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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디지북은 되고 그린북은 안된다 … 사람 냄새 나야 해서

성호준의 주말 골프인사이드
오래전 골프의 고향 스코틀랜드의 캐디들은 거리를 재지 않았다. 뛰어난 캐디는 그냥 눈으로 보고 정확한 클럽을 선택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알기 위해 잔디를 뜯어 날려 보내는 것도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20세기 중반엔 거리 정보가 표시된 야디지북이 등장했다. 요즘 미국 PGA 투어와 LPGA 투어 선수들은 그린 리딩 북(Green Reading Book·그린북)을 사용하고 있다. 그린북은 고성능 3D 레이저를 이용해 그린을 투사해 정확한 경사를 표시한 일종의 지도다. 2008년부터 상업적 제품이 나왔다. 현재는 투어 셰르파(tour sherpa)와 스트래카라인(Strackaline) 등 전문업체들이 매주 그린북을 제작해 선수들에게 판매하고 있다.
 
 
업체들 매주 만들어 팔아 … 값 최고 5000달러
 
그린북을 참고해 그린을 읽고 있는 로리 매킬로이. [연합뉴 스]

그린북을 참고해 그린을 읽고 있는 로리 매킬로이. [연합뉴 스]

선수용 그린북 가격은 150달러에서 300달러이며 커스텀 메이드 버전은 5000달러에 달하기도 한다. 그린은 침식되거나 벙커샷으로 모래가 쌓여 지형이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매년 새로 사야 한다.
 
PGA 투어 선수들 95%가 사용한다. 지난 시즌 PGA 투어 최종전인 투어 챔피언십(30명 참가)에서 그린북을 지참하지 않은 선수는 단 한 명이었다. 조던 스피스가 대회 중 그린으로 걸어가면서 “그린북을 믿어야 한다”고 혼잣말을 하는 모습이 TV에 잡히기도 했다. LPGA 투어 사용률은 30% 정도다. 그린북은 그린에서만 쓰는 것은 아니다. 세계랭킹 1위 더스틴 존슨은 페어웨이에서 더 효율적으로 쓴다. 그린의 어느 지점에 공을 떨어뜨려야 오르막 퍼트를 할 수 있는지, 공이 어느 쪽으로 튈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수 및 캐디들은 “그린북 때문에 오히려 헷갈릴 때도 많다”고 한다. GPS 네비게이션은 지도가 정확하더라도 자동차의 위치를 정확히 찾지 못한다면 헤매게 된다. 같은 이유로 골프선수들이 홀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면 그린북은 이중 스파이가 주는 역정보처럼 혼란을 줄 수도 있다. 투어 측에서는 야드 단위로 두리뭉실한 홀의 위치를 제공하기 때문에 선수들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이는 그린북 자체의 문제는 아니며 대회 주최 측과 협업해 정확한 홀의 위치를 제공하는 솔루션을 만들면 해결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한계는 있다. 선수들은 그린북이 너무 복잡하다고 한다. 스튜어트 싱크는 미국 골프 월드에 “발자국으로 인한 변화, 오전과 오후에 달라지는 그린 상태를 그린북은 얘기해 주지 못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린북은 점점 더 정교해져 야디지북처럼 투어의 필수품이 되는 추세였다. 또한 제조업체들이 미국의 일부 골프장에도 진출해 아마추어 골퍼들도 그린북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② 촘촘하게 표기된 현재 그린북. 앞으로는 사용이 제한된다. ③ 규제 이후 경사가 4% 미만인 부분은 공백으로 표시해야 한다. [USGA]

② 촘촘하게 표기된 현재 그린북. 앞으로는 사용이 제한된다. ③ 규제 이후 경사가 4% 미만인 부분은 공백으로 표시해야 한다. [USGA]

