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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노무현 전 대통령의 편지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논설위원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논설위원

노무현 정부가 3년 차에 접어들던 2005년 봄이었다. 경제보고서 한 권이 청와대를 울컥하게 했다. ‘최근 서민경제 현장 점검 결과’라는 제목이 붙었다. 새벽 인력시장, 아르바이트 채용시장, 자영업, 운수업, 재래시장, 중소기업 근로현장 등 6개 부문으로 나눠 전국 18개 지역을 고루 선정해 보름 동안 현장을 밀착 탐문하고, 실태를 가감 없이 담았다.
 
당시 보고서의 ‘평가와 시사점’에 언급된 대목은 지금 상황에 빗대도 부족함이 없다. “정부의 서민 지원책들이 거시적으로 광범위하게 망라되어 발표되지만 정책 실효성과 구체성이 떨어지고 피부에 닿는 정책 시혜감이 미흡하다.” “경기가 살아난다 해도 이들 서민이 마지막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커 생계지탱의 어려움이 가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서민경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숨통을 틔워주는 대책을 서둘러 시행해 희망을 줘야 한다.”
 
보고서는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것으로 돼 있다. 청와대 노동비서관실이 힘을 보탰다. 노 대통령은 보고서 담당자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경기는 나아지는데 서민이 왜 잘 못 느끼는지 몰랐다. 고생 많았다. 살아있는 보고서를 주셔서 고맙다”는 요지였다. 노 대통령이 경제를 두고 그간 얼마나 답답했는지, ‘새벽시장 일자리 트럭에 타려 아줌마끼리 머리채를 잡는다’는 실태를 접하고 느꼈을 서민의 아픔에 대한 먹먹함, 정책에 대한 자괴감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경제 현장’이라는 교과서를 접한 청와대는 정책 대전환을 시작한다. 사회적 대화와 같은 노정(勞政)간 파트너십에 공을 들이던 정책을 과감히 수정했다. 대신 노 대통령은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고 천명했다. 10%의 조직된 노조 대신 일반 서민을 정책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들이 ‘일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당시 노동비서관이던 권재철 한국고용복지센터 이사장은 “정책에는 생동감이 있어야 한다”며 “현실을 중시하고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을 보이면 시장은 안정감을 찾는다”고 말했다. 일은 이렇게 해야 한다.
 
입맛에 맞는 통계 연구로 정책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수준이어서는 ‘국민과 경제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는 비판을 잠재우기 힘들다. 그사이 경제는 피폐해지고, 서민은 고통받는다. 분배 불평등 쇼크, 고용 참사로 현실화했다.
 
그 원인이 실체가 모호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이념에 천착한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경제에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면 제대로 된 진단을 하기 어렵다. 결론을 내놓고 따지는 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경제는 물론 정책을 수립·집행하는 공직사회의 생태계까지 교란할 수 있다. 시쳇말로 살아남는 사람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독일 병정뿐일 수 있어서다. 제대로 된 현장 보고서 하나 기대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일자리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가 딱 그 짝이다. 고용 이슈가 최대 과제가 됐는데도 고용부의 존재감이 없다. 근로시간이나 최저임금 같은 고용 정책을 기획재정부에서 만진다. 대안도 그곳에서 나온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고용부 내부에서 그 답을 어렴풋이 찾을 수 있다. 정책을 비판한 언론 보도에 고위 공직자의 휴대전화를 검열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전 정권에서 열심히 일했다고 줄줄이 사퇴하고 있다. 차관·실·국·과장으로 이어진 업무체계가 무너지고, 장관 보좌관실로 통폐합된 모양새마저 보인다. 근로감독관을 동원해 노조의 민원을 처리하는 게 ‘현장’ 행정으로 포장된다. 노동정책의 기본인 ‘조정과 중재’는 온데간데없다. 오죽하면 조직부터 재건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이번 개각 명단에 고용부 장관이 포함된다고 한다. 정치 이슈가 아니라 진짜 고용을 다룰 줄 아는 노회한 전문가를 기대한다. 13년 전 노 대통령을 울컥하게 하고, 고용 정책의 물꼬를 제대로 잡아준 공직자의 숨은 열정, 그걸 다시 지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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