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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잔이 꼭 핀란드의 빙하 같구나

윤광준의 新생활명품 <85> 이딸라(ittala)의 '울티마 툴레' 
 
 오래 전 일이다. 잘 나가는 친구가 내는 술을 얻어먹은 적 있다. 역삼동의 널찍한 술집은 멋지고 쾌적했다. 선심 쓰듯 시킨 21년산 싱글몰트 위스키는 입에 쩍쩍 달라붙을 만큼 좋았고 취흥은 도도했다.  
 
술맛도 술맛이지만 표면굴곡 도드라진 술잔의 느낌이 독특했다. 평소 마시던 매끈한 온더락스 잔이 아니었다. 바닥엔 3개의 돌기가 발을 대신했고 표면은 오톨도톨한 얼음 같았다. 밑 부분으로 갈수록 두께와 무게가 더해져 묵직했다. 유리의 투명함 대신 손에 닿는 질감과 패인 곡률에서 오는 쥐는 맛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손에 쥔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갑자기 핀란드가 떠올랐다. 핀란드는 가본 적도 없다. 아는 것이라곤 교향시 핀란디아의 작곡가 얀 시벨리우스 뿐이다. 피요르드 협곡과 빙하가 있는 북구의 낮선 나라가 생뚱맞게 떠올랐다면 자주 듣던 음악 때문이다.  
 
물건에도 기시감이 있는 모양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든다. 왜 그런지 이유를 콕 집어 말하긴 곤란하다. 기시감은 눈으로 소리를 느끼고 손으로 장소를 떠올리는 공감각과 비슷하다. 나이를 먹으면 시간과 장소가 겹치고 사람과 추억이 뒤죽박죽 섞인다. 퇴적층 마냥 두꺼워진 혼란스러움이 제 멋대로 기억을 뿜어내는 모양이다. 히말라야에서 본 빙하가 시벨리우스의 음악과 섞여 핀란드로 바뀌었던 건 아닐까. 어쨌든 얼음을 연상시키는 유리잔 하나가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건 사실이다.    
 
자연을 모티브 삼은 천재 디자이너의 50년 전 작품
술집을 나서는 순간 강렬한 기억은 까맣게 잊혀졌다. 그러다가 얼마전 기억 속의 도톨도톨 유리잔이 우연치않게 눈에 들어왔다. 방문했던 회사의 직원이 똑같은 잔에 물을 따라준 거다. 찬 물을 담은 유리 표면에 김이 서려 얼어붙은 얼음처럼 보였다. 컵에 담긴 물이 유난히 시원하게 느껴진 이유다. 손에 감기는 감촉은 이젠 낯설지 않다. 여러 곳에서 쓰는 컵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궁금증이 생겨 뒤늦게 컵의 이력을 추적해 봤다.  
 
핀란드 회사 이딸라(iittala)가 만든 ‘울티마 툴레(Ultima Thule)’란 제품이었다. 울티마 툴레는 라틴어로 극북(極北) 지역을 의미한다. 북구의 녹아내리는 빙하의 모습에서 착안해 무려 50년 전 타피오 비르깔라(Tapio Wirkkala·1915~1985)라는 산업디자이너가 디자인했다. 생각보다 오래전에 나온 물건이라는 데 놀랐다.  
 
생각해보니 표면의 굴곡을 특징으로 하는 유리컵은 하나 둘이 아니다. 육각의 직선이나 다이아몬드 패턴 같은 게 해당된다. 모두 살고 있는 나라의 자연이나 정서가 반영된 형상을 출발점 혹은 강조점으로 삼았을 게 분명하다. 모든 디자인의 원점은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모티프로 삼은 자연의 형상화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가 중요하다. 완성된 형태에서 똑같은 내용이 연상된다면 대단한 디자인이다.
  
‘울티마 툴레’는 누가 보거나 만져 봐도 얼음을 먼저 떠올린다. 이토록 메시지가 확실한 디자인을 보지 못했다. 디자이너의 역량이 특출 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타피오 비르깔라는 괴팍한 천재로 명성을 날렸다. 세련된 디자이너의 풍모는 애당초 없다. 우락부락한 털북숭이 바이킹 전사처럼 느껴지는 인상이 의외다. 핀란드의 지폐를 디자인했고 모양이 중복되지 않은 유리 공예품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잘 나가던 그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스스로를 고립시켜 은둔자로 살았다. 고독을 벗삼아 자연 속에서 찾아낸 형태를 새로운 디자인에 적용하는 일만이 그의 관심사였다. 핀란드의 현대 디자인을 이끈 알바 알토와 함께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울티마 툴레’는 이딸라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요즘 유럽으로 가는 이들이 많이 애용하는 핀란드 항공사 핀 에어를 탄 이들은 보았을 것이다. 얼음 같은 유리잔에 담긴 음료가 기내식 서비스로 나오는 장면을. 핀란드의 이미지는 자연의 빙하에서 디자인된 물건으로, 다시 보고 만져지는 감각의 축적으로 각인된다. 자일리톨 껌과 울창한 숲, 빙하만 떠올리던 사람들에게 좋은 디자인 상품은 핀란드의 상징처럼 친숙해진다.  
 
