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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등산사] 겨울 등반의 강자, 암에 쓰러지다

 “알렉스, 새로 샀다는 피켈 어딨죠?”
안드제이 자바다가 평소처럼 나긋나긋한 말투로 알렉스 매킨타이어에게 물어봤다.
“여기요.”
알렉스가 배낭을 뒤져 날 번쩍이는 피켈을 건네줬다. 안드제이는 전완근을 긴장시키며 피켈을 공중에 휘둘렀다.
“이따위 군국주의는 어림없지.”
쾅, 쾅, 쾅 …. 안드제이는 옛 소련의 기차 안 스피커 10대를 박살냈다. 스피커에서는 소련 군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참이었다. 폴란드 귀족의 피를 물려받은 안드제이는 알렉스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갔다. 폴란드·영국 합동등반대가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로 향하던 1977년 여름의 일이었다.
말년의 안드제이 자바다와 아내 안나. 그들은 시쳇말로 닭살 커플이었다. [중앙포토]

말년의 안드제이 자바다와 아내 안나. 그들은 시쳇말로 닭살 커플이었다. [중앙포토]

베이스캠프의 안드제이 자바다. 그는 탁월한 등반가인 동시에 훌륭한 리더였다. [중앙포토]

베이스캠프의 안드제이 자바다. 그는 탁월한 등반가인 동시에 훌륭한 리더였다. [중앙포토]

  
안드제이 자바다의 몸속에는 저항과 도전의 피도 흐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1월 봉기’에 참여했다. 1월 봉기는 1863년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반대하며 일어난 저항이었다. 아버지는 외교관이었다. 약소국으로서 숱한 마찰을 감내해야 했다. 안드제이도 소련의 지배에 항거했다. 폴란드 저항세력과 손잡았다. 학교 책상 밑에는 자동소총을, 침대 옆에는 수류탄을 놔두곤 했다. 17세에 투옥됐다. 친구들은 고문당했고 처형됐다. 감옥 안 비명은 그칠 날이 없었다. 전체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커졌다. 알렉스의 피켈을 빌려 소련 군가가 흘러나오는 스피커를 부순 건 그 증오심의 일환이었다.
 

안드제이는 타트라 산맥 종주를 계획했다. 폴란드 등반협회는 반대했다. 위험하다고 했다. 안드제이의 생각은 달랐다.  
“타트라에는 빙하가 없습니다. 알피니즘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혹독한 상황을 만들어서라도 가야 합니다. 타트라의 겨울은 바로 그 알피니즘에 견줄만합니다.”
1959년 겨울, 결국 안드제이는 78㎞ 길이의 산맥을 훑었다. 무려 19일이 걸렸다. 안드제이는 더 높은 곳의 겨울 등반 가능성을 확인했다. 
1974년 로체 동계 등반 중인 안드제이 자바다. [중앙포토]

1974년 로체 동계 등반 중인 안드제이 자바다. [중앙포토]

 

1973년 겨울 그는 힌두쿠시에서 두 번째로 높은 노샤크(7492m)를 찾았다. 세계 첫 번째 7000m급 동계등반이었다. 힌두쿠시는 고난도 루트들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비용이 적게 들었다. 폴란드 등반가들은 시간과 피로를 저당 잡히는 대신 기차를 이용했다. 바르샤바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다시 5박5일 동안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해야 했다.  
 
‘오, 주여 우리들의 등반을 축복해 주소서.’
안드제이는 산악인의 기도를 올렸다. 눈에서 불쑥 튀어나온 시커먼 손을 봤다. 지난해 실종된 불가리아 산악인 5명 중 한명이었다. 1973년 2월 13일, 영하 30도 속에서 그는 결국 동료 타덱 표드르스키와 함께 해냈다. 이젠 8000m급 동계등반이 눈앞에 보였다.
 

“안됩니다. 너무 위험해요”
폴란드 등반협회는 다시 반대했다. 안드제이는 이번에도 맞섰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기회를 잃었습니다. 정부가 간섭하고 규제하는 동안, 8000m 산들은 다른 나라가 모조리 올라가 버렸습니다. 우리에겐 겨울에 올라가는 게 기회입니다.”
 

폴란드는 이미 1924년에 에베레스트와 K2 등정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불안정했던 국제질서는 폴란드의 이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소련에게 등반은 ‘부르주아적 행위’였다. 소련의 꼭두각시인 폴란드 정부는 산악 활동까지 간섭했다. 폴란드 산악회는 긴 침체에 빠졌다. 그들은 히말라야에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철의장막이 완화되고 데탕트가 돼서야 폴란드 산악인들은 히말라야로 향했다.
 
에베레스트 등반 허가를 내줘야 하는 네팔 정부는 안드제이의 제안에 뜨악했다.

