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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임수 천재 스탈린이 보여준 공산주의 협상술의 원형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1943년 테헤란회담의 빅 스리 외교기법
1943년 11월 테헤란회담의 장소인 러시아(옛 소련) 대사관 경내 메인 빌딩의 현재 모습.

1943년 11월 테헤란회담의 장소인 러시아(옛 소련) 대사관 경내 메인 빌딩의 현재 모습.

네 개의 회담은 장엄한 풍광이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장면이다. 연합국 정상들의 결속무대다. 카이로→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1943.11~45.7). 그것은 최고의 국제정치 드라마였다. 주제는 전쟁과 평화. 거기서 추축국(독일·일본)을 패망시킬 전략이 짜였다. 전쟁 이후 세계 질서가 설계됐다. 한국의 독립문제도 다뤄졌다. 작고 부수적 의제였다. 하지만 우리에겐 결정적 순간들이었다.
 
연합국 정상 세 사람(big three)이 건물 밖 로비에서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스탈린·루스벨트·처칠. 뒷줄 왼쪽부터 홉킨스(미국 대통령 보좌관), 몰로토프(소련 외상), 이든(영국 외무장관). [중앙포토]

연합국 정상 세 사람(big three)이 건물 밖 로비에서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스탈린·루스벨트·처칠. 뒷줄 왼쪽부터 홉킨스(미국 대통령 보좌관), 몰로토프(소련 외상), 이든(영국 외무장관). [중앙포토]

그중에서 테헤란과 얄타의 주역은 빅 스리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련(현 러시아)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그들의 통치술과 권력의지, 대중동원역량은 특출했다. 테헤란회담은 그런 리더십의 첫 경연장이었다. 세 사람의 합동 모임은 처음이다. 스탈린은 교묘했다. 그의 거래·담판은 공산주의 협상술의 원형이다. 그것은 노하우로 전수됐다. 북한의 외교기법에 담겼다. 그 장면들은 역사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나는 테헤란(이란 수도)으로 떠났다.
 
나는 그 무대를 찾아다녔다. 카이로(이집트, 메나하우스 호텔)·얄타(흑해 연안, 리바디아 궁전)·포츠담(독일, 체칠리엔호프 궁전) 회담 장소에 갔다. 역사의 진실은 기억의 현장에 존재한다. 테헤란회담은 그곳의 소련 대사관에서 열렸다. 지금은 러시아 대사관이다.
 
테헤란의 이맘 호메이니공항은 낯설다. 도시의 색깔은 무겁다. 여성의 차도르는 검은색이다. 도시의 내면은 다른 색이다. 이란은 페르시아다. 찬란한 문명, 장구한 역사다.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이다. 하지만 아랍이 아니다. 종족·언어가 다르다. 국립박물관에 가면 테헤란과 친숙해진다.
 
기념촬영 모습. 건물 위 삼각형 페디먼트(소련 문양 새김)는 1990년대 소련 붕괴 후 철거됐다. 아치형 창문과 둥근 기둥은 각진 형태로 바꿨다. [중앙포토]

기념촬영 모습. 건물 위 삼각형 페디먼트(소련 문양 새김)는 1990년대 소련 붕괴 후 철거됐다. 아치형 창문과 둥근 기둥은 각진 형태로 바꿨다. [중앙포토]

 
세는 연합국 우세다. 1943년 11월 28일 테헤란회담 무렵이다. 그해 2월 스탈린그라드(러시아 볼고그라드) 전투는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스탈린의 소련은 히틀러의 독일을 격퇴했다. 동부전선의 독·소전은 나치즘 대 공산주의 충돌이다. 잔혹한 독재자들의 결투는 참혹한 유혈극이었다.
 
테헤란의 러시아 대사관은 넓고 크다. 나의 테헤란회담 현장 방문은 한국 언론으론 처음이다. 대사관 경내를 차로 이동했다. 작은 호수를 지나니 메인 빌딩이다. 대사관 직원이 ‘역사적 기념 유산’이라고 했다. 나는 빛바랜 사진을 꺼내 보았다. 스탈린은 소련군 대원수 차림이다. 처칠은 공군 장군 복장. 영국 공군은 나치 공군의 본토 공략을 막아냈다. 그 자부심이 드러난다. 옛 건물은 살아있다.
 
