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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스타 인터뷰] ‘양신’ 제치고 안타왕 오른 박용택의 9가지 비밀

 영감 떠오르면 한밤중 알몸으로도 배트 휘둘러야 직성 풀려…철저한 루틴으로 MLB 정복한 이치로 못지않은 구도자(求道者) 평가받아
 

오후 1시면 야구장 출근 경기 전 30분 쪽잠 필수

 
LG 박용택이 ‘양신’ 양준혁을 넘어 3000안타 고지를 정조준하고 있다. 박용택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그래도 3000안타보다 팀 우승이 더 큰 목표“라고 말했다. [LG트윈스]

LG 박용택이 ‘양신’ 양준혁을 넘어 3000안타 고지를 정조준하고 있다. 박용택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그래도 3000안타보다 팀 우승이 더 큰 목표“라고 말했다. [LG트윈스]

 
"넌 틀림없이 좋은 타자가 될 거다. 내가 장담한다.” 2주도 채 되지 않은 짧은 만남. 선배는 이별을 예감한 것일까. 주섬주섬 짐을 챙기면서 룸메이트 신인 후배에게 덕담 한마디를 툭 건넸다. 그리고 “이거 다 가져라”면서 자신의 분신 같은 야구 도구들을 아낌없이 선물했다. 고가의 나무배트는 물론 2㎏이 넘는 연습용 방망이와 수십 켤레의 배팅장갑까지…. 선배는 글러브 하나 달랑 챙겨서 문을 나섰고, 후배는 떠나는 선배의 태산 같은 등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프로 첫 룸메이트와의 인연의 연결 고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2001년 11월 일본 오키나와 LG 마무리 캠프에서 있었던 일이다. 선배는 그해 LG 유니폼을 입고 0.355의 고타율로 프로 네 번째 타격왕에 오른 ‘타격의 신’ 양준혁(49·MBC 스포츠+ 해설위원)이고, 후배는 LG 우선지명을 받고 마무리 캠프에 참가한 고려대 4학년 유망주 신인타자 박용택(39)이다.
 
양준혁이 LG 마무리 캠프에 참가했다가 부랴부랴 귀국 길에 오른 것은 갑자기 프리에이전트(FA) 취득 기간이 10년에서 9년으로 단축됐다는 소식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1993년 프로에 데뷔해 9시즌을 채운 양준혁은 FA 신청을 위해 한국행 비행기를 탔고, 결국 4년 27억2000만원이라는 당시 최고 대우 속에 친정팀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2018년 6월 23일 잠실구장. 앳된 후배는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베테랑이 돼 바람처럼 잠시 스쳐 만났던 선배의 전설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었다. 이날 롯데전에 3번 타자로 나선 뒤 1회 말 첫 타석에서 펜스 상단을 때리는 2루타를 날렸다. 2318호 안타. 선배가 보유하고 있던 한국 프로야구 역대 개인통산 최다안타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리고 4회 말 1사 1·2루에서 오른쪽 담장까지 총알처럼 굴러가는 2타점짜리 2루타를 터뜨렸다. 2319호 안타. 태산 같았던 선배를 뛰어넘어 새로운 역사를 빚어내는 순간이었다.
 
명창이 후계자를 한눈에 알아보듯, 후배는 과거 선배의 장담처럼 ‘틀림없이 좋은 타자’가 돼 있었다. 17년 전 자신의 도구를 ‘아낌없이’ 선물해 준 선배는 관중석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낸 후배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박용택은 한국 야구사에서 가장 안타를 많이 친 타자로 우뚝 섰다. 그동안은 선배가 만들어 놓은 이정표만 보고 달렸지만 이제부터는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고독한 표범처럼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외롭게 걸어 올라가야만 한다. ‘양신’을 넘어선 ‘택신’ 박용택. 그는 어떻게 안타왕이 됐을까. 9가지 키워드를 통해 그 비결을 들여다봤다.
 
 01. 약속택 | 28년 전 아버지와의 약속
 
“우리 학교에서 달리기 가장 잘하는 학생이 누구니?”
 
“박용택이요!”
 
“그럼 키 크고 운동신경이 가장 좋은 친구가 누구니?”
 
“박용택이요!”
 
1989년 11월. 서울 강동구 명일동 고명초교 야구부를 창단한 최재호 감독(현 강릉고 감독)은 야구부원 모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뭐든 묻기만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박용택”이었다.
 