“아니, 여름에도 힘든 걸 왜 겨울에 하려고 합니까.”
1971년 카라코람 쿤양에 도전한 폴란드 원정대. 왼쪽부터 안드제이 하인리히, 안드제이 자바다, 얀 스트리친스키, 리스자드 짜프리스키. [중앙포토]

1971년 카라코람 쿤양에 도전한 폴란드 원정대. 왼쪽부터 안드제이 하인리히, 안드제이 자바다, 얀 스트리친스키, 리스자드 짜프리스키. [중앙포토]

 

어차피 에베레스트 허가는 꽉 차 있었다. 안드제이는 에베레스트에 이웃한 로체(8518m) 등반 가능성을 타진했다. 네팔 정부 허가가 나왔다. 가을 등반을 준비 중이던 프랑스 원정대와 같은 베이스캠프를 쓰기로 했다. 안드제이는 뛸 듯이 기뻐했다. ‘히말라야 초보’ 폴란드는 세계 첫 8000m급 정상(1950년 안나푸르나)에 오른 프랑스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게 됐다. 로체와 에베레스트 오르려면 쿰부 빙하의 8000m 정도까지는 비슷한 루트로 향한다. 로체 동계등반은 에베레스트의 겨울을 위한 일종의 모의고사였다. 5개월 치 장비와 식량을 준비했다. 네팔에 등반기간 연장을 요구할 예정이었다.
 

1978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반다 루크키에비츠. [중앙포토]

1978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반다 루크키에비츠. [중앙포토]

 

1978년 10월 16일 폴란드 여성 반다 루트키에비츠가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폴란드인으로는 처음이었다. 유럽 여성 중 최초였으며 전 세계 여성 중 세 번째였다. 마침 폴란드 출신의 교황이 즉위했다. 폴란드 등반협회는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있었다. 
 

로체에서 ‘맨몸’으로 겪은 경험은 소중했다. 부츠를 개량했다. 이음새 없이, 침낭 안에서도 벗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강풍에 견딜 수 있는 텐트를 만들었다. 1978년 11월, 네팔 정부는 안드제이 팀에게 사상 첫 히말라야 동계등반 허가를 내줬다. 이미 1980년 봄 시즌의 등반 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1978년 에베레스트 등정 뒤 교황을 알현한 반다 반다 루크키에비츠. [중앙포토]

1978년 에베레스트 등정 뒤 교황을 알현한 반다 반다 루크키에비츠. [중앙포토]

 

“봄, 겨울 둘 중에 하나를 골라.”
안드제이는 40명의 원정대 후보자들에게 물어봤다. 정확히 절반인 20명이 에베레스트 동계등반을 택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1979년 12월 31일까지도 베이스캠프를 세울 수 없었다. 한달하고도 보름이란 시간만 남았다. 바람은 시속 130㎞로 불었고 기온은 영하 40도까지 떨어졌다. 크르지슈토프 유렉이 바람에 날아갔다. 안전 로프에 묶여 있었기에 갈비뼈 부상만 입었다. 하지만 폴란드로 돌아가야 했다. 캠프3과 캠프4는 불과 850m 차이였다. 8000m의 사우스콜에 캠프4를 만들었다. 크르지슈토프 비엘리치는 버티지 못하고 캠프2까지 밀려 내려왔다. 발렉 피우트는 베이스캠프로 물러났다.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캠프4에는 더 강한 텐트가 필요했다. 안드제이가 나섰다. 바람은 시속 250㎞를 기록하고 있었다. 땅을 다지고 이중의 막으로 된 텐트를 쳤다. 부탄가스 히터를 켰다. 든든한 전진기지를 구축했다. 벌써 2월13일이었다.
1979~1980년 폴란드의 에베레스트 동계 등반 중 베이스캠프에서 무선 통신 중인 보그단 안코브스키. [중앙포토]

1979~1980년 폴란드의 에베레스트 동계 등반 중 베이스캠프에서 무선 통신 중인 보그단 안코브스키. [중앙포토]

 

바람은 쌓인 눈도 뒤집어 놨다. 곳곳에 버려진 산소통과 텐트들이 드러났다. 꽉 차있는 산소통 7개를 건졌다. 횡재였다. 안드제이 하인리히와 셰르파 파상이 올라왔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은 산소마스크를 가져오지 않았다. 안드제이는 자신의 산소마스크를 주고 내려가야 했다. 그리고 8시간 했다. 비엘리치와 레스첵 치치가 안드제이를 찾아냈다. 하인리히와 파상은 8350m까지 올라갔다 내려섰다. 폴란드의 에베레스트 동계 등반은 이걸로 끝날 것 같았다.
 

네팔 정부에서 기한을 연장해준다고 했다. 단 이틀이었다. 가장 위에 있던 비엘리치와 치치에게 기회가 왔다. 2월17일, 바람은 평온했다. 새벽 5시에 캠프4에서 출발한 이들은 오후 2시30분에 무전을 날렸다.
 

“안드제이 나오세요.”
“어딘가.”
정적이 흘렀다.
“어디냐고.”
“알아 맞춰보세요…. 안드제이, 여기는 정상입니다.”
“에베레스트가 아니었다면 못 올라왔을 겁니다.”
 

