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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이 간다] 지하철의 달콤한 인생환승…퇴직자 3000명 돌아온다

김동호의 네오사피엔스 

 
서울교통공사는 1호선에서 8호선에 이르기까지 300km 연장에 277개 역 운영과 전동차 3571량을 보유한 거대 직장이다. 전 세계 대도시마다 도시철도가 운행되고 있지만 서울처럼 지하구간에서 10량 이상 편성된 중전철을 2분30초 간격으로 운행하는 시스템은 드물다. 이런 거대 시스템을 통해 하루 700만 승객을 빠르고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는 건 1만7000여 직원들의 숙련된 기술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고령화의 쓰나미가 덮치면서 한 해 퇴직자가 600명에 달한다. 퇴직 후에도 30년 인생을 보내야 하는 이들이 협동조합으로 제2의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퇴직해도 일하는 100세 시대 ‘네오 사피엔스’의 단면도다. 이들을 만나 궁금증을 풀어봤다. 
 청년 취업난으로 기관사 지망생이 늘어나자 퇴직자들의 강의 기회도 늘어나고 있다. 김동호 기자

청년 취업난으로 기관사 지망생이 늘어나자 퇴직자들의 강의 기회도 늘어나고 있다. 김동호 기자

지난 11일 서울 테헤란로 강의실. 2년 전 퇴직한 권기정(62)씨가 철도 기관사를 꿈꾸는 2030청년세대에게 열정적인 강의를 하고 있었다. 강의실에 빈자리는 없었다. 기관사는 전문 기술직이라 한 번 취업하면 평생직장을 누릴 수 있다. 최근 낙타 바늘구멍 통과만큼 취업이 어려워지자 수강생들이 몰려드는 이유다.
 
이들이 기관사가 되려면 우선 1개월간 100시간의 사전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과정을 거쳐야 서울교통공사ㆍ한국교통대학ㆍ우송대ㆍ동양대 등 5개월 과정의 기관사 훈련기관에 입교할 수 있다. 이들 두 과정을 거쳐야 기관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권씨가 정년퇴직 후에도 강사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은 동료들과 함께 만든 ‘도시철도 협동조합’ 덕분이었다. 그런 협동조합을 만든 계기는 퇴직 쓰나미였다. 법정정년 60세를 채운 1957년생 퇴직자 585명이 지난해 먼저 회사를 떠났다. 올해 58년생 퇴직자는 655명에 달하고 내년 59년생과 2020년의 60년생 퇴직자는 700명을 훌쩍 넘어선다. 이 거대한 퇴직 쓰나미는 2021년부터 다소 가라앉지만 그 추세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청년 취업난이 극심해지면서 기관사 지망생이 늘어나자 퇴직자들의 강의 기회도 늘어나고 있다. 김동호 기자

청년 취업난이 극심해지면서 기관사 지망생이 늘어나자 퇴직자들의 강의 기회도 늘어나고 있다. 김동호 기자

우리나라 인구 구조를 보면 왜 그런지 보인다. 한국은 1차 베이비부머(55년~63년 출생자 710만명)를 시작으로 2차(68~74년 604만명)와 3차 베이비부머(79~85년 540만명)까지 30년간 베이비붐 세대가 이어진다. 이 기간은 ‘인구 보너스’ 시대였다. 인구가 늘면서 온갖 경제적 수요가 증가하면서 경제활동이 활발해졌다. 서울교통공사의 퇴직자들은 그 흐름 속에 지난 30년을 보내고 무더기로 퇴직하고 있다.
 
이들 앞에 가로놓인 문제는 고령화다. 이들은 앞 세대와 달리 수명이 길어 퇴직 이후에도 30년을 살아야 한다. 더구나 인원이 많다. 서울교통공사 퇴직자들은 지난해 9월 이런 배경에서 도시철도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협동조합은 출자금을 납부하면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조합 설립을 주도한 정연수(62) 이사장은 “출자금은 10만원”이라며 “현재 조합원은 850명으로 곧 3000명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조합을 만들자 오래 전 퇴직한 선배들도 찾아왔다. 올해 우리 나이로 칠순이 된 49년생 박종우씨는 퇴직한 지 10년이 넘었다. 철도차량 정비사였던 그는 지금도 기술이 녹슬지 않아 경춘선 폐선로를 활용한 강촌 관광열차 운행사업 컨설팅 프로젝트를 맡아 최근 업무를 궤도에 올려놓았다. 한눈에 봐도 건강한 박씨는 “협동조합에 나와 일도 하고 동료들과 어울려 소주잔도 기울이니 노후생활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즐겁다”고 말했다.
서울교통공사 퇴직자들이 협동조합 운영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서울교통공사 퇴직자들이 협동조합 운영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도시철도협동조합은 퇴직해도 일해야 하는 네오 사피엔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60세 정년을 마치고 퇴직해도 이들은 여전히 에너지가 넘친다. 그래서 이들은 퇴직 후 가장 필요한 것이 소일거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섣불리 창업을 하기도 어렵다. 평생 배운 것이 철도 운영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산은 개인적으로는 쓸모가 없다. 조직화됐을 때만 힘을 발휘한다.
 