타피오 비르깔라의 또 다른 명작이 하나 있다. ‘따피오’란 물건이다. 이번엔 얼음이 아닌 솟아오르는 공기방울이다. 표면은 여느 유리잔처럼 매끈하다. 공기방울은 금방 터질 것 같은 긴장감으로 생생하다. 누군들 물속에서 솟아오르는 공기방울을 보지 못했을까. 디자이너는 그 순간을 유리 속에 고정시켜 놓았다. 순간 포착된 사진마냥 절묘한 느낌을 준다. 잔을 들고 보고 있으면 디자이너의 창의적 노력에 저절로 고개가 끄떡거려진다. 이 잔만을 사용하는 애호가들이 꽤 있다. 역시 좋은 디자인은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있다.  
 
절제된 곡선미에는 따뜻한 감성이 가득
유난스럽지 않고 화려한 색채도 없는 것이 이딸라란 회사의 제품들이다.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에서 만드어지는 물건들에 ‘노르딕 디자인’이란 말을 붙인다. 자칫 건조하고 냉랭하게 비춰지는 기능주의 디자인과 비교하면 따뜻한 감성이 덧붙여져 있다고나 할까. 독일에서 시작된 바우하우스 풍을 소화시켜 자기 것으로 만든 성과다. 이들 노르딕 디자인의 한 갈래라 할 이딸라는 자연의 느낌을 살린 유리컵과 그릇, 생활용품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기능주의 디자인이 직선의 강조라면 이딸라 디자인은 자연에서 차용된 절제된 곡선을 드러낸다. 이 회사를 유명하게 만든 ‘알바 알토’의 화병은 흐르는 물결을 형상화시킨 거다. 그의 아내였던 동료 디자이너 아이노 알토는 돌을 던져 호수가에 번지는 동심원 파문을 유리잔에 집어넣었다. 이들 디자이너의 특징과 작업의 내용을 보면 공통점이 많다. 핀란드의 자연이 곧 디자인으로 바뀌는 순환의 실천법이다.  
 
이들 제품은 1930년대부터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과 가치의 인정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만들어진 물건들인 만큼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다. 원형을 베끼는 짝퉁이 넘친다. 실물을 보면 누구나 “아하! 이건 우리 집에도 있다”고 외칠지 모른다. 미안하지만 대부분 모조품일 확률이 높다. 광범위하게 복제되고 많은 수량이 유통되고 있는 까닭이다. 가짜가 진짜를 몰아내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진품은 역시 다르다. 사용되는 유리의 함량과 색깔을 비교해보면 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물건에서 풍기는 아우라까지 복제할 수는 없다. 모래를 녹여 만든 유리는 일일이 입으로 불어 성형한다. 좋은 물건은 좋은 재료에서 비롯된다는 단순한 믿음을 실천하는 것 뿐이다. 섞여있는 물건들 가운데서 이딸라가 단박에 구분되는 근거다.  
 
이딸라는 최근 한국인 디자이너를 영입했다. 우리의 밥상에 오르던 밥공기와 주발을 본뜬 디자인이 공감을 얻고 있는 중이다. 혹시 핀란드를 여행 중인 분들은 유심히 보기 바란다. 익숙한 형태가 눈에 뜨였다면 어릴 적 손에 쥐고 먹던 바로 그 그릇이다. 멀리 핀란드에서 우리의 밥그릇을 만나게 되는 놀라움은 즐겁고 통쾌하다.  
 
평소 사용하던 물컵을 ‘울티마 툴레’ 얼음 잔으로 바꿨다. 더워도 너무 더운 날씨 탓이다. 눈과 손이라도 잠시 시원함을 느끼게 하려는 스스로의 배려다. 그래도 더위는 가시지 않는다. 시원하게 보이는 얼음 잔 사진을 준비했다. 손의 감촉대신 눈으로 시원함을 묻혀 가시길 바란다. 공감각은 모두에게 있다.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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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