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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제3 삼성을 만드는 첫걸음은 경쟁의 부활

혁신경제 이론가 윌리엄 제인웨이 
윌리엄 제인웨이

윌리엄 제인웨이

“정보기술(IT) 이 낳은 과실은 아직 여물지 않았다.”
 
혁신과 생산성 분야 최고 이론가인 윌리엄 제인웨이(75) 박사가 선진국이 겪고 있는 ‘생산성 정체(productivity puzzle)’ 현상에 대해 내린 진단이다. 그는 책상물림이 아니다. 세계 3대 사모펀드에서 정보기술 투자를 이끌었다. 동시에 혁신경제 모델을 개발했다. 중앙SUNDAY는 주요 산업화 국가들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앓고 있는 생산성 정체 현상을 알아보기 위해 뉴욕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 한국에선 생산성 논쟁이 커지고 있다. 경제 성장이 시원찮은 와중에 노동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빠른 인상 등이 겹쳐서다.
“기업의 불만이 커질 만한 조건이 다 갖춰진 것으로 들린다(웃음). 내 말이 한국 경영자들에겐 위로가 안 되겠지만, 생산성 정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산업화한 나라 모두가 생산성 하락 또는 정체를 겪고 있다.”
 
과거에는 경제 위기와 침체 이후엔 생산성이 높아지는 흐름이지 않았나.
“2001년 닷컴거품 붕괴 이후 미국의 생산성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 위기를 거치며 과잉 또는 거품, 달리 말하면 불균형이 제거돼서 그런다는 게 일반적인 설명이다.”
 
그러데 지금은 왜 개선이 안되나. IT 등 디지털 혁명이 이제 생산성을 기대만큼 높이지 못하고 있는것인가.
“IT는 여전히 생산성 엔진이다. 하지만 생산성 증가에서 아주 심한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다. 생산성 향상은 구글, 아마존, 애플 등 1~5%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나머지(The Rest)의 생산성은 나날이 지지부진하다.”
 
 
국민들 불만 클 땐 혁신 잘 안 이뤄져
 
제인웨이는 생산성 정체 현상이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미국 등에서 나타난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혁신의 아이콘은 전기였다. 앞장서 전기 에너지를 활용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 사이에 생산성 양극화가 나타났다. 생산성 향상이 일부 기업에만 집중되는 바람에 전체 기업의 평균치는 둔화 또는 하락했다는 것이다. 물론 전기 활용이 일반화되면서 평균 생산성은 올라갔다.
 
그렇다면 지금이 IT 혁명의 초기란 말인가.
“그렇다. 전기 혁명 초기에 선도적인 기업은 막대한 돈을 들여 발전기 등을 스스로 갖춰야 했다. 구글이나 아마존 등이 스스로 거대한 데이터 센터 등을 갖추고 있듯이 말이다. 요즘 전기는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 하지만 IT는 아직 그런 단계가 아니다. 혁신적인 기술이 보편화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전기는 30~50년 걸렸다. IT는 이보다 짧을 듯하다.”
 
IT가 보편화하면 개별 기업간 디지털 경쟁력 차이는 없어지는 것인가.
“현재 구글이나 아마존 등의 주가가 나머지보다 월등히 높은 이유다. 생산성 향상의 양극화가 순이익과 주가에 반영된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이런 초과 이익 등은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생산성 평균치도  높아진다.”
 
디지털 혁명은 이제 확산만 남았다는 말인가.
“선도 기업이 차지하는 초과이익 등은 지금보다 크지 않을 듯하다. 이제 다른 혁신 분야를 찾아야 한다. 이른바 저탄소 에너지 등 ‘그린 혁명(Green Revolution)’이 대표적인 분야다. 그 경쟁이 이미 시작됐다.”
 
 
트럼프, 무역전쟁으로 중국 혁신 능력만 키워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제인웨이의 ‘혁신경제 모델’은 정부-기업인-투자자 사이의 역동성을 이론화한 것이다. 그는 “3자가 협력해야 한다는 식의 말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각자 이해를 좇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상호작용 과정에서 혁신과 생산성 향상이 이뤄진다는 얘기다. 그는 “혁신의 장애물 가운데 국가의 규제 시스템보다 국민 불만이 더 결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뜻밖이다. 경제학자들은 지나친 규제가 혁신을 가로막는다고 말한다.
“개별 기업인들은 눈 앞의 규제를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혁신의 밑거름인 각종 기초과학 투자를 줄였다. 철강 등 전통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다. 이런 변화 이면에는 국민의 불만이 똬리를 틀고 있다.”
 
