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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싱가포르 회담이 오래전 일 같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6월 싱가포르 회담 이후 북·미 외교가 덜커덩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종전선언을 대가로 북한 핵·미사일 리스트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지난달 2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폼페이오 장관 일행의 방북을 취소하는 트윗을 날렸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발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폼페이오 장관에게 보낸 공격적인 서한 탓으로 알려졌다.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5월 싱가포르 회담 때에도 취소했다가 되살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김영철의 서한이 취소 원인으로 알려졌지만, 진짜 원인이 따로 있을 수 있다. 우선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사전 정지 차원일 수 있다. 11월 어려운 중간 선거를 앞두고 ‘주목’ 받는 일이 필요한 트럼프다. 자신만이 진퇴양난에 빠진 북·미 협상을 되살릴 적임자란 걸 보여주려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중국과의 무역 분쟁과 관련됐을 가능성도 있다. 한반도 긴장 고조는 중국으로선 달가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이유에서라면 북·미 외교는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 또는 중국과의 무역 협상 타결 이후 재개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김영철의 서한을 보고 북한이 리스트를 내놓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폼페이오의 방북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개연성도 있다. 그랬다면 싱가포르 선언은 사실상 끝장난 것이다.
 
당사자들은 모두 골치 아플 수밖에 없다. 트럼프로선 싱가포르 회동이 실패로 보여 중간선거엔 악재가 될 수 있다. 중국의 비협조를 거론한 건 자신에 쏟아질 비난을 분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평양 수뇌부도 머리가 지끈거릴 것이다. 미국을 비난하긴 쉬워도, 북한 주민들의 부푼 기대에 부응하긴 쉽지 않아서다. 김정은의 빈번한 경제 관련 현장 지도는 북한 리더십이 경제 여건을 개선하는 데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러기 위해선 교역과 투자가 절실한데 미국과의 긴장 고조는 둘 다 어렵게 한다. 평양으로선 대응 수위도 결정해야 한다. 추가적인 핵실험은 중국을 격분케 할 수 있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사일 도발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문재인 대통령과 참모들도 어려운 선택에 직면한다. 문 대통령은 이달 김정은과 만난다. 북·미 협상이 진행되는 한 문 대통령은 판문점 선언의 후속 조치를 이행할 수 있는 꽤 넓은 정치적 공간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북·미 협상이 중단되면 그 공간은 급속도로 줄어든다. 청와대는 판문점 합의를 계속 이행하거나, 아니면 지연·중단해야 한다. 전자는 워싱턴과 관계에 부담을 줄 테고 후자는 북한을 성나게 해 남북 화해 기조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의 대응은 혼재돼 있다. 청와대는 지난달 27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 일정을 늦출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다음날 통일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남북협력기금을 1380억원 증액한다고 발표했다.
 
북한과의 새로운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를 위해 투자해온 중국도 난처해진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2005년 10월 후진타오(胡錦濤) 이래 처음으로 9·9절(북한 정권 수립 기념일)에 방북하기로 했다. 중국은 미국과의 무역 분쟁 중이기도 하다. 중국엔 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인 경제적 번영을 위해 북·중 관계보다 미·중 관계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미국이 무역 분쟁 타결을 대가로 북한에 대한 올가미를 조이라고 요구한다면 중국이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북한의 급격한 혼란이나 평양의 몰락을 초래하지 않는 한 말이다.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가 보자. 북·미 협상이 파국을 맞는다면 미국은 무엇을 할까.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그대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지난달 22일 “북한이 핵 개발을 계속 진전시킨 흔적이 있어 우려한다”는 보고서를 낸 일도 있다.
 
미국의 대응 수단은 줄어든 상태다. 엄격한 대북 제재로 돌아가긴 대단히 지난할 것이다. 중국의 참여가 중요한데, 미국이 무역 협상에서 상당한 양보를 하지 않고선 기대하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 역시 제재에 열성적이지 않다.
 
군사옵션도 단순치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화염과 분노’로 위협했을 때조차 미국 관료들은 사적 자리에선 타격 목표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었다. 북한의 핵·미사일이 어디에 얼마만큼 저장돼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난해엔 어렵게나마 미국이 남한이 군사공격에 동의하도록 끌어낼 수 있었다. 남·북 지도자가 두 차례 만나고 문 대통령이 남북 관계 개선에 정치적으로 정서적으로 헌신하는 지금, 남한이 미국의 대북 행동을 지원할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미국이 한국의 동의나 협조 없이 북한을 타격할 수 있겠지만 그럴 경우 한국 내 공군기지를 이용할 때보다 인명피해 우려가 상당하다. 한·미 간 갈등을 야기하고 중국의 개입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므로 싱가포르 프로세스가 와해한 것이라 해도 트럼프 행정부로선 제재든 군사력이든, 북한을 압박해 비핵화 목표를 달성할 만한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 결과적으론 사실상 오바마 행정부 때의 전략적 인내로 돌아가는 셈이다. 당시엔 선택에 의해서였지만 이번엔 마지못해서인 셈이다. 이는 북·미 관계에서 최고의 아이러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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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