1980년 2월 17일 에베레스트 첫 동계 등반에 성공한 크루지슈토프 비엘리치(왼쪽)과 레스첵 치치가 베이스캠프에서 케이크를 들며 즐거워 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0년 2월 17일 에베레스트 첫 동계 등반에 성공한 크루지슈토프 비엘리치(왼쪽)과 레스첵 치치가 베이스캠프에서 케이크를 들며 즐거워 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0년 2월 17일 에베레스트 첫 동계 등반에 성공한 크루지슈토프 비엘리치(왼쪽)과 레스첵 치치가 35년 뒤에 열린 등정 기념행사에서 당시 베이스캠프에서 취한 포즈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0년 2월 17일 에베레스트 첫 동계 등반에 성공한 크루지슈토프 비엘리치(왼쪽)과 레스첵 치치가 35년 뒤에 열린 등정 기념행사에서 당시 베이스캠프에서 취한 포즈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중앙포토]

둘은 세 가지를 정상에 놔두고 왔다. 교황이 준 묵주, 로체 동계등반 중 사망한 스타제크 라텔로의 나무십자가, 그리고 온도계였다. 1980년 2월 17일이었다. 
 

안드제이의 폴란드 원정대는 내친 김에 에베레스트 그해 봄 시즌인 5월 19일에 새로운 루트(남서벽 좌측)를 개척하며 정상에 올랐다. 이 두 차례의 원정 동안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다.
 

14좌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라인홀트 매스너가 폴란드의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등반 일정을 억지로 이틀 늘렸고 동계 등반을 했다는 공식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매스너는 초오유 동계 등반을 계획하고 있었다. 매스너의 이 등반은 실패했다. 결국 초오유의 첫 동계 등정은 안드제이가 이끄는 폴란드가 해냈다. 1985년 2월 12일이었다.
 
에베레스트 동계 등반에 성공한 뒤 포즈를 취한 레스첵 치치, 크루지슈토프 비엘리치, 안드제이 자바다(왼쪽부터). [중앙포토]

에베레스트 동계 등반에 성공한 뒤 포즈를 취한 레스첵 치치, 크루지슈토프 비엘리치, 안드제이 자바다(왼쪽부터). [중앙포토]

안드제이는 항상 모든 대원들이 만족할만한 원정을 꾸렸다. 용기를 북돋아줬고, 상처를 어루만져 줬다. 폴란드가 침체기를 벗어나 등반 강국으로 발돋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폴란드 등반 황금기를 이끈 안드제이의 ‘발자국’은 다음과 같다.
 
안드제이 자바다의 등반
·1969년 1차 카라코람 (리더였지만 원정 합류는 못함)
·1970년 폴란드-소련 합동 등반대 파미르 레닌파크(7143m) 리더 겸 등정자
·1971년 2차 카라코람 쿤양(7852m) 리더 겸 등정자
·1973년 힌두쿠시 노샤크(7852m) 동계 등반(동계 등반 중 최고) 리더 겸 등정자
·1973~76년 크라쿠프 대학 알파인 지도자 학교 재학. .‘타트라 능선의 지형과 등반에 관한 연구’ 논문.(학교 측에서 모든 자료 분실)

·1974년 로체(8501m) 동계 등반, 8250m까지 진출(동계 등반 중 최고) 리더 겸 등반자 
·1977년 폴란드-영국 힌두쿠시 코헤 만다라스 북벽(6628m, 수직 고도 1600m) 등반대 리더
·1979~1980 에베레스트(8848m) 동계 등반 리더

·1980년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신루트 등반 리더

·1984~1985년 초오유(8201m) 동계 등반 리더

·1987~1988년 K2(8611m) 동계 등반 리더(8035m까지 진출)

·1988~1989년 폴란드-벨기에 로체(8501m) 동계 등반 리더.

·1996~1997년, 1997~1998년 낭가파르바트(8125m) 동계 등반 리더. 두 차례 모두 실패.

·2000~2001년 낭가파르바트 동계 등반 계획

낭가파르바트 동계 등반 때 안드제이는 70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원들이 위기에 빠지자 장비를 차고 구조에 나서기도 했다. 영국·미국·프랑스 등반협회의 명예회원으로 위촉됐다. 로체 동계 등반에 참여한 벨기에의 헤르만 데티엥은 그의 저서 ‘에베레스트’에서 안드제이를 “최상(superlative)”이라고 표현했다.

 

안드제이는 21세기 벽두에도 낭가파르바트와 K2 동계 등반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암을 넘어서지 못했다. 급격하게 병세가 악화돼 2000년 8월 21일에 눈을 감았다. 72세였다. 숱한 산을 넘나들었던 안드제이. 그가 한자 암(癌)에 산(山)이 들어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얄궂은 것이었을까.
말년의 안드제이 자바다와 아내 안나. 안나는 배우였다. [중앙포토]

말년의 안드제이 자바다와 아내 안나. 안나는 배우였다. [중앙포토]

 

그는 “젊어서 떠나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안드제이 하인리히, 예지 쿠크츠카, 반다 루트키에비츠를 비롯해 산에서 먼저 쓰러진 동료들을 그리워했다. 그러면서 뒤에는 이 말을 붙였다.
“산의 잘못은 아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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