“고명초교 야구부가 창단될 때 박용택이 가장 눈에 들어왔어요. 키도 제일 컸고, 발도 가장 빨랐고, 공부도 잘했고, 영리했죠. 어릴 때부터 깔끔하고 예쁜 스타일이었는데, 가정교육도 잘 받아 모범생이었어요. 원래 오른손잡이인데 우투 좌타를 시켰죠. 2루수 앞 땅볼만 때려도 1루에서 살았을 정도로 발이 빨랐으니까요.” 최재호 감독이 기억하는 박용택의 어린 시절 얘기다.
 
박용택은 “또래 친구들보다 키가 크고 달리기도 잘했던 것은 아버지를 닮아 성장이 빨랐기 때문”이라며 “중학교 1학년 때 키가 지금의 키였다”며 웃었다. 박용택의 아버지 박원근(72)씨는 실업농구 시절 엘리트 농구선수였다. 경희대와 한국은행에서 명가드로 활약하며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30대까지 선수생활을 하면서 장수했다. 그래서일까. 운동선수의 힘든 과정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아들이 야구선수의 길로 들어서는 걸 반대했다. 운동선수 남편을 뒷바라지했던 어머니는 공부 잘하는 아들이 운동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이 못마땅했다.
 
“최재호 감독님이 그 시절 등·하교 시에 저만 보면 붙잡아 앉혀놓고 ‘야구 하자’고 꼬셨어요. 아마 6~7개월을 따라다니셨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5학년이 되고 1990년 6월 3일 야구를 시작하게 됐죠. 공교롭게도 올해 2000경기 출장 날이 6월 3일이더라고요.(웃음)” 박용택은 28년 전 야구를 시작한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야구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어린 아들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한 번쯤 해본다는 생각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이제 야구를 하면 정말 야구선수로 들어가는 거다. 중간에 멈춰선 안 된다. 나중에 어른이 돼서 야구선수의 삶을 살아야 하고, 야구로 돈을 벌고, 야구로 가정을 꾸려야 한다”고 단단히 알렸다. 어린 박용택은 아버지와 약속했고, 아들은 28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순간도 그 약속의 끈을 놓지 않았다.
 
 02. 노력택 | 훈련에선 타협이 없다
 
“아버지는 직업 운동선수가 가져야 할 가치관이 확실한 분이셨죠. 아버지 친구분들 만나서 말씀 들어보면 아버지 같은 노력파는 없었다고 해요. 그런 독종을 못 봤대요. 아버지는 지금도 운동선수는 노력한 만큼 실력이 는다고 믿는 분이죠. 저도 어쩌면 그런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건지 몰라요.”
 
한때 박용택을 두고 “놀기 좋아하는 선수”라는 오해의 딱지가 붙었던 적이 있다. LG가 10년 연속 가을잔치에 나가지 못할 때 암흑기의 원흉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박용택의 외모만 보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의 얘기였다.
 
“저는 솔직히 말해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야구를 즐기면서 해본 적이 없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남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아버지의 주입식 교육이 저에게 영향을 많이 미쳤죠. 중학교 1학년, 2학년 때도 열이 39도씩 올라가고 몸살감기가 나더라도 연습은 다 하고 집에 왔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나이에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야구를 즐겼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제 성격 자체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다시 태어나면 야구를 안 해요. 이렇게 노력하면 뭘 해도 잘하지 않겠어요?” 박용택은 자신을 ‘재능형’보다는 ‘노력형’이라고 분류했다.
 
신인 시절부터 박용택을 쭉 지켜본 LG 유지현(47) 수석코치는 “늘 한결같다”며 “단 한 게임도 소홀히 대하는 것을 못 봤다. 나이가 들면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어디가 뻐근하면 뻐근하다고 훈련하지 않을 핑계를 찾기 마련인데 박용택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자기가 해야 할 훈련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후배들에게 훈련부터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야구를 귀하게 대한다고 할까? 그런 자기 관리와 꾸준함이 있으니까 이 나이가 되도록 그 흔한 햄스트링 부상조차 없이 롱런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03. 자존택 | 후불제 계약 성사시킨 당돌한 신인
6월 23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롯데전에서 통산 최다안타 신기록을 세운 박용택이 양준혁과 포옹하고 있다. [LG트윈스]

6월 23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롯데전에서 통산 최다안타 신기록을 세운 박용택이 양준혁과 포옹하고 있다. [LG트윈스]

 
“2억3000만원이요? 저는 이 금액에 사인 못합니다.”
 
“아니 구단이 그렇게 책정했는데 무슨 수가 있겠느냐.”
 
2001년 가을, 입단 계약금을 놓고 LG와 줄다리기를 벌이던 고려대 4학년 박용택은 좀처럼 도장을 찍지 않았다. 당시 계약 협상을 벌이던 LG 유지홍 스카우트는 햇병아리 신인과 씨름을 해야 했다.
 
