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라이프스타일’이 생긴 건 100년밖에 안됐다

소설보다 재미있는 사전 이야기 
단어 탐정

단어 탐정

단어 탐정
존 심프슨 지음
정지현 옮김, 지식너머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고 했다. 무(武)를 무력화할 수도 있는 문(文)의 힘은 궁극적으로 단어에서 나온다. 단어가 글의 무기다. 전투기·잠수함과 마찬가지로 단어도 국력의 요소다. 어떤 나라 사전의 어휘 수는 그 나라 국력을 반영한다.
 
미국 패권의 기둥 중 하나는 영어다. 설령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세계 패권을 넘겨받더라도 중국어보다는 영어로 세상을 운영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 주장의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은 옥스퍼드영어사전(OED) 이다. ‘영어의 바이블’이라는 위상을 자랑한다. 영어 인프라의 핵심이다.
 
영국의 옥스퍼드대출판부에서 나오는 OED는 ‘영어 종주국’답게 세계 최대의 영어사전이다. 종이 기준으로 2만1728쪽, 60여만 어휘 분량이다. 300만 개의 인용문이 나온다.
 
OED는 이제 온라인으로 옮겨갔지만, 아직 종이로 나온 20권으로 된 판본을 우리 돈 약 140만원을 주고 살 수 있다. OED는 최상의 폼 나는 ‘가구’라고도 할 수 있다.
 
『단어 탐정』은 OED 편집장을 지낸 존 심프슨(64)의 자서전이자, OED의 역사이자, 영어 단어의 생로병사·흥망성쇠를 다룬 ‘영어 단어 개론’과 같은 책이다.
 
저자는 OED에서 2013년까지 37년간 근무했다. 곧 결혼할 여자 친구가 채용공고를 보고 ‘한 번 응시해보라’고 해서 지원했다. 기대를 안 했는데 덜커덕 붙었다. 1976년 보조 편집자로 시작했다. 22살 때였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예컨대 ‘퀸(queen)’이 침대와 여성 의복 사이즈에도 쓰이게 된 역사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사전편집자(lexicographer)가 평생의 직업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적성에 잘 맞았다. 편집장 자리에 올라 20년(1993~2013)간 일했다. 2014년에는 대영제국훈장(OBE)까지 받았다.
 
‘영어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옥스퍼드영어 사전(OED)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1500년 영어 역사의 증인이다. 종이에서 디지털로 주무대를 옮긴 이후, 검색 기능이 강화돼 영어의 역사와 용법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사진 댄]

‘영어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옥스퍼드영어 사전(OED)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1500년 영어 역사의 증인이다. 종이에서 디지털로 주무대를 옮긴 이후, 검색 기능이 강화돼 영어의 역사와 용법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사진 댄]

OED는 1884년에 제1권이 나왔다. 1928년 초판이 12권으로 완간됐다. 그 후 4권으로 된 보충판(1986), 20권으로 된 개정판(1989), 온라인판(2000년 이후 계속 업데이트 중)이 나왔다. 보충판 편찬을 위한 작업이 한창일 때 OED에서 일하기 시작한 심프슨의 공로는 성공적으로 OED의 무대를 디지털 세계로 옮긴 것이다. 빅토리아시대(1837~1901)와 별로 다를 게 없었던 사전 제작 과정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단어 탐정』은 사전편집자, 사전의 세계에 대한 일반인의 오해나 궁금증을 푼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사전이 누군가가 쓴 책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다. 책상과 부모님의 책장, 컴퓨터 안에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전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사전편집자라는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음지에서 일하는’ 그들은 무슨 일을 할까. OED에는 단어의 정의뿐만 아니라, 단어의 어원학(etymology)적 용례까지 나와 있다. 바로 이 두 가지가 사전편집자가 하는 일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책이다. 예컨대 사전편집자 중에는 왼손잡이가 많다. 신어(新語)는 적어도 10년 전에 나온 말이다. 라이프스타일(lifestyle)이 등장한 것은 1915년, 빈번하게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이후다. 셀피(selfie, 셀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2002년에 태어나 2013년부터 활용 빈도가 폭증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샘플 페이지. [사진 OED]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샘플 페이지. [사진 OED]

