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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키질석굴 속 ‘중국의 피카소’는 조선인 한락연이었다

[윤태옥의 중국 기행] 변방의 인문학
신장위구르의 키질석굴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사연이 있다. [사진 윤태옥]

신장위구르의 키질석굴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사연이 있다. [사진 윤태옥]

중국의 변방(邊方)은 중원과는 색다른 지대다. 변방을 살피면 중국 전체가 조금 쉽게 보이거나 아예 다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변방을 걷고 변방에서 바라보면 유라시아가 보일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낯설다고 할 수 있는 신장·칭하이·간쑤·쓰촨·윈난·광시·내몽골·헤이룽장 등지에서 만나는 인문학 터치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펼친다.
 
중국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의 쿠처(庫車)는 아커쑤 지구에 속하는 현(縣)이다. 톈산산맥 중단의 남록이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가장자리를 흐르는 타림강(塔里木河)의 북안에 걸쳐 있다. 투루판에서 카스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톈산남로의 중간에 있는 교역의 요충지이고, 인도의 불교가 중원으로 전해지는 길목이었다. 정치사로 보면 고대에는 서역 36국의 하나인 구자(龜玆)였다. 청나라 이전까지는 중원의 황제가 호령하지 못하는, 멀고 먼 남의 땅이었다.
 
쿠처는 연평균 강수량이 80㎜밖에 되지 않는 대단히 건조한 곳이다. 이로 인해 자연풍광은 극단적으로 황량하다. 그러나 여행객에게는 황량한 것이 오히려 장관을 이뤄 찬탄을 내지르게 된다. 쿠처 시내에서 북으로 빠져나가 옌수이거우(鹽水溝)를 지나 64㎞를 가면 톈산신비대협곡이 있다. 옌수이거우는 도로 양옆으로 펼쳐진 자연 그대로의 지질공원이다. 입장료도 없이 화성으로 가는 느낌이다. 이 풍광만으로도 주눅이 들 수 있다. 원형의 톱날을 세워놓은 것 같은 능선에서 기괴한 형상의 봉우리까지, 상상 그 이상이다.
 
 
3~9세기 만들어진 중국 최초 석굴사원
 
중국 국적의 조선인 화가였던 한낙연은 서역의 석굴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초기의 전문가였다. [사진 윤태옥]

중국 국적의 조선인 화가였던 한낙연은 서역의 석굴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초기의 전문가였다. [사진 윤태옥]

톈산신비대협곡은 옌수이거우의 외계행성 같은 황량함과는 달리 붉은 색으로 두껍게 칠한 거대한 유채화 같다. 높이가 200여m나 되지만 폭이 아주 좁은 협곡이다. 감탄사가 통상의 언어들을 압도한다.
 
톈산신비대협곡에서 화성이나 금성 어디쯤 헤매는 느낌 속에 빠졌다가 돌아 나오면 쿠처 북서쪽에 있는 키질석굴로 가야 한다. 자연에서 인문으로 전환하는 노선이다. 키질(Kizil)은 중국어로 커쯔얼(克孜尔)이다. 중국 최초의 석굴사원으로, 3세기부터 9세기까지 조성된 석굴군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간다라에서 중국으로 전해졌다. 쿠처가 길목이었다. 석굴 입구에 들어서면 구마라집(鳩摩羅什) 동상이 유려한 몸매로 눈을 감은 듯 뜬 듯 여행객을 맞이한다. 불경을 한어로 번역한 초기의 역경가로 유명한 불승이다.
 
구마라집 동상을 지나야 석굴로 올라간다. 지금까지 확인된 석굴은 236개다. 이 가운데 10여 개 석굴이 개방돼 있다. 불상과 벽화 대부분은 훼손됐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탐험대라는 이름을 내건 서양의 문명 도굴꾼들이 치명적이었다. 지금도 벽화가 200여 굴에 1만㎡ 정도 남아 있지만, 상당량의 벽화는 도굴꾼들이 뜯어내 서방으로 가져갔다. 뜯긴 벽화는 서양에서 오리엔탈리즘 수장가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려나갔다. 현지인들의 오랜 문화와 역사는 그들에게는 돈벌이였고, 그들의 고상한 역사학과 인류학은 신장에는 약탈의 깊은 상처였던 것이다. 특히 독일의 베를린인도예술박물관이 키질석굴 벽화를 다량 소장하고 있다. 그것은 유물인가 장물인가.
 
키질석굴에는 한국인에게는 특별한 곳이 하나 있다. 10번 석굴이다.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게 철저하게 관리하는 석굴이지만, 승방굴 하나를 조선인 한락연(韓樂然·1898~1947)의 개인 기념관으로 조성했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한반도에서 3500㎞도 더 되는 이곳, 눈 파란 사람들의 땅에 검은 눈의 조선인 한락연이라니. 처음 키질석굴에 갔다가 한락연을 조우한 그날 밤, 나는 중국 웹사이트에서 한락연을 부리나케 검색했다.
 
