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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 대신 얻은 통합의 가치, 한반도에 길을 묻다

EU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대전환의 세기, 유럽의 길을 묻다

대전환의 세기, 유럽의 길을 묻다

대전환의 세기,
유럽의 길을 묻다
페리 앤더슨 지음
안효상 옮김, 길
 
문명의 그물
조홍식 지음, 책과함께
 
유럽 28개국이 경제적·정치적·가치적으로 통합한 유럽연합(EU)은 오늘날 글로벌 수퍼파워로 자리 잡았다. 약 5억1260만 명이 사는 EU의 국내총생산(GDP) 총합은 명목 금액 기준으로 올해 19조7000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미국과 비슷하고 중국보다 많으며 세계 경제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수많은 사람이 EU의 탄생과 확대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봤으며 앞으로의 역할을 기대한다. 여기까지는 주로 외부의 시각이며 경제적 관점에서 본 EU다.
 
다양성의 세계인 유럽에서도 EU를 이렇게 경제·비즈니스 중심적 시각으로만 바라볼까? 사실 유럽에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주로 중도 좌파·우파가 권력을 장악해왔지만, 급진 좌파에서 극우 민족주의 등 정치지형도의 폭은 상당히 넓다. EU는 이렇게 다양한 시각의 사람들이 토론하고 협상하고 타협한 정치적 산물인 셈이다.
 
이 책은 영국 출신의 좌파 역사학자인 지은이가 바라본 EU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다. 지은이는 EU가 현재 중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친비즈니스적이며, 영역 확대에만 골몰할 뿐 정작 해야 할 추가 통합 작업과 다양성 추구 등에 소극적이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여 왔다는 것이다.
 
문명의 그물

문명의 그물

지은이는 특히 EU가 자주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친미적이라며 분통을 터뜨린다. 여러 EU 국가가 테러와의 전쟁 중 자유·평등·우애 등 고유의 가치를 포기하고 ‘항복’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미국의 요구에 굴복했다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아일랜드는 유럽 대륙 공항 중 미국과 가장 가까운 서남부 섀넌 공항을 미 중앙정보국(CIA)에 내줬다. CIA는 유럽 등에서 비합법적으로 데려온 ‘테러 용의자들’을 이곳을 통해 쿠바의 관타나모 해군기지로 비밀리에 실어 날랐다. ‘관타나모 특급’이다. 미군이 운영해도 미 영토가 아니기에 미국법이 적용되지 않는 이 기지는 테러 용의자에 대한 무단 구금과 가혹 행위로 악명을 떨쳤다.  
 
이탈리아는 테러 용의자를 상대하는 CIA의 거대한 ‘납치(비합법적 체포와 인신 구속)’팀을 지원했다.
 
냉전 시절 소련 위성국이었다가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2004년 EU 회원국이 된 폴란드는 한술 더 떴다. CIA가 잡아 온 이용가치 높은 구금자를 다루는 ‘고문실’을 운용했다. 과거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공산당 서기장의 권위주의 통치 시절 비밀리에 지어뒀던 시설을 공산체제를 무너뜨리고 EU 회원국이 된 폴란드가 가동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동맹인 EU가 테러와의 전쟁을 돕는답시고 미국의 ‘고문 하수인’ 노릇을 한 셈이다.
 
그러는 한편 EU는 자유주의자들의 이상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 회원국 전체 GDP의 1%만 운영비로 쓴다. 독자적인 징세권이나 행정적인 강제 수단을 보유하지 않는 데다 공무원 숫자도 1만6000명(통 번역자 제외)에 불과하다. 고전적인 자유주의자들이 갈망했던 ‘최소국가(치안 등을 제외한 정부 활동을 극도로 제한)’ 또는 ‘경찰국가’의 전형이다.
 
