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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알라룸푸르가 서울보다 시원할 줄이야

기자
전새벽 사진 전새벽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 읽기(14)
요즘 같은 더운 날은 날씨 얘기로 공감하기 좋을 때다. [중앙포토]

요즘 같은 더운 날은 날씨 얘기로 공감하기 좋을 때다. [중앙포토]

 
백 사람이 모이면 백 개의 의견이 충돌하는 인간 세상이지만, 요새 같이 서로에게 공감하기 좋은 시절 있을까. “덥다, 더워.” 이 한 마디에 공감하지 않을 자 없으니, 위대한 자연 앞에서는 개개인의 사견 따위는 별 대단치 않은 것이라 하겠다. 
 
아무튼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화의 시작은 가벼운 주제로, 예를 들면 날씨 이야기’라고 배웠는데, 요새는 그야말로 만나는 사람마다 날씨 얘기부터다. 필자가 최근에 다녀온 말레이시아 출장 중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현지인들에게 서울의 기온을 들려주자 – 쿠알라룸프르가 서울보다 시원할 줄이야! - 그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땀이 날 것 같으니 어디 시원한 거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리곤 도보로 쇼핑몰에 갔는데, 걸을만했다. 뇌가 녹아버릴 것 같은 서울과 달리, ‘기분 좋은 여름’이란 느낌이었다. 난생처음 동남아로 떠난 피서(避暑)였다.
 
여름은 (열매)가 ‘열다’의 명사형 ‘열음’이 변형된 말
여름은 초목이 제 절기를 맞아 열매가 연다는 뜻이다. [사진 pixabay]

여름은 초목이 제 절기를 맞아 열매가 연다는 뜻이다. [사진 pixabay]

 
원래 여름은 초목이 제 절기를 맞아 열매가 연다는 뜻으로 ‘열다’의 명사형 ‘열음’이 변형된 말이다. 여름은 원래 그렇게 생기가 가득한 계절이다. 아이들은 뛰어놀고 어른들은 땀 흘려 일하는 계절이다. 옛말에도 있지 않나. 여름에 하루 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는 말이. 
 
한편 여름의 기운에 대해 『한국문화상징사전』(동아출판사, 1992)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1년 4계절 중에서 둘째 번 계절에 나타나 상제(上帝)로부터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만물이 무성하게 하며, 새끼를 치고 번창하게 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평론가인 노드롭 프라이(Northrop Frye, 1912~1991)는 “봄이 이성과의 만남을 상징한다면 여름은 결혼, 승리, 완성을 상징한다”며 여름의 충만함을 표현했다. 그러니 동서를 막론하고 여름이 원래 얼마나 강한 생명력을 가진 계절로 인식됐는지, 대강 짐작할만하다.
 
하지만 위의 말들은 어디까지나 2018년 서울의 여름을 못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2018년 서울 여름의 행동강령은 ‘겨울이 오기 전에 일할 것’ 따위가 아니라 ‘야외활동자제’다. 오늘 보니 아침저녁으로는 불기운이 조금 사그라든 것 같은데, 낮에는 여전히 어지러울 정도다.
 
실외에서 근무하는 이들이 별 탈 없기를 기도하면서, 여름 시 한 수 읊는다. ‘덥다, 더워’라고 불평하는 시는 아니므로, 오히려 강한 더위와는 달리 속은 추워 꽁꽁 싸맨 시이므로 조금은 여름 나기에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견디는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불벼락 뙤약볕 속에
눈도 깜짝 않는
고요가 깃들거니
 
외로운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저토록 황홀하고 당당한 유록도
밤 되면 고개 숙여
어둔 물이 들거니
 
-허영자, 「여름 소묘」 전문
 
더위가 나만의 것이 아니듯이, 외로움도 나만의 것이 아니다. [사진 pixabay]

더위가 나만의 것이 아니듯이, 외로움도 나만의 것이 아니다. [사진 pixabay]

 
시인은 무언가를 ‘견디’고 있다. 다음 연을 보건대, 견뎌낼 대상은 무더위다. 그런데 그 견딤이 덜 힘든 까닭은, 견디는 것이 혼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절이란 죽음이나 세금처럼 공평해, 모두를 같이 불태우고 모두를 같이 얼려버리는 것이어서, 시인의 견딤은 오늘 조금 더 수월하다.
 
거기서 끝났어도 좋을 이 시는 3연을 통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모두 같이 겪는 고통이라 무더위도 견딜 수 있다던 시인이 돌연 외로움을 토로한 것이다. 1연의 2행과 같아 리듬감을 자아내는 3연의 2행을 통해, 이제 독자는 4연이 이 시의 핵심임을 깨닫는다.
 
화자는 외롭다. 그런데 이 세계에, 또 외로운 자 누구냐. 4연은 그것을 말해준다. 찬란한 햇살 받아 건강미를 뽐내던 무성한 초록들, 해가 지면 밤이슬을 머금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니, 이들 또한 외로운 것 아니냐! 
 
시인은 달랜다. 외로움도 죽음이나 세금이나 계절처럼 모두에게 찾아오는 것이라며 자신을 달랜다. 이 더위가 나만의 것이 아니듯이, 이 외로움도 나만의 것이 아니라며 시인은 모든 외로운 이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외로움의 정서적 거리는 '공감'으로 좁혀져
타인과 '공감'을 통해 정서적 거리를 좁힐 수 있다.[사진 pixabay]

타인과 '공감'을 통해 정서적 거리를 좁힐 수 있다.[사진 pixabay]

 
외로움은 ‘홀로 있음’에서 온다. 그런데 외로움은 군중 속에서도 온다. 그러니 외로움의 조건인 홀로 있음이란 기실 타인과 물리적으로 먼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타인과 정서적으로 멀기 때문에 불충분하다는 것일 게다. 이 정서적 거리는 어떻게 좁히나. 듣자 하니 ‘공감’을 통해 해낼 수 있다고 한다.

공감이란 무엇인가. 바로 타인의 기분을 아는 것이다. 혹독한 여름을 견뎌내는 기분, 외로운 저녁이 자주 찾아오는 기분을 아는 것 말이다. 타인이 더운지 아닌지는 그의 땀을 보면 알고, 타인이 외로운가는 그의 눈물을 보면 알 수 있다. 바깥으로 새어 나온 건강한 눈물 말고, 체내에서 맴도는 아픈 눈물 말이다. 그러니 우리, 상대가 흘리는 것들을 조금 더 자세히 읽어내자. 
 
나는 오늘, 허영자가 흘린 문장들을 읽는다. 
 
허영자 시인
-1938년 경남 함양 출생
-196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2015년 제3회 허난설헌 시문학상 수상
-2015년 옥관문화훈장 수훈, 시집 『마리아 막달라』, 산문집 『살아 있다는 것의 기쁨』 등
 
전새벽 회사원·작가 jeonjunh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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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