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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오늘 아침 바람

성기완 밴드 앗싸 멤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성기완 밴드 앗싸 멤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창문이 열려 있었어요. 실은 열려 있는지도 모르고 잠들었나 봐요. 여름 내내 그랬으니까. 조금 뒤숭숭한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깼어요. 바람이 부네요. 아니, 당신이 와요. 보이지 않는 당신이 창문을 통해서. 이제 살에 느껴져요. 당신의 입김이 오늘따라 시원하네요. 아니 서늘해요. 당신으로 인해 혹독했던 여름은 가는 건가요.
 
그런데 말이죠, 당신은 들어오나 싶게, 사라져요. 차도 한 잔 안 하고 등을 돌려요. 창문으로 들어온 당신이 창문으로 나가요. 방안의 물건과 기억들을 하나씩 둘씩 데리고 나가 방은 텅 비었어요. 심지어 나마저도 없어요. 바람은 창문으로 들어와 내 몸을 통과한 뒤 창문으로 나가요. 내 몸의 덩어리와 흔적들을 하나씩 둘씩 데리고 나가 나는 텅 비었어요. 심지어 방안에도 없어요. 이제 이 빈 곳은 아무 것도, 아무도 없으니 아무도 몰라요. 그렇게 당신과 나는 아무도 모르게 만나요.
 
누가 당신을 보았겠어요. 그러나 당신은 모든 것. 당신은 없는 듯 자유롭게 다녀요. 어쩌면 당신은 없어진 모든 존재의 흔적이죠. 투명한 당신 안에 사라진 모든 꽃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그래서 당신은 향기로워요. 살갗에 닿아 나를 만지고 내 서늘한 꿈자리에서 대화해요. 숨결로 들어오더니 입김으로 나가요. 당신은 나예요. 당신은 죽음 너머를 투명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인디언 여인이예요. 그 허망한 눈빛 안에는 가장 강한 확신이 숨겨져 있어요. 보이지 않는 것은 모든 것.
 
삶의 향기 9/8

삶의 향기 9/8

당신은 너무 감정적이예요. 너무너무 달콤하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화를 내요. 이해할 수 없어요. 지난여름 입술에 하얀 소금기를 머금고 괴로워하던 당신을 잊을 수 없어요. 어두워져 가는 해변가였어요. 나는 당신이 죽을까 봐 목 놓아 불렀어요. 없는 당신을. 몸부림치는 당신을 끌어안고 말하고 싶었어요. 제발 진정하라고. 불같이 화를 내는 당신은 불과 같아요. 당신은 불이예요. 저 밑에서 화릉거리며 끊임없이 암시하는 붉은 웅성거림, 숨어있는 불씨 속에서 당신은 가쁜 숨을 쉬며 끝없이 살을 갈구해요. 당신은 그렇게 나무 한 그루를 다 태우고, 끝내 연기가 됩니다. 흔적도 없이 재가 된 열매들이 느릿느릿 연기의 머리칼을 풀어헤쳐요. 연기가 살의 추억을 데리고 하늘을 향해요. 믿을 수 없어요. 당신, 그토록 가벼워요?
 
오늘 아침 바람 끝에 달린 붓이 방안에서 꿈꾸던 색깔들을 지우고, 이제 이 빈 곳을 지난 바람이 창밖의 초록을 지울 차례. 여름이 무척 길었고 초록은 짙어졌어요. 초록이 어두워져 군복 같아질 때쯤 당신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 했어요? 당신이 나를 당신의 붓으로 지우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어둠입니다. 밤의 돌 벤치에서 나눈 따뜻한 어둠. 어두워서 다행이었죠. 바람은 그런 작은 포옹에서 시작되나 봐요. 오늘 아침 분 바람은, 그래요, 그 돌 벤치에서 일기 시작했어요. 느리고 우울한 네온사인이 흔들려도 아랑곳없이 우리를 지켜주는 어둠. 아무 것도 없고 아무도 모르는 나의 지나치게 작은 방에 잠시 머물렀다 가세요. 묵은 신문더미를 바깥에 내놓을 작정이에요. 슬픔과 쓸쓸함이 무거운 습기로 쌓이는 바람에 그 신문들은 분노를 머금고 있어요. 우리 모두는 이 답답한 도시의 오동나무 관 안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산 시체들인가요. 불행한 도시의 텃새들이 부르는 노래를 감상하다가 문득 내 가슴을 통과한 당신의 떨림이 불씨처럼 옮겨 붙어 새의 목청을 울린다는 걸 알게 돼요. 당신은 노래입니다. 빨래들이 당신과 춤을 추며 뽀송뽀송 노래할 거예요. 지난여름의 미친 듯한 춤사위는 다 잊었어요. 모든 게 하얗게 칠해질 때까지, 모든 소리가 지워져 침묵에 이를 때까지, 모시적삼을 입고 너울거리는 오늘 아침 바람, 당신이 텅 빈 내 몸을 통과할 때 어찌나 달콤하던지! 난 깨어 기다릴게요. 더, 더, 더, 달디 달게 모든 걸 가루로 스러뜨리는 당신, 바람을.
 
성기완 밴드 앗싸 멤버·계원예술대 융합예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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