“어떻게 제가 서승화 계약금 반 토막도 안 됩니까?”
 
“서승화는 왼손 투수이고 시속 150㎞짜리 강속구를 던지는 유망주야. 메이저리그에서도 데려가려고 하니까 5억원을 책정한 거고.”
 
“그럼 제가 계약금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
 
고려대 직속 선배이기도 한 유 스카우트는 ‘임자 제대로 만났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마무리 캠프에 가서 김성근 감독님 앞에서 실력을 보여줘라. 감독님이 주전으로 쓸 수 있는 선수라고 인정하면 올려 줄게”라고 제안했다.
 
“그럼 마무리 캠프 끝나고 다시 평가해 주세요. 구단이 그때 저를 1000만원짜리 선수라고 판단하면 저도 1000만원만 받겠습니다. 대신 3억원짜리 선수라고 평가하면 3억원 주세요.”
 
박용택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당돌했다”며 “신인이 계약도 안 하고 마무리 캠프에 가는 것도 이례적인데, 사실 그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캠프에 가서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매일매일 혼을 실어 훈련했던 것 같다”고 돌이켰다.
 
2001시즌 후 정식으로 LG 사령탑에 오른 김성근 감독은 오키나와 캠프가 끝나자 12월에 선수단을 이끌고 제주도로 넘어가 훈련을 이어갔다. 그때 김 감독은 박용택을 불러 “너 왜 계약 안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며칠 후 유지홍 스카우트가 왔다. “너 감독님이 곧바로 쓰겠다고 하니까 7000만원 올렸다”며 웃었다. 계약금 3억원. LG 역대 야수 역사상 3위에 해당하는 계약금(1위는 1997년 이병규 4억4000만원, 2위는 1998년 조인성 4억2000만원)이었다.
 
프로야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후불제 계약’. 그런 자존심이 있었기에 수많은 별이 뜨고 지고 사라지는 험난한 프로야구 세계에서 박용택이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때부터 프로였다.
 
 
04. 열정택 | 발가벗고 달밤에 스윙하는 남자
 
 
“LG 시절 원정경기를 마치고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을 때였다. 난 배가 출출해서 우동을 사먹으러 갔다 왔는데, 박용택은 버스에서 방망이를 가지고 내리더니 혼자 달빛 아래에서 스윙을 하고 있더라.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까지 야구를 하고 있는 박용택이 결국 가장 강한 자다.” 박용택과 입단 동기인 안치용(39) KBSN스포츠 해설위원의 얘기다.
 
‘훈련벌레’ 박용택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수없이 많다. 박용택이 양준혁을 넘어 역대 개인통산 최다안타 신기록을 작성한 날 그는 LG 전력분석팀 서인석 선임에게도 고마움을 전했다. 이유가 있었다. 서인석 전력분석원은 휘문중·고 4년 후배로 2001년 한화에 육성선수로 입단했다가 2007년부터 LG에서 다시 한솥밥을 먹게 됐다. 불펜 포수에서 시작해 지금은 전력분석 파트 선임 위치까지 올랐는데,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든든한 숨은 조력자였기 때문이다. 서인석 전력분석원의 얘기를 들어보자.
 
“원정 호텔에서 샤워를 하다 타격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면 오밤중에도 제가 편하니까 방으로 불러요. 반창고나 휴지를 탁구공처럼 말아서 던져 달라고 해요. 발가벗은 알몸 상태에서 방망이를 돌리는 거죠. 달밤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스윙하는 걸 남들이 본다면 미친 사람 같을 겁니다. 영감이 오면 자다가도 스윙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에요.”
 
다른 얘기도 들려줬다. “박종훈 감독 시절이었는데, 당시 외야에 빅5(이병규-박용택-이택근-이진영-이대형)가 포진해 플래툰(상대 투수 유형에 따른 선수 기용방식)을 돌릴 때였어요. 성적이 부진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쉬는 월요일에 친구들을 좀 데리고 구리(당시 2군 훈련장)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주변에 박용택 좋아하는 일반 친구들을 수소문해서 데리고 갔는데, 그 한여름 대낮에 제가 2시간씩 배팅볼을 던져 줬어요. 용택이 형은 팬티만 입고 방망이를 돌리고, 친구들은 외야에서 공 받고…. 그런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늦은 나이에도 6년 연속(2012~2017년) 150안타 이상 치고, 역대 최다안타까지 간 게 아닐까 싶어요.”
 