한번은 TV 프로그램 담당자들이 설전이 오가는 열띤 사전 편집회의 장면을 보여달라고 했다. 오후의 티타임은 있지만, 그런 열띤 토론은 없기 때문에 보여 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전 편집은 따분한 것도 아니다. 1755년 영국 최초의 영어사전을 발간한 새뮤얼 존슨(1709~1784)이 “사전 제작은 따분한 작업이다”라는 말을 남기는 바람에 일반인이 편견을 갖게 됐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뜨거운 것도 따분한 것도 아니면 뭘까. 책 제목 『단어 탐정』이 알려주듯, 사전편집자는 탐정과 하는 일이 비슷하다. 심프슨이 OED를 떠날 때 영국 매체들은 ‘37년 만에 단어 탐정이 은퇴했다’는 식의 제목을 뽑았다.
 
심프슨은 아르키메데스, 칸트, 제임스 조이스가 OED 채용에 응시한다고 해도 뽑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적성에 맞지 않을 거기 때문이다. ‘단어를 사랑하는 사람들(lovers of words)’, 특히 어렵고 희한한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사전편집자 체질이 아니다. 언어에 대한 열정보다는 정확성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분석 능력, 육체적·정신적 스태미나와 뚝심이 필요하다.
 
심프슨의 시대는 민주화 바람이 사전 제작에도 불어 닥친 시대였다.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역사는 더 이상 왕과 여왕의 이야기나 원대한 정치 계략에만 집중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삶에도 주목했다. OED도 마찬가지로 언어 변화의 증거를 일상적인 출처에서 찾으려고 하기 시작했다.” 소설가 등 작가들의 글에서 인용문을 찾는 시대는 예전에 저물었다. 문예지뿐만 아니라 모터사이클 전문 잡지가 어엿한 단어의 출처다.
 
저자에 따르면 사전편집자들은 “이것이 옳고, 저것은 틀린다”라고 결론을 내려주는 사람이 아니다. ‘이 단어는 이렇게 써야 한다’가 아니라 ‘이 단어는 이렇게 사용되고 있다’를 정리해주는 사람들이다. 단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사람이다. 심프슨은 또 영어를 모자이크에 비유한다. 사전편집자는 모자이크 조각들을 하나하나 닦는 일을 한다. 영어라는 모자이크를 사람들이 또렷하게 볼 수 있도록 말이다. 퍼즐을 푸는 사람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모든 변화는 퍼즐이다.”
 
『단어 탐정』은 자서전인 만큼 가슴 아픈 개인사도 나온다. 28세인 딸 엘리는 발달장애 때문에 말을 못 한다. 지적 발달이 18개월 수준에서 멈췄다. 딸을 통해 심프슨은 ‘어쩌면 단어는 소통에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어 탐정』은 영어 사전·단어에 대한 흥미로운 지식을 전달한다. 우리 국어사전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책인지도 모른다. 국어 사랑은 곧 단어 사랑이다. OED는 일반 영국인의 광범위한 참여가 거둔 성과이기도 하다. 새로운 단어나 기존 단어의 새로운 용법을 발견한 일반인이 OED에 보내면 이를 사전 편찬의 원천 자료로 삼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우리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 또한 ‘한국어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편집을 개방하고 있다.
 
단어는 왜 중요할까. 민주적인 토론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가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정의’의 뜻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다. 책도 중요하지만, 국어사전을 먼저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건국의 시점에 대한 토론에 참여하려면 우선 사전에서 ‘건국’의 뜻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김환영 지식전문기자 whanyung@joongang.co.kr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오영환 부소장 : oh.younghwan@joongang.co.kr (02-751-5515)
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