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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빠진 당신을 위로해 줄 '그녀의 고행기'

기자
김성희 사진 김성희
[더,오래] 김성희의 천일서화(2)
책생책사(冊生冊死). 책을 읽고 기자를 꿈꿨고, 출판팀장으로 기자 생활을 마무리했다.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핵심은 ‘재미’였다. 공연히 무게 잡는 책은 싫기도 하고 읽어낼 깜냥도 못 되었으니.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책’ 이야기 또는 재미있는 ‘책 이야기’를 쓰려 한다. 실타래가 풀려나가는 듯한 아라비안나이트식 책 이야기를 꿈꾸며. <편집자>
 
셰릴 스트레이트 자서전 '와일드'를 원작으로 한 영화 '와일드'의 스틸 컷. [중앙포토]

셰릴 스트레이트 자서전 '와일드'를 원작으로 한 영화 '와일드'의 스틸 컷. [중앙포토]

 
여행이 흥미롭고 안전하게 된 것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되지 않았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여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중 대표적인 ‘travel'은 진통, 산고(産苦), 노고를 뜻하는 'travail’과 사촌 간이며 두 단어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문 도구’를 뜻하는 중세 라틴어에 이른다는 사실이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빌 브라이슨의 명랑한 도보 여행기 『나를 부르는 숲』은 근대 이후 여행 흐름에 충실한 책이다. 하지만 흔히 여행으로 비유되는 인생이 그렇듯이, 여행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도전, 봉사 또는 업무를 위해 집을 떠나는 이들에게 즐거운 여행이란 그야말로 먼 나라 이야기일 것이다.
 
트레일을 걷는 도보여행 또한 마찬가지다. 브라이슨과 다른 여행기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이제 소개하려는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우진하 옮김, 나무의 철학)이 딱 그렇다.
 
책 와일드,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중앙포토]

책 와일드,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중앙포토]

 
두 책은 영 딴판이다. 우선 스트레이드는 서부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에 도전했다. PCT는 브라이슨이 걸은 애팔래치아 트레일보다 약 1000㎞가 더 길고 개발도 덜 됐다. 두 산길은 유원지와 황무지만큼 분위기가 다르다.
 
두 사람 다 트레일 초보라는 점은 마찬가지나 처지가 다르다. 40대 중반의 인정받는 언론인 브라이슨은 친구와 함께 ‘한 번 가볼까’하는 기분으로 트레일 걷기에 나선다. 도전이라기보다 일종의 여흥이다. 그러기에 브라이슨은 중도에 포기하면서도 “우린 시도했다”고 만족해한다.
 
스트레이드는 아니다. 1995년 당시 26살짜리 ‘돌싱’이다. 열아홉 살에 결혼했다가 막 이혼한 상태다. 엄마를 잃은 아픔에 낯모르는 남자들과 하룻밤을 즐기기도 하고 마약까지 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남편과 갈라섰다. 그 4년 전엔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던 엄마를 암으로 잃었다.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다. 인생 막장이다. 이혼 후 새로 정한 성(姓)이 ‘길을 잃다’란 뜻이니 지은이가 처한 상황이 짐작 갈 것이다.
 
스트레이트는 인생 막장의 상황에서 그냥 보통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종주에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스트레이트는 인생 막장의 상황에서 그냥 보통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종주에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스스로 ‘가슴에 구멍 뚫린 여자’를 자처하는 이 젊은 여성은 PCT 종주에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그것도 홀로. “강한 의지와 책임감, 맑은 눈을 가진 사람, 의욕이 넘치며 상식을 거스르지 않는 그냥 보통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걸쳐 있는 PCT는 9개의 산맥과 사막, 열대우림과 강이 곳곳에 있으며, 우리나라 백두대간-진부령에서 지리산까지 800㎞가 안 된다-의 5배가 넘는 먼 길이다. 한창 젊은이라도 종주를 하려면 150일이 걸리는 이 길을, 스트레이드는 캘리포니아 남쪽 끝 모하비사막에서 시작한다.
 
모텔 방에서의 출발부터 ‘웃픈’ 광경이 벌어진다. “폭스바겐처럼 예쁘장한 모습에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만 같은” 배낭을 지고 일어날 수 없어 쩔쩔맨다. 10ℓ들이 물통 등 첫 번째 보급소에 닿기까지 14일간 야영에 필요한 온갖 장비를 챙긴 데다 겨드랑이 탈취제, 콘돔 박스, 책까지 욱여넣는 바람에 자기 몸무게의 절반에 달하는 배낭은 가히 ‘몬스터(괴물)’라 불린다.
 
영화 '와일드'에서 셰릴 스트레이트 역을 맡은 리즈 위더스푼. 10L 물통, 겨드랑이 탈취제, 콘돔 박스, 책 등 14일간 야영에 필요한 온갖 장비를 욱여넣은 배낭 '몬스터'를 매고 있다. [중앙포토]

영화 '와일드'에서 셰릴 스트레이트 역을 맡은 리즈 위더스푼. 10L 물통, 겨드랑이 탈취제, 콘돔 박스, 책 등 14일간 야영에 필요한 온갖 장비를 욱여넣은 배낭 '몬스터'를 매고 있다. [중앙포토]

 
그러니 하루 20㎞를 석 달간 걷기로 했던 당초 계획과는 달리 한 시간에 1.6㎞, 하루 10㎞를 걷는 게 고작일 수밖에. 등산화를 잃어버려 테이프로 칭칭 감은 샌들로 버티는가 하면 여우와 곰을 만나고, 개구리로 온몸이 뒤덮이기도 하고, 방울뱀을 밟을 뻔하면서 스트레이드는 한 걸음 한 걸음 목적지를 향해 간다. 
 
발은 부르트고, 배낭에 쓸린 엉덩이에 굳은살이 생기는 등 몸이 ‘깨진 유리잔’처럼 느껴지면서도. 그 몸부림은 ‘PCT를 마칠 때 발톱 6개가 빠졌다’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다.
 
해발 2000m가 넘는 길을 걸어내면서 인생 담금질에 성공한 스트레이드는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불허인가.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란 구절로 책을 마무리한다.
 
깊은 깨달음을 소리 높여 외치지도 않고, 극적인 드라마도 없어 읽기에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이 책은 자신이 바닥에 놓여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라면 펼쳐볼 만하다. 절망에 빠진 이에게 가장 큰 위로는 다른 사람의 더 큰 불행이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jaeja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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