간소, 중후한 기본 골격은 그대로다. 건물 위쪽이 달라졌다. 삼각형 페디먼트가 없어졌다. 거기에 소련 문양(낫과 망치)이 과시하듯 새겨져 있었다. 대사관 직원은 “1990년대 소련 해체 후 문양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페디먼트도 철거됐다”고 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왜 테헤란인가. 그것은 스탈린의 치밀한 연출이다. 그는 통제 가능한 공간을 선택했다. “그 무렵 영국·소련이 이란의 친(親)독일 움직임을 막으려고 테헤란을 점령했다. 이란은 소련 영향권이었다.” 현지 무역업자 카림 아즈문의 설명이다. 그는 나의 테헤란 안내자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을 만나려고 애썼다. 그 열망은 장소의 영향력을 잊게 했다. 그 직전에 카이로회담이 있었다. 중국 총통 장제스(蔣介石)가 참석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카이로에서 비행기로 떠났다. 스탈린은 열차로 출발했다. 안전 때문이다.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바쿠(현 아제르바이잔 수도)로 갔다. 바쿠에서 비행기를 탔다. 조지아(옛 그루지야)의 고리는 스탈린 고향. 그곳 박물관에 그의 전용 객차가 있다. 무게 83t 방탄이다.
 
그때 독일군의 암살작전 루머가 퍼졌다. 경호에 비상이 걸렸다. 루스벨트는 거처를 소련대사관으로 옮겼다. 영국 공사관은 소련대사관의 길 건너편. 공간 압축은 회담의 효율성을 높였다. 하지만 도청이 있었다. 그것은 스탈린의 비밀병기다.
 
그 사연들은 한국전쟁의 휴전회담을 떠올린다. 회담의 미국 대표는 C. 터너 조이 제독. 회담은 그에게 좌절과 고뇌였다. 그는 그 경험을 책 『공산주의자들은 어떻게 협상하는가』에 옮겼다. “그들은 세심하게 무대를 설정(stage setting)한다. 유리한 협상조건을 만들기 위해 물리적 환경을 고려한다.” 회담 장소는 개성이다. 중국과 북한이 제안했다. 공산군 통제 아래 있었다. 미국은 뒤늦게 장소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북한 지도자들의 이동수단은 열차다.
 
회의실의 벽난로와 샹들리에 모양은 75년 전 그대로다. 러시아의 쌍두 독수리 문양이 벽에 붙어 있다. 옆은 박보균 대기자.

회의실의 벽난로와 샹들리에 모양은 75년 전 그대로다. 러시아의 쌍두 독수리 문양이 벽에 붙어 있다. 옆은 박보균 대기자.

나는 메인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 흑백 사진이 30장쯤 붙어 있다. B3용지 크기다. 회담의 주요 순간들이다. 대사관 직원은 “메인 홀은 회담장이었고 공간구조는 그때와 비슷하다. 소파·샹들리에·문양이 바꿨을 뿐”이라고 했다. 사진 속 풍경은 나를 그 시대로 밀어넣는다.
 
둥근 테이블에 세 나라 깃발이 꽂혔다. 짧은 개막 연설이 이어졌다. 스탈린은 “역사는 우리에게 위대한 기회를 주었다”고 했다. 공산주의 언어는 서사시적 요소를 담는다. 그 힘으로 시선을 잡는다. 6·12 싱가포르 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도 그랬다.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어휘는 상투적 인사말이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다가갔다. 미국 역사학자 조지 맥짐시는 “루스벨트가 생각한 국제건축물의 쐐기돌(keystone)은 소련이고 영국은 부차적 존재였다(『the Presidency of FDR)』).” 루스벨트의 정책은 뉴딜이다. 뉴딜은 해체와 개혁, 공동번영이다. 뉴딜은 성공했다. 그는 그것을 국제정치에 투사했다. 개혁 대상은 유럽 식민주의다. 그에게 처칠은 제국주의자였다. 처칠은 대영제국의 해체를 거부했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루스벨트는 뉴딜의 이상주의적 설득력을 과신했다. “내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인다면 스탈린은 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위해 함께 일할 것이다(영국 역사가 폴 존슨의 『모던 타임스』).” 그것은 오판과 환상이었다. 그의 주변에 좌파·진보주의 참모들이 포진했다.
 
