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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초입에 부는 바람 같은

WITH 樂: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2번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 연주한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2번. 요제프 크립스가 지휘한 리빙 스테레오 음반이다.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 연주한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2번. 요제프 크립스가 지휘한 리빙 스테레오 음반이다.

혹시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시는지. 나는 그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좋아한다. 에세이집은 제목부터 고소한 냄새가 난다.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같은 책을 보라. 하루키는 ‘센세이(선생님)’보다는 ‘무라카미 군’이 더 어울린다. 영혼이 카스테라처럼 폭신폭신한 사람은 좀체 늙는 법이 없으니까.  
 
그가 쓴 음악 에세이를 펼쳤다.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과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을 비교하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보헤미아 출신 제르킨이 수도승 같은 완벽주의 연습벌레였다면 폴란드인 루빈슈타인은 천재형 한량(閑良)이었다. 루빈슈타인의 말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길 내가 젊었을 때 와인·여자·일에 시간을 공정하게 배분했다고 하죠. 이건 완벽한 오해예요. 난 시간의 90%를 여자에 썼어요.” 이건 거의 여자에 둘러싸여 사신 록밴드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 수준이다. 아무래도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는 제르킨이 연주하는 뻑뻑한 베토벤을 듣고, 에세이를 쓸 때는 록이나 재즈, 그도 아니면 루빈슈타인이 연주하는 쇼팽을 듣는 것 같다.  
 
하루키는 거장 피아니스트를 비교하기 위해 공정하게도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이야기를 꺼낸다. 공교롭게 브람스 협주곡 2번은 두 피아니스트가 각각 4번씩 녹음했다. 하루키가 고른 음반은 1958년 루빈슈타인이 지휘자 요제프 크립스와 한 녹음이다. 야호! 내가 기억하는 음반이다. 클래식을 듣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산 음반이라 잘 기억한다.  
 
당시 나는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 누군지도 몰랐다. 그의 이름(Arthur)을 ‘아르투르’라고 읽지 않고 영어식으로 ‘아서’라고 읽었을 것이다. 누구나 초보시절은 있는 법이니 ‘아서 루빈스테인’이라고 읽었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집에 와서 들어 보니 또랑또랑하고 자신감 넘치는 음색이 일단 합격점이었다.  
 
브람스는 평생 두 곡의 피아노협주곡을 남겼다. 1번은 청년시절에 작곡했고 22년이 지난 후 2번을 완성한다. 1번 협주곡은 시작하고 한참이나 지나서-생각보다 더 한참이다-첫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브람스가 클라라 슈만에게 한 변명은 이렇다. “나의 불행한 교향곡은 피아노협주곡으로 사용됐습니다.” 원래 교향곡으로 작업하다가 피아노협주곡으로 급수정한 것이다. 당연히 관현악적인 성격이 강하다. 반면 2번은 가을 초입에 부는 바람처럼 피아노 소리가 낭창낭창하다. 특히 루빈슈타인의 청량한 연주는 요맘때 제격이다.  
 
협주곡 2번 1악장은 호른 도입부가 끝나면 바로 피아노 독주가 시작된다. 공부도 잘하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은 교회 오빠처럼 자신감이 느껴진다. 이어 시작되는 웅장하고 두꺼운 관현악 총주는 “이봐, 그래도 나는 브람스야”라고 하는 것 같다.  
 
연주는 낡은 오케스트라 덕에 복고적인 낭만이 묻어있다. 루빈슈타인의 화려함과 경쾌함은 어쩌면 세기말 빈의 흥청거리는 샴페인 잔에서 물려받은 정서가 아닌가 싶다.  
 
빼먹지 말아야할 게 3악장의 첼로 독주다. 도입부에 배치된 첼로 독주는 고요한 숲길을 걷는 평화로움 자체다. 그 길 끝에서 피아노가 맑은 호수에 여린 파문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하루키의 에세이 중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를 읽고 생애 처음으로 저녁에 면도를 해봤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루를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랄까. 하여간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해야 인생이 즐거워지는 법이다. “그렇다면 하루쯤은 평소 듣지 않던 클래식음악에 귀 기울여보면 어떨까요?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2번입니다.”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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