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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가에 번지는 ‘소확행’

[책 속으로] 김봉석의 B급 서재
텀블벅의 ‘검은 사전’ 모금 화면. [인터넷 화면 캡처]

텀블벅의 ‘검은 사전’ 모금 화면. [인터넷 화면 캡처]

책, 영화, 액세서리 등 다양한 창작품의 크라우드 펀딩이 진행되는 텀블벅에서 『검은 사전』이란 책을 만났다. 전 세계 악마의 해설과 도판을 담을 계획인 『검은 사전』은 10월 13일까지 펀딩을 받는데, 이미 8월 말 펀딩액이 1억1000만원을 넘겨 5800%를 달성했다. 후원자 수는 7000명이 넘는다.
 
『검은 사전』은 기독교와 불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신화, 동남아와 북유럽 신화와 민담 등에 등장하는 전 세계의 악마를 200마리 이상 소개할 예정이다. 덕질장려단행본레이블이라고 주장하는 ‘The Kooh’에서 만드는 더쿠 문고의 5번째 책이다. 『만화요리책』 『만화여행책』 『기믹스』 『동이귀괴물집』이 더쿠문고에서 그동안 나온 단행본이다. 한국의 귀신과 괴물을 모은 『동이귀괴물집』도 텀블벅에서 8881명의 후원을 받아 제작했다.
 
이런 특이한 취향의 책을 누가 볼까 싶겠지만, 의외로 많다. 『닌자의 세계』 『최신 군용 총기 사전』 『중세 유럽의 생활』 등이 나온 AK의 트리비아 북과 『몬스터 퇴치』 『이슬람 환상세계』 등 들녘의 판타지 라이브러리도 지속적으로 팔리고 있다. 세상의 온갖 사물과 사건, 이야기 등 잡학을 종횡으로 모은 책들의 수요가 있는 것이다. 주요 독자는 서브컬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고, 웹툰 작가와 소설가 등도 많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서브컬처를 즐기고 소비하는 층이 확고하게 존재하고, 느리지만 성장하고 있다.
 
4, 5년 전만 했어도 장르를 기반으로 하는 서브컬처 산업은 한국에서 요원하다고 믿는 이들이 많았다. 나 역시 그랬다. 인터넷을 통해서 서브컬처를 접하고 즐기는 사람은 늘고 있지만 실제 창작물을 자신의 돈으로 소비하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다. 저가 혹은 무료로 만화와 웹툰,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마니아는 많은데 실제로 상품의 판매가 많지 않아 산업적인 확장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변했다. 3, 4년 전부터 장르와 서브컬처 마니아만이 아니라 자신만의 취향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즐기는 사람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독립출판물을 선보이는 언리미티드 에디션 행사는 이제 주류로 올라섰다. 어른들의 대표적인 장난감으로 불리는 레고와 건담의 판매도 늘었다. 디저트를 선보이는 과자전 등의 마니악한 행사들도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검은 사전』의 대성공도 마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서브컬처의 지형도가 바뀌었다는 증거다. 몇 년의 짧은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의외로 거대한 사건은 없었다. 2000년대 이후 인터넷과 함께 서서히 성장한 장르와 서브컬처 그리고 다양한 취향이 대중에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유행어인 ‘소확행’이라는 단어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 사용했다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사회적 성공이나 고급스러운 저택을 갖는 대신 한 끼의 소박하지만 정갈한 식사나 취미를 넘어 마니악한 열정을 보이는 특정 취향의 수집품과 오락을 추구하는 경향이다. 주류에서는 천만 영화와 공중파에 등장한 유행어가 휩쓸고 있지만, 홀로 이어폰으로 나만의 음악을 들으며 한정판 독립잡지를 읽는 것 같은 풍경.
 
경제적 상황도 영향을 주었다. 월급만으로 서울의 아파트를 사는 것이 불가능하고, 결혼의 의미는 물론 실질적인 이득도 점점 희박해지는 상황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더욱 중요해진다. 남들의 눈에 보이는 나를 위해 포장하기보다는 내가 즐거워하는 것에 전력투구하겠다는 마음가짐. 소확행이 개인에게 중요한 생활양식으로 자리잡을수록 사회적으로는 다양성이 생겨난다. 개인의 자유로운 취향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더욱 흥미로울 수 있다. 나만이 아닌 타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기회 역시 많아지니까. 취할 기회도 많이 주어지고.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lotusid@naver.com
대중문화평론가. 부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등. 영화·만화 등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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