한락연은 20세기 전반 ‘중국의 피카소’라고 불렸던 중국 국적의 조선인 화가였다. 서역의 석굴들을 중국 측에서 본격적으로 연구한 초기의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 한락연이었다. 그래서 승방굴 하나를 그의 기념관으로 조성한 것이었다.
 
그의 일생은 내겐 더욱 놀라운 ‘사건’이었다. 1898년 옌볜의 룽징(龍井)에서 태어났다. 윤동주·송몽규와 마찬가지로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의 2세다. 1919년 3·13 반일시위를 준비하면서 밤새워 태극기를 그린 탓에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해야 했다. 이듬해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 창건에 참여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들어가 호위위원 직을 맡았다. 1921년 상하이 미술전과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에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파벌싸움에 빠져들어 갔고, 조선의 젊은이들은 러시아에서 울려온 혁명의 함성에 주목했다. 청년 한락연도 그랬다. 1923년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조선인으로 최초였고 중국 미술계에서도 최초의 입당이었다. 다음 해 선양으로 파견되어 만주 지역의 초기 개척자가 되었다. 여기서 개인전시회를 열었고 동아일보는 ‘예술계의 수재’라고 보도했다.
 
 
중국 공산당 후원으로 파리서 미술 공부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중국 공산당의 후원으로 1925년 3개월 동안 소련으로, 1931~37년에는 파리 루브르 예술대학으로 가서 미술을 공부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귀국했다. 우한에서 저우언라이가 이끄는 동북항일구국총회에서 일을 했다. 이곳에서 미국인 여성 기자 아그네스 스메들리(주더의 전기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의 저자)와 에드가 스노우(『중국의 붉은 별』 저자) 등과 교류했다. 중국인 류위샤(劉玉霞)와 결혼한 그는 1944년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간쑤·신장·칭하이 등 서북지역 해방을 위한 비밀 임무를 부여받고 란저우로 갔다. 한락연은 공개적으로는 화가이자 석굴벽화 연구가로 활동했다. 키질과 둔황의 석굴벽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면서 현지 소수민족의 소박한 일상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러나 불운했다. 1947년 국민당 군용기를 타고 우루무치에서 란저우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 49세였다. 그의 부인은 남겨진 작품 135편을 모두 국가에 기부했다. 지금은 베이징의 중국미술관에 영구소장돼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40여 년이 훌쩍 지난 1993년 한·중 수교 1주년 기념으로 서울에서 ‘조선족 예술혼 천재화가 한락연 유작전’이 열렸다. 2007년 대한민국 정부가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면서 한락연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중국에서는 그를 중하게 기억했다.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룽징시 중심에는 그의 이름을 딴 낙연공원이 있다. 그곳에 그의 흉상도 세워져 있다.
 
처음 키질석굴을 갔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절절하다. 내겐 충격이었다. 한동안 멍하게 쳐다봤다. 이게 무슨 일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사진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된 곳이지만 감시원이기도 한 안내원에게 통사정하면서 한락연의 자화상을 휴대폰으로나마 정성스레 촬영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사회주의로 저항한 것은 당시의 거대한 역사 흐름이었다. 어떤 이들은 중국 땅에서의 반제국주의 혁명은 중국 공산당이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서 활동했다. 중국의 반일 혁명투쟁이 우리의 독립에 도움이 되는 불가피한 관문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모두 서로 다른 곳이지만 같은 아리랑을 부르면서 몸을 던졌다. 거대한 역사의 ‘플래시 몹 아리랑’ 속에서 죽어간 이들이다. 한락연도 그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면서 한국전쟁이란 거대한 비극이 덮쳐 버렸다. 남북대결 속에서 한락연과 같은 인물은 이념을 핑계로 권력의 이해에 따라 가르치고 배우는 역사에서는 숙청당했다. 다행스럽게 1990년대 들어서서 정부는 한락연의 독립운동에 포상을 했지만, 아직도 대중적으로는 미지의 인물에 가깝다. 우리는 아직도 분단과 전쟁의 편견에서 질척대고 있다. 독립운동사의 지평부터 넓혀야 한다. 아직 멀기만 한 걸까.
 
신장은 우리와의 연관은커녕 중국 땅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쉬운 곳. 이런 낯선 오지에서 조선인의 흔적을 대면하는 것이 신기해 보이는가. 그러나 신기한 일은 아니다. 우리 관념 속에 우리의 활동영역을 좁게 설정해서 신기한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생각의 영역을 넓혀야 하는 역사였고, 그게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윤태옥 중국 여행객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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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