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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은 수평적 조직, 권력 분산 등 시대의 요구 버무려진 것”

SPECIAL REPORT 
이정엽

이정엽

지난 1월 11일. 암호화폐 시장은 일대 혼란에 휩싸였다. 2100만원 선을 웃돌던 비트코인 가격이 갑자기 1400만원 선까지 급락했다.  
 

이정엽 대전지방법원 부장판사
판사·검사·변호사·교수 등 200명
블록체인법학회 창립총회 열어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암호화폐 거래소 폐쇄 방침을 언급한 탓이다. 박 장관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거래소 폐쇄) 정부 입법안을 준비 중”이라며 “가상화폐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법무부는 정확지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가상증표’ 정도로 부르는 게 정확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투자자들은 이 사건을 ‘상기의 난’이라 명명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법조계는 암호화폐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이는 편견이다. 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간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암호화폐와 그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뭉쳤다. 지난달 24일 블록체인법학회가 서울 중앙지법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현직 판사·검사·변호사 및 교수, 업계 전문가 등 200여 명이 정회원이다.
 
학회를 주도한 인물은 이정엽(사진) 대전지방법원 부장판사다. 지난 6일 전화 인터뷰를 통해 그에게 블록체인 정신에 대해 물었다.
 
어쩌다(?) 블록체인에 관심을 갖게 됐는가.
“물리학과 같은 기초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정보ㆍ네트워크와 같은 새로운 과학서적을 읽게 됐다. 개인정보보호법과 관련한 문제가 너무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됐다. 정보가 디지털화되면서 계속해서 더 큰 문제가 생기고, 권력과 부가 집중되는데 특별히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블록체인관련 서적을 보게 됐다. 그 잠재력에 대해 공부해 갈수록 블록체인은 단순한 기술이 아닌 사회현상이고,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잠재력을 가진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 다른 분야의 공부는 그만하고 이제 10년간 블록체인에 대해서만 공부해야겠다고 페북에 썼다.”
 
블록체인의 철학 혹은 정신은 무엇인가.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다양한 해답의 하나가 블록체인 기술이고, 그러한 시대의 요구가 블록체인의 철학이다. 정보가 자원이 되는 이 시대에 블록체인을 통해 정보를 만들어 내는 개인이 정보의 관리권을 되찾을 수 있다. 금융 시스템에서 소외된 수많은 사람도 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러한 블록체인의 철학은 포스트 자본주의, 수평적 조직의 부상, 권력과 부의 분산 등 다양한 시대적 요구가 버무려진 것이다.”
 
법학회 창립 총회사에서 ‘블록체이니즘’을 언급했다. 블록체이니즘이란 무엇인가.
“블록체인은 르네상스나 산업혁명, 근대 자본주의의 태동과 같이 역사 속 거대한 흐름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인터넷 혁명보다 더 큰 인류 문명의 진보라는 측면에서 기술을 뛰어넘는 하나의 사조, 시대 흐름을 표현하고 싶어 새로운 용어를 찾다가 블록체이니즘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너무 뿌듯했다. 혹시나 싶어 구글링 해 봤더니 어떤 한 분이 스팀잇에 짤막하게 블록체이니즘이라는 말을 썼더라. 최초는 아니고 두 번째 정도로 만족한다.”
 
법학회의 운영 방식도 블록체인 정신을 구현하는 방향인가.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먼저, 지적 성과물의 가치를 편집위원회나 논문심사위원회 같은 중앙에 맡기지 않는다. 네트워크 자체의 평가의 집합으로 평가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탈중앙화다. 다른 하나는 회원들이 학회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점수를 부여한다. 기여 점수는 사전에 합의된 코드에 따라 자동으로 부여된다. 이 점수는 위변조할 수 없도록 블록체인에 저장된다. 나중에는 이 점수가 토큰화돼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른바 토큰 이코노미의 설계다.”
 
블록체인이라고 하면 기술 문제만을 떠올리기 쉬운데 기술을 뛰어넘는 하나의 사조로 봤다. 블록체인과 자본주의 혹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연관돼 있나.
“남미 경제학자 에르난도 데 소토에 따르면 자본은 ‘가치 있는 자원의 소유권·처분권을 명확히 해 추상화시킨 것’이다. 자본집중으로 인한 빈부격차, 공공재와 자원에 대한 약탈적 소비도 문제이지만 정보를 부동산·상품·원자재 등과 같이 자본화할 수 있는지가 문제의 핵심이다. 정보가 자본화되는 경우 자본의 원천인 개인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보의 생산·유통자에 대해 보상함으로써 정보의 자본화가 가능하다면 지금의 자본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가 디자인돼야 한다. 그리고 그런 네트워크를 디자인해 자본화하는 기술이 블록체인 기술이다. 블록체인은 정보 자원의 단순한 사용가치를 넘어 이를 자본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기술이다. 이 같은 가치 이전은 전통 화폐 시스템에서는 너무 어렵다. 그래서 암호화폐가 생겨났다. 암호화폐를 어떻게 생성하고 유통할 것인지는 네트워크의 합의에 따라 이뤄져야 하고, 이런 합의의 방법은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그런 맥락에서 블록체인은 민주주의의 구현 방법도 변화시킬 것이다.”
 
블록체인 사상의 출발은 사이퍼펑크에서 나왔다. 이들은 극도의 국가 개입이나 간섭을 꺼려한다. 대부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다. 얼핏 보기엔 판사는 블록체인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판사들이 꿈꾸는 목표는 법치주의의 구현이다. 사실, 법은 곧 코드다. 네트워크 합의를 통해 법을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법을 통해 자유ㆍ평등ㆍ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블록체이니즘은 오히려 법치주의를 바라는 법조인의 생각에 잘 들어맞는다. 정부를 코드로 대체해 어떤 개인이 자의적으로 공권력을 사유화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생각을 무정부주의라고 보긴 어렵지 않나.”
 
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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