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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대북제재를 뒤흔드는 손길들 … 정책 실패 자충수 되나

구멍 뚫린 대북제재
견고해 보였던 대북제재에 쩍쩍 균열이 가고 있다.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리더니 곧 봇물 터질 듯 한 기세다. 지난 2월 북한의 평창 겨울 올림픽 참가를 이유로 극히 예외적으로 취해졌던 제재 완화 및 일시 해제 조치가 이젠 줄을 잇고 있다. 급기야 북한산 석탄이 버젓이 우리 항구에 하역되는 사태까지 드러났다. 그 중심에는 문재인 정부가 있다. 대북 제재의 필요성을 주창했던 한국의 이런 태도 변화에 미국 등 국제사회는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북한의 도발 본능을 억제시키고 태도 변화를 이끌어낸 일등공신 지렛대가 망가져 간다는 판단에서다. 대북제재 훼손 논란의 막전막후를 들여다본다.
 
개성공단이 2004년 12월 가동을 시작하자 미국과 국제사회는 대북 현금 유입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북한에 건네지는 노동자 임금이 핵 개발이나 미사일 자금은 물론 독재 정권의 내탕금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우려에서다. 최대 연간 8000만 달러(한화 904억5600만원)의 뭉칫돈이 노동자의 손이 아닌 북한 관리총국에 건네진다는 점에서 전용 의혹은 커져갔다. 미국 내 일부 보수 학자와 정객들 사이에서는 개성공단 임금을 놓고 ‘1달러 노예 노동’ 논란까지 확산됐다.
 
노무현 정부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정부와 청와대 외교안보 참모 사이에서 회심의 반격카드가 마련됐다. 당시 워싱턴 측에서 북한 내 미군 유해 발굴을 위해 수백만 달러 규모의 현금을 지급했다는 점을 특정 언론에 흘려 개성공단 임금 비판 여론의 예봉을 꺾으려는 의도였다. 정부 당국자들도 일제히 미국의 대북 달러 제공 사실을 부각시키는 분위기를 확산시키려 했다. 하지만 예상 밖의 결과에 정부는 금세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국민 사이에 “미국은 6.25 때 숨진 전사자 유해까지 찾아오려 달러를 쓴다지만, 우린 무엇을 위해 대북 퍼주기를 하는 거냐”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국군포로와 납북·억류 국민 송환에 적극적이지 않은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였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노무현 정부의 대북 유화정책은 2006년 하반기 더 큰 시련에 마주했다. 북한이 국제 사회와의 모라토리엄(발사유예)을 위반하고 그해 7월 탄도미사일을 무더기로 쏘아 올리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대북결의를 통해 제재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석 달 뒤 함북 풍계리 동쪽 갱도에서 감행된 첫 핵 실험은 안보리 대북결의 1718호를 불렀고, 대북 반·출입 규제와 금융제재 등이 촘촘히 펼쳐졌다. 한국 정부도 남북 간 총거래의 80% 수준인 3억6000만 달러의 대북지원과 당국 차원의 경협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대북제재는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국제사회가 정한 규율 위반에 대한 징계 성격을 띤다. 북한이 남북관계와 한반도 안정을 해치는 행위를 중단하고, 대화와 협력으로 나오도록 견인하기 위한 정책 수단이다. 무력 보복이나 군사적 응징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고육책이기도 하다. 북한은 대북 제재에 반발하며 미국과 유엔 등에 책임을 떠넘기는 대내외 선전·선동으로 맞서왔다. “지금까지 제재를 받으면서도 별일 없이 살아왔는데 이제 재재를 더 받는다고 하여 못살아 갈 줄 아는가”(『김일성 저작집』 제44권)라는 국가주석 김일성의 사망(1994년 7월 8일) 이틀 전 ‘경제 부문 책임일꾼 협의회’ 발언은 대북제재에 대한 북한의 대응 논리를 엿보게 한다.
 
김일성의 손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대북제재의 쓴맛을 제대로 봤다. 지난 한 해 집중적인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도발로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를 자초한 것이다. 미국은 물론 후견국을 자처해온 중국도 제재결의에 동참했다. 지난해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도 김정은의 막무가내식 도발 행보에 결국 북한을 ‘적(敵)’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격앙된 분위기를 연출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10월 노동당 7기 2차 전원회의에서 “제재 압살 책동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화를 복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기본 열쇠가 자력갱생”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뒤 그는 신년사를 통해 도발중단과 대화노선 선회를 공언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내몰렸다. 평창 겨울 올림픽은 도발에서 유화국면으로 급선회한 김정은의 쑥스러움을 완충시켜 준 좋은 멍석이 됐다.
 
지난 8개월간의 남북관계와 한반도 주변 정세 변화는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4월과 5월 남북 정상회담이 잇달아 열렸고, 청와대는 9월 추가 회담을 예견하고 있다.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완전한 북핵 폐기와 한반도 평화체제의 빅딜이 추진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29일 장거리 미사일 ‘화성-15형’ 발사를 끝으로 오늘까지 260일째 북한은 도발을 멈췄다.
 
겉으로 보면 김정은의 노선 변화가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핵과 미사일 도발로 일관하다가는 북한 체제의 생존은 물론 자신의 권력 유지도 어렵다는 셈법이 김 위원장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 공산이 크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 압박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데에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담당자들도 큰 이견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최근 들어 대북제재를 뒤흔들고 그 틀을 훼손하려는 시도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올림픽 정신을 내세운 ‘제재 예외 조치’는 차치하더라도 개성 남북 연락사무소 개설과 금강산 면회소 개보수, 서해 군 통신선 개통 등 남북관계 전반에 걸쳐 제재를 회피한 대북 지원성 사업이 추진 중이다. 모두 김정일·김정은 정권이 대남 도발과 핵·미사일 공세 와중에 단절했거나 우리 정부와 기업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몰수해 훼손한 경우다.
 
대북제재라는 채찍을 국제공조와 조화시켜 최선의 정책 성과를 거두도록 하는 게 정부의 책무다. 김정은 정권이 ‘완전한 비핵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혁·개방의 길로 나오도록 이끄는 과정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정부가 앞장서 대북제재의 둑을 허물어트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문제다.
 
민감한 시점에 문재인 정부가 800만 달러 규모의 대북지원 카드를 만지작거리자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대북 압박의 조기 완화는 비핵화 가능성을 줄어들게 할 것”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한·미 불협화음이다. 북한에게도 얕잡혔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몰아세우면서 “돈 안 드는 일만 하겠다는 심산으로 주판알만 튕긴다”고 대남비방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북한의 선의에만 기대는 건 정책이 아닌 요행수다. 정부의 섣부른 제재 풀기에 우려의 시선이 쏠린다. 자칫 대북정책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란만 키우고 남북관계와 국제공조에도 파열음만 부르는 자충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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