찾는 모습. [중앙포토]

공공 부문에서 그저 한 분야만 파고들었던 공통점 때문일까. 하는 말이 똑같았다. 일면식도 없는, 서로 다른 단체 소속인데도 그랬다. “나라의 녹봉을 받던 사람으로서…,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에 이바지해야겠다는 생각에….” 은퇴 후 협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하는 과학기술인들에게 동기를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었다. 이들은 “인생 2막에 일거리도 갖고 사회공헌도 하자”며 의기투합했다. 마침 정부가 ‘사회적 경제’의 한 형태로 협동조합을 권장하고 지원하던 터였다. 기업과 자선단체의 중간쯤 되는 조직을 만들라는 취지다. 그래서 협동조합을 세웠다. 교수나 연구원뿐 아니라 과학수사관들이 꾸린 조합도 있다. '수익'보다 '기여'에 초점을 뒀기에 쥐는 돈은 활동 경비 정도다. 이들은 “일자리라기보다 소일거리에 가깝다”면서도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느끼는 보람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말했다.
 
은퇴한 과학수사관들이 주축이 된 법과학협동조합원들이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 모였다. 젊은 문서감정인, 곤충학자 등도 "억울함을 지우고 약자를 위해 봉사한다"는 취지에 공감해 합류했다. 강정현 기자

은퇴한 과학수사관들이 주축이 된 법과학협동조합원들이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 모였다. 젊은 문서감정인, 곤충학자 등도 "억울함을 지우고 약자를 위해 봉사한다"는 취지에 공감해 합류했다. 강정현 기자

전 해양경찰청 과학수사계장, 전 법 최면 전문수사관, 화재범죄 수사 요원, 해양오염 조사 전문가…. ‘원로 CSI 수사대’라고나 할까. 2016년 12월 과학수사 베테랑들이 주축이 돼 ‘한국법과학협동조합’(이하 법과학조합)을 설립했다. 은퇴 전에 가까이 지내던 이들이 “은퇴한 뒤 무얼 할까” 수시로 얘기하며 준비해 조합을 만들었다. 김일평(61ㆍ전 해양경찰청 과학수사계장) 이사장은 “수사가 잘못돼 누명을 썼다고 미국ㆍ일본에서 증거물 감정을 다시 받아오는 사례를 현직에 있을 때 많이 봤다”며 “은퇴 후에 그런 것을 우리가 해결해주자는 데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으로 현장 감식용 디지털 현미경 같은 장비를 마련했다. 설립 목적대로 민ㆍ형사 소송에 휘말린 당사자나 변호사의 의뢰를 받아 법 과학적인 증거를 찾고 분석하는 일을 한다. 화재ㆍ교통사고 조사에서 문서 감정, 법 최면, 거짓말탐지기, 범죄 현장 재구성에 이르기까지 과학수사 요원들이 하는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 의뢰가 생기면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팀을 이뤄 해결한다. 보수는 적절히 받되, 생활보장대상자ㆍ소년소녀가장ㆍ독거노인ㆍ다문화가정은 돈을 받지 않는다.
법과학조합원들이 문서감정 장비로 인감을 분석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법과학조합원들이 문서감정 장비로 인감을 분석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의뢰 가운데 부부 두 쌍이 싸운 사건이 있었다. 의뢰인은 가해자로 판정 나 벌금형을 받은 쪽이었다. 억울하다고 했다. 상대방이 의뢰인 아내의 살갗을 흉기로 그었는데도 의뢰인 측만 가해자가 됐다고 주장했다. 흉기 상처에 대해 상대방은 “손톱에 긁힌 자국”이라고 했고, 그게 경찰과 법정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었다.
사건 기록을 보니 흉기와 상처 사진이 있었다. 같은 회사 같은 제품(흉기)을 사서 종이에 그어 봤다. 꼭 같은 상처 모양이 생겼다. 손톱으로는 그런 모양이 생기지 않았다. 보다 확실하게 하고자 생닭(“생채기 재현은 생닭이 사람 피부와 가장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고 법과학조합 측은 설명했다)을 사서 한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 이사장은 “어찌 된 일인지 애초에 세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아내가 다툼 끝에 흉기로 남편을 살해한 사건을 변호인이 들고 온 적도 있다. 경찰은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고의적인 살인으로 봤다. 이에 대해 피고인 아내는 “정말 정신이 없었고,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우발적이었다”고 했다. 팀을 꾸려 현장에 가보니 혈흔이 남아 있었다. 조합 측은 “당시 상황을 추정해 보니 고의 살인이었다면 반드시 있어야 할 위치에 혈흔이 없었다”고 했다. 사건은 지금 대법원 상고심이 진행 중이다.
의뢰를 받으면 해당 분야 전문가가 순번에 따라 나간다. 보수는 일을 맡은 조합원이 70%를 갖고, 30%는 조합에 내 운영비 등으로 쓴다. 아직 무료 봉사 대상인 취약 계층으로부터 증거 분석이나 현장 감식 부탁을 받은 적은 없고,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느냐는 식의 상담만 80여 건을 했다고 한다. 무료 봉사하면 비용이 부담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홍범기(67) 전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수사관은 “그래 봐야 교통비와 밥값, 자료 제작용 컬러 인쇄비 정도가 든다”며 “그보다는 보람이 훨씬 크다”고 말했다.
법과학협동조합은 대학에서 후학도 기른다.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 실습 장면. [자신 한국법과학협동조합]