스탈린은 속임수의 천재다. 그의 정체는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그는 공포와 음모의 통치자다. 10대 시절엔 시인이고 신학교 학생이었다. 러시아사 전문가인 로버트 서비스의 저서(『스탈린』)는 이렇게 분석한다. “스탈린은 모든 면을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면은 드러내고 감춘다. 그는 자신을 나누고 다시 쪼개는(divide and subdivide)능력을 가졌다.” 그는 루스벨트의 허영심을 회유와 압박 도구로 재활용했다. 북한의 협상술은 벼랑 끝과 살라미다. 북한은 비핵화의 의미를 쪼갠다. 실천 과정을 나눈다. 미국은 그 수법에 당하고 있다.
 
 
‘움직이는 크렘린’ 스탈린 전용객차(고리 스탈린 박물관).

‘움직이는 크렘린’ 스탈린 전용객차(고리 스탈린 박물관).

군주(overlord)작전-. 제2전선 코드네임이다. 스탈린은 동부전선의 부담을 덜어달라고 했다. 서부전선에서 미·영군의 대독일 공격 요청이다. 상륙 지점을 놓고 의견이 갈렸다. 처칠의 제안은 지중해 동쪽. 스탈린은 프랑스 북부. 루스벨트는 스탈린 편에 섰다. 그것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이 결정됐다.
 
처칠은 스탈린의 야욕을 견제했다. 그는 노련했다. 발언권은 약해졌다. 외교는 국력의 연장이다. 미국의 존재감은 확고했다. 미국은 전쟁 물주다. 소련·영국에 군수품을 대량 지원했다. 독일의 결정적 패퇴는 소련의 저항력 덕분이다. 소련군 희생자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영국은 하위(junior)파트너로 떨어졌다.
 
소련군 원수 보로실로프가 보검을 루스벨트(앉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있다. 스탈린(왼쪽)과 처칠(오른쪽)이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소련군 원수 보로실로프가 보검을 루스벨트(앉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있다. 스탈린(왼쪽)과 처칠(오른쪽)이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보검 전달식이 회담의 역사성과 격조를 높였다.” 직원의 설명은 흥미롭다. 스탈린그라드 승전 기념 보검-. 그 칼은 존경과 우호를 노래한다. 영국 국왕 조지6세의 선물이다. 길이 1.25m, 손잡이는 18캐럿 금줄. 처칠은 칼을 스탈린에게 전달했다. 스탈린은 칼집에 입을 맞췄다. 루스벨트는 절정의 장면을 지켜봤다. 보검은 볼고그라드의 전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처칠이 스탈린에게 전달한 ‘스탈린그라드 승전 축하’ 보검(영국왕 조지6세 선물).

처칠이 스탈린에게 전달한 ‘스탈린그라드 승전 축하’ 보검(영국왕 조지6세 선물).

회담에서 소련의 태평양전쟁(일본) 참전 원칙이 정해졌다. 신탁통치 문제가 다시 거론됐다. 그것은 식민지 해체의 루스벨트 방식이다. 그 이전 카이로 선언문에 한국독립 조항이 들어갔다. 그것은 루스벨트 주도 작품이다. 장제스는 조연이다. “한국독립조항을 장제스가 이끌었다는 기록은 과장된 신화다(중앙일보 2013년 11월 16일자 카이로 선언 70주년- 박보균의 현장을 찾아서).”  
 
나흘 뒤 회담이 끝났다. 루스벨트는 득의에 찼다. 하지만 1년3개월 뒤 얄타회담에서 환경이 달라졌다. 스탈린의 탐욕은 거칠어졌다. 루스벨트는 쇠약해졌다. 그는 새로운 제국 소련의 팽창을 막지 못했다. 그는 죽기(45년 4월) 전에 탄식했다. “스탈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더 이상 같이 일을 못하겠다.”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테헤란(이란)·볼고그라드(러시아)·고리(조지아)=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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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