골프 규제기관인 USGA와 R&A는 그린북을 두 가지 이유로 불편해 했다. 첫째는 선수들이 그린북을 보느라 경기 시간이 늘어나는 문제다. 둘째는 그린을 읽는 능력도 골프의 중요한 기술인데 이를 기계에 의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린북 제조업체들은 “그린북이 불확실성을 줄여 오히려 시간을 단축한다. 선수들의 그린 읽는 능력이 중요하다면 캐디 도움도 못받게 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USGA와 R&A는 지난달 31일(한국시간) 그린북 규제안(案)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경사가 최소한 4%(2.29도) 이상 되는 곳만 지도에 표시되고 나머지는 공백으로 둬야 한다. 또 지도의 배율은 최소 1:480으로 제한,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작은 사이즈로 묶었다. 그린북에서 표기가 가능한 4%가 넘는 경사는 눈으로 봐도 확연히 파악할 수 있다. 모두 다 아는 정보는 의미가 없는 정보다. 사실상 투어에서 그린북을 무력화시키는 규제다.
 
선수들은 규제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로라 데이비스 등 LPGA 투어 선수들은 “그린북 때문에 오히려 헷갈리기만 했다. 아예 완전히 불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자 선수들은 그린북이 별 도움이 안 됐으나 나만 안 하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해 어쩔 수 없이 사용했다는 뉘앙스다. 조던 스피스는 “그린 읽는 기술은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어서 그린북 금지는 내겐 유리한 일”이라고 말했다.
 
 
아마추어 “골프 어렵게 하려는 시도” 불만
 
투어에서 쓰는 전통적인 야디지북. 대략적인 그린 경사만 표시돼 있다. [사진 강성훈, 중앙포토]

투어에서 쓰는 전통적인 야디지북. 대략적인 그린 경사만 표시돼 있다. [사진 강성훈, 중앙포토]

의문은 남는다. 야디지북은 제도권으로 들어왔고 그린북은 실패했다. 거리는 정확한 정보를 받아도 되고, 그린 경사는 정확한 정보를 받으면 안 되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두 정보가 달리 평가되는 이유는 뭘까.
 
추측 정도는 해볼 수 있다. 야디지북은 처음 출현 시 발걸음으로 거리를 쟀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정보로, 그린북은 레이저로 경사를 측정했기 때문에 기계가 만든 정보로 판단한 듯하다. 요즘은 거리도 레이저로 재는데 말이다. 혹은 그린북의 숫자가 너무 많고 복잡해서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에 선수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토머스 페이젤 USGA 규칙담당 이사는 “골프에서 사람의 기술과 판단을 배제하기 시작하면 골프는 로봇의 게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판단과 능력이라는 전통을 지키면서 현대 기술을 어디까지 차용할 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규제기관이 어떻게든 골프를 어렵게 하려는 시도” “정확한 정보를 활용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라는 아마추어 골퍼의 댓글도 되새겨 봐야 한다. 아직도 아마추어들에게 골프는 어렵다.
 
야디지북 만든 비먼 “골프 기술 너무 나가면 샷 대신 미사일 쏠 수도”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골프란 아주 작은 볼을, 그 목적과 아주 부적합하게 디자인된 무기로, 아주 작은 구멍에 처넣는 이상한 게임”이라고 했다. 그래서 많은 혁신가가 팔을 걷어붙였다. 말 그대로 나무였던 우드는 미사일에 쓰는 첨단 금속이 됐고 샤프트는 뒷산에서 잘라 온 막대기가 아니라 탄소섬유를 말아서 만든다.
 
이러한 진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나 잘 칠 수 있는 제품을 쓴다면 골프가 아니라는 거다. 그들은 과학이 인간의 능력을 대체한다면 골프라는 게임의 철학이 무너지게 된다고 본다.
 
이런 확신을 가진 사람 중 대표적인 인물은 PGA 투어의 커미셔너를 20년간 지낸 딘 비먼이었다. 그는 기술 발전을 방치하다가는 실력없는 선수가 우승하고 골퍼가 샷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홀을 향해 미사일을 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먼은 머리카락 굵기에 불과한 아이언 그루브의 미세한 넓이 차이를 걸고넘어져 용품사 핑과 치열한 소송 전쟁을 벌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보수주의자였던 비먼 자신이 선수 시절 투어에 획기적인 신기술을 들여와 동료의 눈총을 받았다는 것이다. 코스에 대해 조사한 노트(야디지북)를 만든 주인공이 바로 비먼이었다.
 
성호준 기자·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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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