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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대북정보 활용 뒤 간첩 굴레? 탈북 엘리트 구속 사건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손꼽히던 탈북 엘리트 L 박사(50)에게 불행이 닥친 건 지난달 중순. 그의 사무실엔 검찰 수사관이 들이닥쳐 압수 수색을 벌였고, L 박사는 결국 구속 수감됐다. 혐의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이다. 민감한 대북정보를 유출하고 이를 해외 정보 요원에게까지 넘겨 대한민국의 국가 이익을 해쳤다는 게 검찰 주장이다. 하지만 L 박사 측은 “탈북자를 내세워 대북정보 수집에 활용하던 국가와 정보기관이 이제 와서는 간첩의 굴레를 씌우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양측의 입장을 통해 사건의 내막을 들여다봤다.
  
대북정보는 엘리트 계층 탈북 인사들에게 ‘양날의 칼’로 불린다.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적지 않은 돈까지 챙길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노동당 간부 출신 탈북 인사는 “서울 도착 후 가장 먼저 동료들로부터 들은 말이 ‘정보 장사 잘못하다간 큰일 난다’는 주의였다”며 “하지만 당국의 요구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귀띔했다.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에 나와 있는 김일성대 동창이나 동료·친지를 활용해 대북정보를 캐내 보라는 정보기관의 은밀한 압박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북한 체제 내부의 민감한 동향을 담은 고급 정보는 국가 정보기관에서 가장 탐내는 아이템 중 하나다. 국가정보원과 국군정보사령부, 국군기무사령부 등의 정보 요원들이 경쟁적으로 수집에 나서는 이유다. 결정적 정보는 특별진급은 물론 훈포장과 보로금(상금) 등이 보상으로 돌아온다. 요원들 사이에선 ‘북한 핵 시설의 토양을 캐내 오는 데 성공해 훈장을 받았다’거나 ‘김정일 극비 방중을 중국 단둥역에서 포착했다’는 베테랑 선배들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회자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탈북 엘리트인 L 박사도 대북정보 업계에선 선망의 대상이었다. 북한 과학기술계 명문대인 이과대학 출신인 그는 국가과학원과 호위사령부에서 일했다. 그렇지만 기독교 순교자 집안이란 출신성분을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낀 L 박사는 2001년 탈북했고. 중국에 체류하던 중 2005년 한국에 입국했다. 전공을 살려 국내 농업 유전자 관련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박사학위도 취득했다. 누구보다 한국에 잘 정착한 탈북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L 박사가 대북정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2009년 하태경 현 바른미래당 의원이 대표로 있던 대북매체 ‘열린북한방송’을 통해서다. 북한 내부의 핵심 정보를 잇달아 공개하면서 정보기관과 언론 등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L 박사 측은 “김정일의 후계자가 누가될지 우리 정부나 당국도 잘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L 박사가 ‘김정은’을 지목하는 등 북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냈다”고 주장한다. 당시 통일부 정세분석총괄과에서 찾아와 북한에 대한 연구 및 분석을 하는 사단법인 설립을 권유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L 박사는 2011년 ‘대북 전략정보 연구’를 표방하는 사단법인을 만들었고, 이후 통일부에 월 1~2회씩 정세분석보고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대외비인 정책연구 용역까지 맡아 ‘3대 세습 등장 관련 북한 경제회복 가능성’이나 ‘김정은 통치자금확보 및 운영실태 분석’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통일연구원과 세종연구소 등의 객원 연구위원으로 근무한 경력도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통일부를 비롯한 국가기관으로부터 대외비 문서 등을 제공받아 업무를 수행했고, 인맥과 정보력을 통해 양질의 대북정보를 다량 수집하고 있었다”는 게 L 박사 변호인 측의 주장이다.
 
L 박사의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문제는 검찰이 구속기소한 국군 정보사령부 출신 간부들의 대북정보 누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정보사 공작팀장 출신인 황모(58)씨는 2013년부터 올 1월까지 군사기밀 109건이 담긴 컴퓨터의 화면을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수법으로 빼돌렸고, 이 정보를 전임자였던 홍모(66)씨에게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홍씨는 황씨로부터 받은 정보 중 ‘주요 국가 무기정보’ 등 56건을 외국 정보원에게 넘겼다.특히 홍씨는 해외에 파견된 우리 정보 분야 비밀요원의 신상정보까지 수 천만 원에 팔아넘겼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정보요원 출신 인사들의 충격적인 기밀유출 행위를 수사하던 검찰은 홍씨가 평소 L 박사로부터 대북정보를 많이 챙겨왔던 점을 수상히 여겨 수사를 확대했다고 한다.
 
검찰은 단호한 입장이다. L 박사에 대한 압수 수색 결과 컴퓨터와 외장 하드에서 정보사령부가 생산한 군사기밀 63건이 발견됐고, 홍씨와 이메일을 통해 주고받은 정황도 드러났다는 것이다. 일본 측 정보 요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4500만원을 수수한 사실도 있어 “범죄의 정도가 매우 중하다”는 게 검찰 주장이다.
 
이에 대해 L 박사의 변호인은 “피의자(L 박사)가 북한 관련 자료를 수집·조사하고 분석해서 이를 외부에 제공하는 것은 정당한 업무수행”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L 박사의 지인은 “구속된 전직 정보사 요원 홍씨가 자신이 중국에서 수집한 정보라며 메모한 내용을 가져와 컴퓨터 입력을 부탁한 적이 여러 번 있다”며 “그런 문건까지 모두 군사기밀이라고 문제를 제기하면 어떻게 하냐”고 수사에 불만을 나타냈다.
 
L 박사가 일본 측 정보 요원과 알게 된 과정에 국군기무사령부가 개입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L 박사 측은 “2011년경 기무사 군무원을 통해 일본 무관을 소개받았다”며 “당시 기무사 측은 L 박사에게 일본 무관을 소개해주면서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L 박사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대북정보 관련 사단법인 규정대로 북한 관련 자문 대가(월 100만원)를 받았을 뿐이란 얘기다. L 박사 측은 “약 5년간 월 100만원씩 받은 금액을 합치니 5000만원 가까운 돈이 되는 건데, 이걸 일본에 정보를 팔아먹은 대가라고 주장하는 건 지나치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 탈북자 사회는 침묵하고 있다. 자칫 불똥이 대북정보를 다뤄온 탈북단체나 엘리트 인사들에게 튈까 우려해서다. 검찰은 구속된 정보사 출신 홍씨가 L 박사에게 받은 자료를 다른 탈북 박사와 국책연구기관에 근무하는 탈북 인사에게 넘긴 사실을 파악했다고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한 탈북 단체장은 “L 박사 건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탈북자 활용 방식 아니냐”면서 “하지만 분위기 때문에 다들 쉬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3대 세습 비판 등 북한이 불편해할 정보를 적지 않게 제공해온 L 박사에 대한 ‘입막음’용이라는 음모론까지 나온다. 일각에서는 L씨가 대북정보와 관련해 무리수를 두다 한계선을 넘은 것 같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L 박사를 초빙해 ‘객원 연구위원’ 등으로 활용했던 연구기관이나 박사들도 ‘석방 탄원서를 부탁한다’는 가족 요청에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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