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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달러 내면 영어 논문, 가짜 학술지 유혹에 빠진 교수들

배영찬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부총장은 “2019년 3월 26일부터 5일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리는 고분자에 관한 국제 학술대회에 강연자로 초빙하고 싶다”는 내용의 e메일을 지난 6일 받았다. 배 부총장은“이름을 듣도 보도 못한 외국 학회가 보낸 영문 e메일이 요즘 너무 많다”고 말했다. 강연 요청은 물론 논문 투고 요청, 해외 유명 휴양지 학술대회 개최 홍보 메일까지 받는 족족 삭제해도 메일함이 넘친다. 지운 e메일 중엔 99달러(11만 여원)만 내면 영어 학술지 논문이 나온다는 것도 있다.
 

‘와셋’ 사태로 본 해적 학술지 실태
전 세계 996개 출판사 8000여 종
‘강연자 초청’ 등 무차별 e메일

임용·승진 급한 교수 등 걸려들어
한국 700명 ‘와셋’ 통해 논문 실적

연구비 환수 위해 조사 들어간 정부
가짜·진짜 가리기 쉽지 않아 고심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서태설 학술정보공유센터장이 지난달 받은 IOSR(International Organization of Scientific Reserach)이라는 단체의 논문 투고 요청 메일엔 “8월 14일까지 원고를 보내주면 24일 게재해준다”는 내용이 있다.  
 
인터넷 매체인 ‘뉴스타파’는 ‘세계과학공학기술학회(WASET, 와셋)’이 주최한 가짜 국제학술대회에 700명이 넘는 한국의 대학 교수, 연구소 연구원이 정부 지원 연구비를 내고 참가하거나 논문 심사(리뷰)과정이 부실한 가짜 학술지에 논문을 냈다고 최근 보도했다. 국민 세금으로 해외 휴양지에서 개최되는 가짜 학술대회에 참석해 돈을 낭비하고, 와셋이 운영하는 학술지에 논문을 내 자기의 실적으로 챙겼다는 것이다. 와셋은 학술대회를 개최하거나 학회지를 내는 온라인 기반 학술단체. ‘와셋 사태’로 불거진 가짜학술의 세계는 이런 e메일이 제시하는 달콤한 유혹에 학자들이 걸려들면서 펼쳐진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내 돈 안 쓰고 논문 생기고
 
전남대의 한 교수가 지난 6월 와셋이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연 학술대회에 낸 참가비(등록비)는 450 유로(58만 여원). 여기에 학술지 출간까지 하려면 100 유로만 더 내면 된다. 자기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BK21 같은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금을 받는 대학 교수는 지원금을 이런 곳에 써도 되기 때문이다. 서울 한 대학의 교직원은 “정부 연구비는 기한 내 써야 하는데 이런 해외학술행사를 제안하는 e메일이 오면 오히려 반가워한다”고 꼬집었다.
 
여기에 논문 실적까지 덤으로 생긴다. 대학이 새로운 교수를 임용하거나 기존 교수의 승진 또는 테뉴어(tenure, 65세까지 종신 재직)를 심사할 때 영어 학술지 논문 한 편은 70점 정도를 부여한다. 와셋이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 가서 논문을 발표하면 50점이다. 이 점수는 특허청에 특허를 내 특허 한 건을 등록한 것과 같은 점수다.
 
사실 교수만의 문제도 아니다. 석사나 박사과정 학생들이 박사 논문을 쓰려면  자격 조건으로 학술지에 논문을 낸 실적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리뷰 절차가 까다롭지 않은 학술지를 골라 여기에 논문을 낸다. KISTI 서태설 센터장은 “평균 100만원을 내면 영어로 된 논문이 나오는데 이런 유혹을 떨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가짜 범람은 전 세계적 현상
 
가짜뉴스(fake news)가 진실보도를 압도하듯 가짜학술지(fake journal)가 학문의 권위를 짓누르는 현상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젯 마식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의학원 교수는 지난해 와셋과 유사한 오믹스(OMICS Publishing Group)에 당한 사례를 발표해 논란을 일으켰다. 마식 교수는 오믹스가 운영하는 학회지의 편집진(Editorial Board)을 맡아달라는 요청 메일을 받은 뒤 여기에 응했다가 자신의 이름이 논문 투고 홍보에 이용되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편집진에서 나가고 싶다고 했는데도 내 이름과 얼굴 사진, 경력은 한동안 사이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며 “오믹스는 전형적인 약탈적 학술출판사(predatory pubilsher)”라고 말했다.
 
국내 한 국립대의 뇌과학 전공 교수가 오믹스에 연루된 것도 “미국 휴스턴에서 개최되는 면역학 국제 학술대회에서 50개 이상의 국적을 지닌 300여 명 이상의 전 세계 학자들 앞에서 강연자로 초청한다”는 내용의 메일을 받으면서다. DGIST 배 부총장은 “와셋이나 오믹스 등의 비즈니스 모델은 돈만 내면 리뷰 없이 출판을 해주는 것”이라며 “연구 실적의 압박을 받고 있는 교수들이 걸려 들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논문을 내든지 아니면 도태되든지(publish or perish)’라는 압박도 가짜학술지 확산에 있어서 한 요인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와셋 또는 오믹스만 문제일까. 한국 학자들이 주로 걸려든 곳이 이곳일 뿐이다. 미국 콜로라도대의 사서인 제프리 빌이 가짜학술지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가짜학술지 리스트를 공개했는데 그의 이름을 딴 빌 리스트가 해마다 업데이트되고 있을 정도다. 2014년 기준으로 996개 출판사가 8000여 종의 가짜학술지를 발간한 것으로 돼 있다. 이 숫자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빠른 심사·출판 내세워 현혹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교육부는 와셋을 계기로 가짜학술의 문제가 제기되자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정부는 연구지원금 남용 등의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전체 대학과 연구원 등을 상대로 실태를 조사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와셋이나 오믹스에 연루된 교수들은 조사 과정에서 “문제가 있는 곳인지 몰랐다”고 해명했다. 연구비를 집행하는 한국연구재단 등은 일단 정부 지원금으로 와셋 등이 개최한 학술행사에 참가한 출장비나 논문 게재비를 전액 돌려받고, 심할 경우 지원 연구비를 환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윤소영 교육부 학술진흥과 과장은 “무엇이 허위이고 진실인지 구별이 쉽지는 않다. 정부차원에서 획일적 기준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데다 학자 개인의 연구 윤리와도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대책이 나오기 어려운 점은 학술세계에서도 가짜와 진짜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KISTI는 최근 ▶온라인 논문투고시스템 없이 메일로 원고를 요청한다▶논문 철회나 교정, 오타 수정, 표절 등의 정책이 없다▶빠른 동료 심사, 빠른 출판 등을 내세워 저자를 현혹한다 등의 구분 기준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오믹스가 운영하는 한 학술지에 논문을 낸 서울대 행정대학원의 한 교수는 “교신저자였던 다른 대학 교수가 공동저자로 돼 있는 내 논문을 오믹스에 냈다. 그런데 그곳에서 논문 수정 요청은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가짜학술지 리스트에 오른 기관이 개최한 국제행사에 반복적으로 참가하거나 문제가 있는 줄 알면서도 이곳에 논문을 투고해 실적을 쌓는 사례는 분명 문제가 될 수는 있다. DGIST 배 부총장은 “잘 모르고 한 번 정도 참가할 순 있다. 그런데 가보면 얼마나 허접한 학술행사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계속 가고, 논문을 낸다면 이건 큰 문제”라고 말했다.
 
강홍준 기자 kang.hong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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