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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대원군 납치 3년’ 시진핑 외교에 어른거린다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19세기 말 중국의 한반도 무력 개입
중화(中華)는 우월감이다. 그 의식에 인접국에 대한 간섭이 있다. 중국 외교의 한반도 개입은 본능이다. 그것은 21세기 시진핑(習近平) 외교에서 드러난다. 136년 전에 중국의 참견·개입은 격렬했다. 1882년 조선의 임오군란 때다. 정점은 ‘대원군의 중국 유폐(幽閉)’ 3년이다. 나는 치욕의 드라마를 찾아 나섰다.

1882년 임오군란 터지자
대원군 8년 만에 권력 복귀

중국, 대규모 군사 개입
한반도의 종주권 복원시켜

압송한 조선 최고권력자를
북양대신 이홍장이 국문

‘대원군 유폐 역사’를 알아야
오늘의 중국외교 알 수 있어

 
1882년 군란(발단 7월 19일, 음력 6월 5일)이 터졌다. 구식 군대의 반란이다. 정부의 실정(군료 미지급) 탓이다.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에게 대권을 넘겼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재집권이다. 고종의 친정(親政) 8년4개월 만이다. 민비(1897년 명성황후) 세력 신하들의 반격도 신속했다. 톈진(天津)에서 김윤식·어윤중은 중국(청)에 군란 진압을 요청했다.
 
중국으로 납치·압송된 뒤의 흥선대원군. 톈진에서 임오군란 주모자로 심문과 판결(바오딩 유폐)을 받은 후 촬영한 것으로 추정(1882년 양력 9월 말). 탕건에 흰 평상복 차림으로 손을 가슴선까지 올려 책을 든 자세는 연출된 듯하다. 구치소에 수용될 때 기록용 사진의 느낌을 준다.

중국으로 납치·압송된 뒤의 흥선대원군. 톈진에서 임오군란 주모자로 심문과 판결(바오딩 유폐)을 받은 후 촬영한 것으로 추정(1882년 양력 9월 말). 탕건에 흰 평상복 차림으로 손을 가슴선까지 올려 책을 든 자세는 연출된 듯하다. 구치소에 수용될 때 기록용 사진의 느낌을 준다.

청국은 군란을 기회로 삼았다. 그 무렵 조선에서 청의 종주권은 흔들렸다. 조·일 강화도 조약, 미국·유럽 열강의 한반도 진출 때문이다. 청국은 수사(水師)제독 정여창과 도원 마건충을 인천항에 파견했다(8월 10일). 상황 정탐이다. 이양자 동의대 명예교수는 “청은 대원군을 제거, 군란을 평정하고 종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무력개입에 나섰다”(『조선에서의 원세개』)고 했다. 일본군 400여 명도 조선에 출병했다.
 
다음 단계는 대규모 군대 파견과 신속 결행. 광동수사제독 오장경(吳長慶)은 경군 3000명을 동원했다. 덩저우에서 출발(북양함대 군함 4척)→한반도 남양만 마산포(화성시 송산면 고포리) 상륙→8월 25일 한성(한양) 진출이다. 오장경 휘하에 23세의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가 있었다. 8월 26일 오전, 사령관 오장경과 일행은 운현궁에서 대원군을 만났다. “군무에 상의할 일이 있다”고 답방을 요청했다. 오후에 대원군은 소수 병력만 대동했다. 남대문 밖 청군 진영을 찾았다.
 
대원군은 오판했다. 청나라가 조선·일본의 갈등을 중재해 줄 것으로 착각했다. 그때 일본은 공사관 습격자의 처벌·배상을 요구했다. 필담이 오갔다. 청군 마건충의 기습은 충격적이었다. “남양만을 건너 황제의 유지(諭旨)를 받음이 어떠냐.” 대원군은 황당했다. 청군은 그를 강제로 가마에 태웠다. 남양만으로 압송했다. 유인·납치작전은 성공했다. 조선 최고권력자의 몰락은 허무했다. 재집권 33일 만이다.
 
 
신 청하도서에 걸린 안내판.’대원군은 중국정부군 도움(幇助·방조)으로 중국에 왔다“고 납치 사실을 은폐·왜곡.

신 청하도서에 걸린 안내판.’대원군은 중국정부군 도움(幇助·방조)으로 중국에 왔다“고 납치 사실을 은폐·왜곡.

는 기억의 장소를 추적했다. 남양만 마산포의 뱃길은 끊겼다. 시화호 간척사업으로 육지로 변했다. 나는 톈진의 박물관에 갔다. 그 시절 톈진은 북양통상대신 이홍장(李鴻章)의 무대다. 전시물에 북양수사 영무처(營務處) 사진이 있다. 영무처는 대원군의 심문 장소. 기막힌 사연은 계속된다. 대원군은 밤새 마산포로 끌려갔다. 청군 군함 등영주(登瀛州, 1258t)로 압송됐다. 9월 1일 밤 톈진에 도착했다. 열흘 뒤 대원군은 이홍장을 만났다. 나는 자료를 꺼내 읽었다. 『대원군 천진왕환일기(天津往還日記)』다. 그는 도착 순간을 일기에 적었다. “배멀미로 기운이 빠져 혀가 말리고 몸이 움츠러들고 앉지도 눕지도 못했다. ··· 흐느끼니 눈물이 떨어졌다.”
 