유럽연합은 1·2차 세계대전의 참상에 자극받아 만들어졌다. 평화와 공존, 번영을 함께 꾀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미국의 요구에 휘둘리는 등 문제도 많다. 사진은 회원국의 국가 원수 등이 참가하는 유럽이사회 회담장 모습. [사진 European Council]

유럽연합은 1·2차 세계대전의 참상에 자극받아 만들어졌다. 평화와 공존, 번영을 함께 꾀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미국의 요구에 휘둘리는 등 문제도 많다. 사진은 회원국의 국가 원수 등이 참가하는 유럽이사회 회담장 모습. [사진 European Council]

그런데도 EU 체제의 역사적인 가치는 충분하다. 공존을 추구하는 EU 체제 덕분에 개별 국가들의 패권을 위한 무력 충돌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점이 가장 큰 미덕이다.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석탄과 철강 자원의 공동 관리를 위해 1951년 창설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기원이라는 사실에서 EU의 ‘출생의 비밀’을 짐작할 수 있다.
 
평화와 번영의 초국가적 체제인 EU를 낳은 원동력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전쟁이었다. 약 1800만 명이 숨진 제1차 세계대전, 약 60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얻은 뼈아픈 교훈이 EU 체제를 낳게 했다. 오랜 갈등의 결론이 ‘평화와 공존, 번영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통합체제’라는 점은 오늘날 한반도에도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EU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한다. 이상주의자들이 씨를 뿌리고 풀무질을 시작한 것으로 따지면 몇 세기가 지나서야 통합 유럽이 가시화됐다.
 
유럽은 근현대 문명의 산실임과 동시에 전쟁터였다. 문명이 발달하고 새로운 세력이 힘을 얻을 때마다 대륙은 피바다가 됐다. 신·구교도 간 상호 살육에 나섰던 30년 전쟁, 프랑스가 자유·평등·우애의 깃발을 흔들며 유럽을 장악했던 나폴레옹 전쟁, 부국강병을 내세운 프로이센의 7년 전쟁·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이어졌다. 새로운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은 유럽을 거대한 살육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그 절정은 지금부터 딱 100년 전에 끝났던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기차와 자동차는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맡았고, 거함과 거포, 기관총과 지뢰, 항공기와 독가스 같은 과학기술 산물은 학살 기계로 둔갑했다. 대전이 한 차례 더 반복된 제2차 세계대전은 더욱 빠른 속도로, 훨씬 잔혹하게 인간을 비극으로 몰아갔다. 유럽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평화와 공존, 번영의 통합 체제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51년의 ECSC는 57년 초국가적 경제공동체인 유럽경제공동체(EEC)와 92년 유럽공동체(EC)를 거쳐 2007년 리스본 조약으로 정치통합체 성격까지 갖춘 EU로 이어졌다.
 
하지만 지은이는 EU의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이상적이지는 않다고 지적한다. 다양한 논의와 협상, 타협의 결과가 오늘의 EU라는 이야기다. 원서가 2009년 출간돼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를 다루지 못했으며, 독일·프랑스·이탈리아, 3개 축 중심으로 EU를 다룬 점은 한계다.
 
『문명의 그늘』은 유럽 전문가로 숭실대 교수인 지은이가 EU 체제를 중심으로 번영하는 유럽의 바탕을 살핀 책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유럽은 지구촌 현대문화의 거대한 뿌리다.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수많은 언어, 종교와 휴머니즘의 갈등과 조화, 음악과 미술, 건축, 도시 등을 표상한다. 그 안에서 벌어진 숱한 전쟁, 교류와 자본주의 발전은 유럽의 역사가 곧 세계사의 중심이 되는 과정이었다. 유럽에서 태동한 평등·의회·자유주의·사회주의는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글로벌 경제와 학술·문화예술, 축구 등 스포츠의 중심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유럽의 뿌리 탐구를 통해 우리가 왜 이 대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설득한다. EU를 하나의 지역통합 체계를 넘어서서 일종의 문명 현상으로 봐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온 유럽을 주시해야 할 이유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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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