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시론] 응급실 폭력 환자는 진료 거부 당해도 할 말 없다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약사평론가회 회장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약사평론가회 회장

최근 전국 방방곡곡에서 환자가 의료진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응급실이란 아주 특별한 공간에서 말입니다. 만약 이런 소식이 외신을 탄다면 어떨까요? 웃음거리로 생각하기에 앞서 그런 ‘후진국형 폭거’를 이해 못 해 의아해할 것입니다. “어떻게 병원 응급실에서 그런 난폭 행위가 일어날 수 있을까?” 하며 한국이란 선진국에서 발생하는 ‘후진국형 폭거’를 전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법 참사’이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필자가 의사 초년생으로 임상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일이 생각납니다.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했다는 자긍심을 갖고 병원에 첫 출근을 한 날, 인턴들은 큰 강의실에 모여 교육을 받았습니다. 인턴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규정 중심의 입문 교육이었는데, 그중 귀를 쫑긋하게 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겐 환자 진료를 거부할 권리가 분명 있습니다.”
 
바로 직전 의성(醫聖)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것과 너무나 거리가 있어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인턴들은 환자의 종교·국적·빈부를 묻지 말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환자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의사로서 최상의 임무임을 선서한 터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교육에서는 의사가 환자의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다른 높은 차원의 ‘환자 보호 개념’에 근거한다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요컨대 환자가 의사의 치료 지침을 부당하게 거역하거나, 환자가 의사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는 부적절한 언어나 행동을 하는 경우 당당하게 진료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육 담당 교수는 환자와의 갈등상태에서 진료 행위를 계속하면 본의 아니게 그릇된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예컨대 근육 주사를 놓으며 꾹 찔러 필요 이상의 통증을 유발한다든지, 혈관 주사를 놓으며 심리적 부담 때문에 혈관을 놓칠 수도 있다면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의사의 환자 진료 거부권은 결코 의사의 권리 보호 차원이 아니라 환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론 8/13

시론 8/13

그리고 몇 년 후 필자가 주말 당직을 하고 있을 때 바로 그런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콜(Call)을 받고 응급실로 들어가 해당 환자에게 필자의 이름과 함께 환자의 진료를 담당할 의사임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술기운이 도는 환자가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필자를 째려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납작코(Flachnase)가 나를 치료할 수 있겠어?” 필자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납작코이지만 치료 능력은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하곤 몇 가지 방사선 검사와 심전도(EKG) 검사를 처방했습니다. 변명하자면 필자의 코는 결코 납작하지 않습니다. ‘납작코’는 동양인을 비하는 속어입니다.
 
모든 검사가 끝난 후 필자는 환자에게 말했습니다. “심전도 검사, 방사선 검사 및 혈액 검사 결과, 환자가 거동하는 데에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안면의 타박상도 지혈이 된 상태라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다는 점을 차분하게 설명한 후 분명한 어조로 덧붙였습니다. “본인은 이 순간부터 환자의 진료를 거부합니다.” 그러곤 자리를 떠나려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거들먹거리던 그 환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필자의 손을 잡고 정중하게 자기의 무례한 행동을 사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필자가 진료권을 거부하자마자 환자가 태도를 바꿔 애원하듯이 사과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독일의 사회 및 의료 시스템이 의료 공간 내에서의 질서를 확실하게 보장·보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담당 의사가 환자의 귀책사유로 인해 진료를 거부하면 환자는 자신의 돈으로 다른 병원을 찾아가야 합니다. 실려 온 구급차를 더는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아울러 그 후 발생하는 모든 부작용과 그에 따른 비용도 의료보험 혜택에서 제외됩니다. 질서는 그냥 지켜지는 게 아님을 실감 나게 터득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여름 올림픽과 겨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몇 안 되는 선진국입니다. 각종 산업경제지수와 문화예술지수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외국인이 보기에 최근 국내 병원에서 일어나는 ‘응급실 폭거’는 분명 의아하고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특히 선진 사회에서 ‘응급실 폭거’는 국가 품격이란 시각에서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하루빨리 개선해야 할 ‘후진국형’ 병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한응급의학회는 응급처치·진료 의료인을 폭행하는 경우 가중처벌하고 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하는 엄정한 법 집행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응급실 폭거’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엄정한 법 집행과 함께 의사의 환자 진료 거부권을 명문화해 의료 공간 내 질서를 보장해야 합니다.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전 한국의·약사평론가회 회장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오영환 부소장 : oh.younghwan@joongang.co.kr (02-751-5515)
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