무슨 말인가.
“미국의 사회 안전망은 대부분 기업의 책임이다. 세계화 때문에 제철과 자동차 등이 위기에 빠졌다. 일자리와 함께 사회 안전망이 무너졌다. 이는 녹슨지대(Rust Belt) 불만의 핵심이다. 이 불만 때문에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혁신에 필요한 예산을 줄이고, 대신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쪽에 쏟아 붓고 있다(콩 생산농가 지원강화 등). 또 IT 부문이 지지기반이 아니니 보호무역으로 피해를 보든 말든 중국을 상대로 무역전쟁을 벌일 수 있다.”
 
트럼프의 무역전쟁 타깃이 ‘중국제조2025’이지 않는가. 혁신과 신기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미국 내부 혁신 잠재력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중국의 기술 잠재력을 약화시키려 하는 전략이다. 1880~90년대 영국이 신흥 기술국으로 떠오르는 독일 등을 겨냥해 썼던 정책과 같다. 결과는 실패였다. 이후 영국의 산업 생산력은 독일에 뒤쳐졌다.”
 
제인웨이는 중국이 정부의 투자 덕분에 인공지능(AI)과 양자컴퓨터 분야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지만 주요국으로 떠올랐다고 진단했다. 반면, 미국은 트럼프 당선 이후 기초과학 투자가 위축돼 몇몇 민간 기업이 AI 분야 투자를 맡고 있다.
 
중국이 혁신에서 미국을 곧 추월한다는 말인가.
“기술혁신 등으로 노동이나 자본의 증가분 이상의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총요소생산성(TFP)’면에서 중국이 미국이나 한국, 일본보다 높다(그래픽). 물론 미국이 당장 혁신경제 분야에서 중국에 밀린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얘기다. 트럼프가 그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중국, 총요소생산성 한·미·일보다 높아
 
제인웨이가 이사로 있는 사모펀드 워버그핀커스는 국내 금융회사와 활발하게 제휴하고 있다. 한국의 혁신 잠재력이 그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졌다. 전화 통화에 앞서 한국에서 벌어지는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 사이의 논쟁을 이메일로 정리해 귀띔해줬다.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의 논쟁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혁신은 국민의 정치적 불만이 클 때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 갈등이 시장 메커니즘으로 해소되지 않을 때 만들어지는 게 바로 법규다. 한국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갈등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보인다. 소득이나 혁신 성장은 서로 충돌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내가 보기엔 급한 일은 따로 있다.”
 
무엇인가.
“한국의 삼성과 LG는 기술 분야에서 이미 선두주자다. 제2, 제3의 삼성을 만드는 첫걸음은 경쟁 부활이다. 거대 기업이든 이제 막 시작한 회사(스타트업)이든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법규와 환경을 바꿔야 한다.”
 
한국 TFP가 중국보다 낮다.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한국 국민연금의 자금 규모가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국민의 노후복지를 이유로 국민연금을 안전 자산에만 투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먼 미래 성장엔진을 개발하기 위해 벤처와 신기술에도 투자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해서 경제위기에 찌든 국가에서 혁신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총요소생산성(TFP)
경제성장률 가운데 노동과 자본의 기여를 제외한 부분을 의미한다. 예를들어 2017년 성장률 3% 가운데 1%포인트는 노동의 기여 덕분이고 또 다른 1%포인트가 자본의 기여 때문이라면 남은 1%포인트가 바로 TFP의 몫인 셈이다. TFP가 창의성과 혁신의 척도고 ‘지식을 바탕으로 한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윌리엄 제인웨이
1943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투자은행가로 일하면서 경제학 연구에도 힘을 쏟았다. 그의 절친은 금융버블론의 대가인 고(故) 하이먼 민스키다. 생전에 민스키는 “제인웨이는 이론가이면서 실행가(practitioner)”라고 평가했다. 알파벳(구글의 모회사) 회장인 에릭 슈미트는 “혁신에 관한 내 이론은 대부분 제인웨이의 책 『혁신경제에서 자본주의 실행하기』에서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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