법과학협동조합은 대학에서 후학도 기른다.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 실습 장면. [자신 한국법과학협동조합]

지난해부터는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에서 과학수사과정을 강의한다. 한 과목이지만 한 명이 전담하지 않고 분야별로 전문가들이 돌아가면서 강단에 선다. 실습실을 마련해 철저히 실무 위주로 가르친다. 경찰사법대학원 김영훈 교학팀장은 “실습을 통해 베테랑들이 노하우를 전수하기 때문인지 학생들 만족도가 대단히 높다”고 전했다.
조합원이 아닌 퇴직 경찰관에게 임시 일자리를 제공하는 신규 사업도 하고 있다. 자살이나 고독사 같은 ‘변사 현장 클리닝’이다. 혹시 보존해야 할 증거가 없는지 전문가의 눈으로 살핀 뒤에 감염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특수 청소와 소독을 한다. 해당 지역 은퇴 경찰을 불러 일을 함께하고 보수를 나눈다. 비용은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경찰서에서 받는다.
처음 16명이던 조합원은 점점 늘어 60여 명이 됐다. 억울함을 벗겨내고 후학을 기르는 활동이지만 이따금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있다고 한다. 현장 감식이나 감정 등을 다시 한다는 게 결국 후배 경찰이 잘못한 점을 들추는 것이어서다. 김 이사장은 “무엇보다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게 수사의 본질”이라며 “후배를 난처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잘하라는 충고로 받아들여 달라”고 말했다.
대덕과학기술사회적협동조합은 중소기업과 벤처의 기술 개발을 돕는다. 대덕연구단지 연구원과 인근 대학교수 출신 123명이 구성원이다. 기술 개발 대가는 정해 놓은 금액이나 규정이 없다. 혜택을 입었다고 생각하는 중기ㆍ벤처가 자발적으로 조합을 후원하도록 했다. 자발적 후원만 받는 이유는 “따듯한 공동체를 만든다는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게 천병선(73ㆍ전 충남대 나노소재공학과 교수) 이사장의 설명이다.
충북 제천의 아세아테크는 조합의 도움으로 기차 바퀴 재생 기술을 개발했다. 30만㎞ 정도 달리면 닳아서 버리는 기차 바퀴를 특수 열처리ㆍ용접 기술로 재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제품화를 앞두고 있다. 아세아테크 이영진(73) 대표는 “원래 이 분야 기업에는 기계 기술자밖에 없어 열처리나 용접 기술 활용은 꿈도 꾸지 못했다”며 “그런데 조합에서 금속학과 용접 박사들이 나와 신기술을 개발해 줬다”고 말했다. 대전의 오존 발생기 제조업체 오존텍은 소형 발생기만 만들다 조합의 도움으로 중형 개발에 성공했고, 지금은 대형에 도전하고 있다.
천 이사장은 “중기ㆍ벤처가 잘 돼 청년 일자리가 많이 생기도록 하는 게 조합의 목표”라고 소개했다. 그는 “주로 충남ㆍ대전인 활동 무대를 전국으로 넓혀 더 많은 중기ㆍ벤처와 협력하고 싶은데, 은퇴 과학자들이 대덕 인근 아니면 수도권에 몰려 있는 현실이 아쉽다”고 했다.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원들로 이뤄진 과학기술연우협동조합도 비슷하게 중기ㆍ벤처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이정순(74ㆍ전 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공공 연구소에서도 중기ㆍ벤처의 프로젝트를 맡아 원하는 기술을 개발해준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게 대부분이다. 제품화ㆍ상용화까지 이르려면 그 뒤에도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 시장에서 상품성을 인정받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상품성을 인정받을 때까지 중기ㆍ벤처를 뒷받침해 강소기업이 되는데 이바지하는 게 우리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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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