조합원들은 이런 고민을 공유한 사람들이다. 정연수 이사장은 “가장 중요한 것은 현역 시절 익힌 기술을 활용해 철도 안전과 보수 분야에서 늘어나는 업무를 도와주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현장에서 30~40년간 축적된 경험과 기술을 갖고 있다. 이들이 보유한 전문 기술을 활용하면 국가적ㆍ사회적 손실을 막고 개인 차원에서도 소일거리를 마련할 수 있다. 기술력은 높지만 인건비는 최저임금 수준이라 경제적 효과가 크다.
 
이들은 전철의 운전ㆍ관제는 물론 철도와 관련된 전기ㆍ신호 업무의 달인들이다. 이런 업무는 기본 매뉴얼대로 하면 되지만 오래된 경험과 축적된 기술이 있어야 원활해진다. 이같이 철도 시스템과 관련된 안전 점검과 노하우 교육, 매뉴얼 제작부터 지방자치단체의 경전철 위탁운영과 해외 파견까지 다양한 업무에 철도 퇴직자들이 활용될 수 있다.
 
물론 경험과 기술이 있다고 해서 생각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이들을 위한 제도적ㆍ정책적 여건이 부족하다. 서울교통공사조차 이들을 활용하는 시스템이 사실상 없다. 그 결과 퇴직자들은 30년에 걸쳐 축적된 경험을 갖고 있지만 정년만 되면 기술도 함께 사장시켜야 한다. 정 이사장은 “이들이 퇴직해 버리면 후임자는 전임자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다시 거쳐야 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된다”고 말했다. 조직 내부에서도 퇴직자들의 경험과 기술을 살릴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정부와 지자체의 퇴직자 활용 체계도 취약하다. 100세 시대에 대한 대비가 부족한 탓이다.
100세 시대의 네오사피엔스로 살아가야 하면서 고령에도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중앙일보

100세 시대의 네오사피엔스로 살아가야 하면서 고령에도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중앙일보

그래서 도전은 더욱 강렬해지고 있다. 다행히 기관사 교육은 물론이고 지자체에 경전철과 관광열차가 속속 도입되면서 일거리가 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도시철도발전연구원을 개설해 퇴직자의 전문기술 역량을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조합원이 늘어날수록 공동소비ㆍ공동구매를 통한 경제적 가치도 점점 높아지게 된다. 무엇보다 퇴직 후에도 협동조합의 힘으로 복리후생 혜택을 계속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도시철도협동조합은 제휴 여행사를 통해 여행상품 5%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제휴 병원을 통한 건강검진은 비수기에 최대 30% 할인을 받는다. 나이가 들수록 자주 이용하는 안과ㆍ치과는 노후 살림의 구멍이라는 점에서 실질적 혜택이 크다. 비급여 수술에 대해서는 최대 70% 할인을 받는다. 자녀 결혼에 필요한 웨딩 서비스와 부모님 장례 서비스의 경우도 전문업체와의 제휴를 통해 고품질의 서비스를 합리적인 가격에 이용한다.
 
퇴직자가 뭉치면 귀농귀촌도 수월해진다. 도시철도협동조합은 충남 홍성군에 귀농귀촌 체험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조합원들이 가서 살만한지 점검하고 확인하기 위해서다. 정 이사장은 “혼자는 실패할 가능성 높아 마을을 조성해 내려가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며 “충분히 안정되면 사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 사회는 결국 사람 중심 사회가 된다. 이런 점에서 협동조합은 네오 사피엔스들에게 희망의 환승역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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