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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호의 어깃장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32> 바덴바덴: 인격 살인?
2018년 2월 8일부터 3월 13일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에서 개최된 투르게네프 탄생 200주년 기념 전시회에 등장한 삽화. 도스토옙스키와 투르게네프의 묘한 채무관계를 그렸다.

2018년 2월 8일부터 3월 13일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에서 개최된 투르게네프 탄생 200주년 기념 전시회에 등장한 삽화. 도스토옙스키와 투르게네프의 묘한 채무관계를 그렸다.

 
독일 남서부의 작지만 호화로운 도시 바덴바덴. 중앙역 앞에서 201번 버스를 타고 레오폴트플라츠에서 하차했다. 낯선 이름의 거리를 따라 걷다가 작은 카페와 부티크와 호프로 들어찬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올라가다 보니 왼편에 ‘도스토옙스키 하우스’라는 표지판이 붙은 작은 건물이 나타났다. 1867년 여름 도스토옙스키 부부가 묵었던 셋집이다. 건물 외벽에 도스토옙스키  부조가 걸려 있고, 1층에는 부동산 사무실이 입점해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관광 마차가 그 앞에 서니 19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세트장처럼 보였다.  
 
독일 바덴바덴 뵈데르스트라세 2번지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하우스. 2층에 설치된 도스토옙스키 부조는 러시아 조각가 레오니드 바라노프의 2004년 작품이다.

독일 바덴바덴 뵈데르스트라세 2번지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하우스. 2층에 설치된 도스토옙스키 부조는 러시아 조각가 레오니드 바라노프의 2004년 작품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한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베를린과 드레스덴을 거쳐 스위스로 향하던 중 유명한 카지노 도시 바덴바덴에 들렀다. 원래 2주 정도 머물 계획이었지만 8월 11일까지 약 7주간을 머물렀다. 도스토옙스키는 잃고 따기를 반복했고 물건을 저당잡혔다가 찾기 역시 반복했다. 방세가 밀려 주인으로부터 지청구를 당했다. 장모가 부쳐준 돈은 금세 바닥났다.  
 
 
그 와중에 도스토옙스키 ‘인격’과 관련해서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5년 여름, 비스바덴 도박장에서 완전히 알거지가 된 도스토옙스키는 온갖 지인들에게 구조요청 편지를 쓰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덴바덴에 머물고 있던 소설가 투르게네프였다.  
 
그는 “가장 존경스럽고 가장 친절하신 투르게네프 선생님”으로 시작하는 다소 궁상맞은 편지에서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현명하시므로 선생님께 의탁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한결 수월하다”는 이상한 논리를 들먹이며 “100탈러를 빌려달라”고 청했다. 투르게네프는 요청한 금액의 절반인 50탈러를 빌려주었고, 도스토옙스키는 “한 달 뒤에 갚는다”고 하고서는 2년 뒤 바덴바덴에 들른 그 시점까지 못 갚았다.  
 
투르게네프는 갚으라고 독촉을 한 적이 없고 도스토옙스키 역시 빌려 쓴 돈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사소한 일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의 관계는 험악한 대결로 치달았다. 사건의 전반부는 심리전이고 후반부는 이념전이다.  
 
도박 빚이 빚어낸 감정 싸움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이 그린 대문호 이반 투르게네프 초상화 (1874)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이 그린 대문호 이반 투르게네프 초상화 (1874)

바덴바덴에서 산책 중이던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작가 곤차로프와 마주쳤다. 곤차로프는 별생각 없이 “투르게네프 선생도 당신을 보았다더라, 그런데 그냥 못 본 척했다더라”는 말을 흘렸다. 이 말 때문에 도스토옙스키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투르게네프가 나를 못 본 척한 것은 혹시라도 내가 빚 때문에 자존심 상해할까봐 봐준답시고 그런 것 아닐까. 내가 만일 투르게네프를 찾아가지 않으면 그는 내가 자격지심 때문에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독자께서 혹시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지만, 청년 시절 투르게네프는 친구와 함께 풍자시를 써서 “러시아 문학의 낯짝에 솟은 여드름”이라고 도스토옙스키를 조롱한 적이 있다(연재 7회 참조). 그 때 입은 상처는 유형 생활 동안 아물었지만 투르게네프는 그에게 여전히 불편한 존재였다. 그는 문단의 거물이었고, 재산가였고, 심지어 외모도 도스토옙스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번듯했다. 빚이 아니더라도 도스토옙스키는 그 앞에서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투르게네프의 영원한 애인 폴린 비아르도 부인(1844). K. 브률로프의 드로잉이다.

투르게네프의 영원한 애인 폴린 비아르도 부인(1844). K. 브률로프의 드로잉이다.

투르게네프는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대학,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베를린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나중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도 받았다. 러시아 작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아름답고 유려한 문체와 수채화처럼 맑고 은은한 묘사 덕분에 유럽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 열광했다. 플로베르, 모파상, 공쿠르 형제와 막역한 사이였으며, 성인이 된 후 인생의 대부분을 바덴바덴, 파리 등 유럽에서 지냈다. 하녀와 관계를 맺어 사생아 딸을 하나 두었으나 호적상으로는 평생 독신이었다.  
 