이홍장은 직접 조사에 나선다. 속방(屬邦)의 중죄인를 다스리는 국문(鞫問)이다. 대원군 일기에 기록돼 있다. “이홍장=난의 괴수는 누구냐. 대원군=모른다./ 이홍장=말을 꾸며대니 형부로 넘기겠다. 대원군=기름가마솥 앞에 있다 하더라도 사대부가 죽으면 죽었지 모르는 사실을 함부로 지껄이겠는가./ 이홍장=합하(閤下, 대원군 호칭)가 군졸을 사주한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대원군=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대질해 달라./ 이홍장=합하가 난괴(亂魁)를 모른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대원군=이것이 춘추의 필법이다. 내게 불궤지심(不軌至心, 반역)이 있다면 그럴 것이나, 나는 그렇지 않다.”
 
대원군이 억류된 구(舊)청하도서는 헐림. 같은 형태의 신청하도서(복원공사중)의 담과 표지석.

대원군이 억류된 구(舊)청하도서는 헐림. 같은 형태의 신청하도서(복원공사중)의 담과 표지석.

대원군은 비굴하지 않았다. 그는 신조선의 건설자다. 서원철폐, 정책쇄신, 경복궁 중건, 그리고 시대 흐름에 역행했던 쇄국이다. 그런 자부심이 기백으로 나오는 듯했다. 그에게 내린 판결은 ‘영원히 귀국 불가’였다. 유배 장소는 직례(直隷)총독부의 바오딩부(保定府). 나는 바오딩으로 향했다. 톈진에서 서쪽으로 180㎞, 고속열차 1시간10분 거리. 이홍장은 직례총독을 겸했다. 역 앞에서 나는 향토사학자 류즈펑(57)을 만났다. 우리는 준비한 자료를 함께 점검했다. 대원군은 바오딩부의 행정관청인 구(舊)청하도서(清河道署)에 구금됐다. 그 시절 ‘청하도서’ 이름의 관아가 두 군데였다. 류즈펑은 “대원군이 억류됐던 구 청하도서는 헐렸다. 하지만 현존하는 신(新)청하도서와 구조·크기가 같다고 한다. 거기에서 대원군 생활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구 청하도서 자리엔 천주교당이 들어섰다.
 
우리는 현존하는 신 청하도서(흥화로)를 찾아갔다. 작은 궁궐 형태다. 자료엔 건축면적 1840㎡, 건물 18채, 길이 160m다. 2018년 현재 3년째 보수공사 중이다. 건물은 2013년 전국 문화재로 승격했다. 그때 역사 안내판이 세워졌다. 안내문이 거슬린다. “··· 대원군 이하응은 패해 중국 정부군의 도움으로 중국에 왔다(大院君李昰應敗陣, 在中國政府軍的幇助下, 來到中國).” 그것은 진실을 뒤튼 왜곡이다. 이하응은 강제 피랍됐다. 청군의 도움이 아니다.
 
바오딩 직례총독서(박물관)에 전시된 이홍장과 일본공사 모리의 밀랍인형. 동격의 자리 배치다.

바오딩 직례총독서(박물관)에 전시된 이홍장과 일본공사 모리의 밀랍인형. 동격의 자리 배치다.

 
곳에서 나는 그의 사진을 꺼내보았다. 유배 판결을 받은 뒤 톈진 영무처에서 찍은 듯하다(9월 말 양력). “평상복 차림의 대원군 표정은 온화하나 연출 사진인 듯 자세는 어색하며 경직돼 있다”(김정숙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예술 세계』). 대원군 생활은 감시와 통제다. ‘간수(看守) 규정 8개항’도 만들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一草一木)’도 허락 없이 반입 금지였다. 그는 내당 두 채에 묵었다. 자책과 회한, 병고(황달)와 불안감이 이어졌다. 그는 난(蘭)을 쳤다. 그것으로 고통을 다스렸다. 김정숙 박사는 "괴석을 한쪽에 두고 아래위에 난을 배치한 석란도가 그 기간에 주종을 이루었다”고 했다. 대원군 호는 석파(石坡). 석파란은 중국에서 유명해졌다.
 
직례총독서(박물관)로 발걸음을 옮겼다. 밀랍인형이 눈에 들어온다. 청나라 관복의 이홍장과 청국 주재 일본공사 모리 아리노리(森有禮)다. 설명문은 이렇다. "1876년 9월 두 사람은 조선 문제를 의논했다.” 좌석 배치가 동격이다. 이홍장은  일본 외교관을 예우했다. 조선 실력자를 함부로 다뤘다. 분노와 허탈감이 내게 스며든다. 박상은 전 의원은 신 청하도서(2001년)를 방문했다. 그는 "중국인 마음에는 한국은 자신들의 종속국이란 역사의식이 있다. 대원군 유폐의 역사를 알아야 21세기 중국의 내심을 안다”고 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군란 진압 후 오장경은 계엄사령관처럼 행세했다. 조선 군대는 파탄났다. 대규모 외국 군대의 수도 주둔은 위압적이었다. 청나라는 달라졌다. 예전같은 내정불간섭의 종주국이 아니다. 중국은 경제쪽까지 영향력을 확장했다. 이양자 교수는 "부국강병이 허술해지고 국민단합이 깨지면 강대국이 개입한다는 게 역사 교훈”이라고 했다.
 
조선의 정세가 바뀌었다. 주둔군 사령관 오장경은 돌아갔다. 고종은 반청(反淸) 자세를 취했다. 러시아와의 밀약설이 퍼졌다. 갑신정변(1884년)이 일어났다. 이홍장은 대원군을  석방·귀국시켰다. 대원군은 고종·민씨정권의 견제용이다. 그는 1885년 10월 인천에 도착했다. 피랍 3년2개월 만이다. 원세개가 그를 호송했다.
 
원세개는 조선의 감국(監國)대신의 총독 행세를 했다. 대원군은 자신의 파란을 ‘한 그루 매화 앞의 한 늙은이(一樹梅前一老儂)’로 묘사했다. 그는 운현궁 이로당(二老堂)에 칩거했다.
 
바오딩·톈진(중국)=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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