그가 홀로 유럽을 떠돌며 산 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스페인 혈통의 유명한 프랑스 메조소프라노 마담 비아르도가 1843년 러시아에서 『세비야의 이발사』 무대에 오른 것은 투르게네프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투르게네프는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극장 감독 비아르도의 부인이었다. 투르게네프는 그녀를 본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그녀를 연모하고 숭배했다. 극장이건 살롱이건 저택이건 그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의 사랑은 시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고상하고, 처절했다. 그의 지순한 사랑에 감동해서 그랬던지, 아니면 그의 부와 명성이 마담 비아르도의 품위 유지에 도움이 되어서 그랬던지 비아르도 부부는 그를 친구이자 ‘가족’(!)으로 받아들여 그들은 기이한 삼각관계를 계속해 나갔다. 투르게네프가 당시 바덴바덴에 머물었던 것도 비아르도 부부의 살롱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수저’ 투르게네프에 대한 열등감
도스토옙스키는 1867년 6월 28일 씩씩거리며 투르게네프의 집을 찾아갔다. ‘바덴바덴의 대결’로 알려진 이날의 만남은 러시아 문학사와 사상사에까지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다. 그는 투르게네프를 불쑥 찾아가 빚 얘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투르게네프의 해외 거주와 서구파 이념,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를 향해 집중사격을 했다.    
 
도스토옙스키가 그 해 8월에 문우 마이코프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그는 우선 투르게네프의 “잘난 척하는 귀족적인 포옹이 싫다”며 운을 뗀다. 이어서 투르게네프의 최근작 『연기』의 몇몇 대목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투르게네프를 일종의 ‘매국노’로 몰아간다.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투르게네프는 등장인물의 말 “러시아가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아쉬울 것 없다, 인류는 눈 하나 깜빡 안할 것이다”가 자신의 기본견해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투르게네프가 “우리는 독일인들 앞에서 몸을 낮추어 기어야 하며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문명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대체 문명이 독일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느냐”고 반격하면서 독일인들은 멍청하고 사악한 종족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투르게네프는 그런 말은 자기를 모욕하는 것이라 쏘아 붙이며 “나는 이 곳에 아주 정착했고 나 자신을 러시아인이 아니라 독일인으로 여기고 있답니다. 나는 그게 자랑스러워요”라고 어깃장을 놓았다.  
 
물론 도스토옙스키가 아예 없는 말을 지어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분명 편파적이다. 열등감과 돈을 못 갚은 데 대한 수치심으로 꽁꽁 묶인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투르게네프가 했다는 말은 다른 맥락에서, 다른 의미로, 백 가지 다른 가능한 뉘앙스로 했을 수 있다.  
 
소설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조롱하기도
도스토옙스키의 억하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뒤끝 작렬’이라는 표현이야말로 딱 그에게 해당된다. 그는 몇 년 뒤 소설 『악령』에서 믿을 수 없이 야비한 방식으로 투르게네프를 공격했다. 거의 ‘인격살인’이었다. 소설에는 여러 정황에 미루어 투르게네프라는 것이 분명한 노작가가 등장한다. 저자는 그를 “상류 사회와의 연줄에 급급하고 거드름 피우고 간교하고 영악한 늙은이”, “남의 이념에다 그 이념의 안티테제를 가져다 붙여서는 흰소리를 지껄여대는 이류급 작가”라 불렀다. 
 
도스토옙스키의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전기의 이 대목에서는 도스토옙스키를 편들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 그는 “조국에 유용할 수도 있을 사람이 변절자가 되어 러시아를 욕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며 자신의 ‘추태’를 정당화시켰다. 러시아가 싫어서 러시아를 떠난 귀족들, 그리고 그들의 대표자로서의 투르게네프가 결여하는 애국심을 질타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과거에도 현재에도 투르게네프를 러시아의 배신자 취급하는 사람은 없다. 애국심이란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재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두 사람의 당시 상황을 아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투르게네프에게 동정표를 줄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막 『죄와 벌』  연재를 인기리에 마친 베스트셀러 작가였고, 투르게네프는 최근작 『연기』에서 혹평을 받고 내리막길에 들어선 ‘지는 해’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얼마 전에 꽃다운 부인과 가정을 꾸린 행복한 새신랑이었고, 투르게네프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안으로 삭이며 객지를 떠도는 불쌍한 ‘그림자 애인’이었다.  
 
투르게네프는 당시의 도스토옙스키를 “정신 건강을 유지할 수 없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 사람이 내 의견이라 말한 그 부분은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내 속내를 드러냈다고 그 사람은 말했지만 나는 속내를 드러낼 겨를도 없었어요. 그 사람은 독일인, 나, 그리고 내 최근 책에 대한 반감을 폭발시킨 뒤 휭하니 가버렸어요.” 『악령』의 패러디를 읽고 나서는 “그토록 대단한 재능을 그토록 추악한 감정을 위해 사용하다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며 개탄했다.
 
먼 훗날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쳤던 것 같다. 애독자로서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스토옙스키가 1876년에 쓴 미발표 평론이 1981년에 빛을 보았다. 이 평론에서 그는 투르게네프의 소설 『귀족의 보금자리』야말로 “불멸의 작품”이라며 극찬했다. “모든 러시아인, 모든 러시아 시인의 예언적 꿈”이라고도 했다. 심지어 “러시아 문학 전체를 통틀어서 진리와 아름다움이 존재함을 말해주는 가장 고상한 증거”라고도 했다. 『악령』에서 조롱한 “거드름 피우는 이류급 작가”는 어디로 갔는지. 어쨌거나 소설가는 소설에 관해 쓸 때 가장 정직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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