 05. 고집택 | 고집 없는 성공은 없다
 
박용택은 KBO리그 최다안타 신기록을 작성한 뒤 “세상에 한 명의 스승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김용달 코치”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용달 코치가 LG에서 자신을 지도할 때는 충돌이 잦았다. 둘 다 타격에 관해 누구보다 많이 고민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양보가 없었다.
 
김재박 감독 시절이던 2008년 여름, 세상이 온통 베이징올림픽 야구 금메달로 흥분해 있을 때였다. 박용택은 당시를 돌이키며 “솔직히 난 베이징올림픽 야구를 단 한 경기도 보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해 타율 0.257(334타수 86안타)로 생애 최악의 성적에 그쳤다. 프로 데뷔 후 매년 세 자릿수 안타를 때려냈지만 유일하게 이빨이 빠진 것처럼 그해 100 안타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자존심이 상했어요. 난 여기서 뭐하고 있나 싶어 TV도 못 보겠더라고요.”
 
김용달 코치는 “박용택은 당시 빠른 배트 스피드와 힘으로 타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김 코치가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타구가 오른쪽으로 많이 치우쳤다. 배트 헤드가 ‘인→아웃’이 돼야 하는데 ‘아웃→인’이 될 때가 많았다. 나는 임팩트 순간 센터(중견수)를 기준으로 방망이가 90도가 되는 게 이상적이라면서 박용택 스타일상 외야 어디로든 타구를 날릴 수 있는 스프레이 히터가 좋다고 했다. 좌중간을 보고 치라고 주문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리그가 재개된 8월 어느 여름날, 김용달 코치는 야간경기 후 박용택을 이끌고 잠실구장 실내훈련장으로 향했다. 노란색 플라스틱 박스에 담긴 공을 한 박스(250~300개의 공이 담겨 있다)나 쳤다. 김 코치가 훈련을 끝내려고 돌아서는 순간 박용택이 “한 박스 더 치겠습니다”고 소리쳤다. 2박스, 3박스, 4박스, 5박스…. 오히려 김 코치가 속으로 ‘내일 게임도 있는데’라면서 걱정했지만 박용택은 “코치님이 치라는 대로 계속 치겠습니다”며 고집을 피웠다. 김 코치도 오기가 생겨 말없이 계속 공을 올렸다. 10박스쯤 쳤을까. 시계는 어느덧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 코치 역시 박용택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난 코치와 선수가 이론을 놓고 충돌하는 것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성공한 선수는 모두 고집이 있다. 과거 심정수도 그랬고, 송지만도 그랬다. 선수가 코치 얘기를 무조건 수긍한다고 해서 소통이 아니다. 코치가 선수 얘기를 무조건 들어 준다고 해서 소통이라고 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의견을 놓고 정반합을 찾아가는 게 진정한 소통 아니겠나. 나 역시 박용택이 그렇게 나와 충돌을 했는데도 최다안타 신기록을 수립하는 순간 나를 멘토라고 말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싸우면서 정든다’고 하지만 이 둘의 관계를 보면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
 
06. 실패택 | 대나무는 마디가 있어 성장한다
 
안치용 위원은 박용택의 성공 비결에 대해 역설적으로 “실패를 두려워하는 선수가 아니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통 선수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새로운 변화와 도전을 주저하지만 박용택은 실패를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를 갖추고 있다. 도전과 변화에 대한 용기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박용택이 먼 훗날 지도자가 된다면 자신이 잘한 부분을 지도하는 게 아니라 실패한 부분을 경험을 통해 알려줄 수 있는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박용택은 친구의 얘기에 “나만큼 실패를 많이 해본 타자도 없을 것이다”고 수긍했다. 홈런을 치기 위해 몸을 불리다가 실패를 맛보기도 했고, 다시 교타자로 돌아가면서 실패하기도 했다. 2000년대까지는 끊임없이 본인의 야구 색깔을 찾기 위해 시행착오를 겪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런 실패의 시간이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는 “웬만한 선수는 프로에서 실패하면 기회조차 없어지는데, 나만큼 실패를 많이 하고 다시 기회를 부여받은 선수도 드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난 행운아”라며 웃었다.
 
박용택이 실패 속에서도 기회를 계속 잡은 것은 툴(Tool)이 많은 선수였기 때문이다. 2005년 ‘도루하는 4번 타자’라는 평가 속에 도루왕(43개)을 차지한 것이 대표적이다. 장타자로 실패하면 교타자로, 교타자로 실패하면 발이라는 강점을 살릴 수 있었다.
 
“누구보다 실패를 많이 하다 보니 면역이 생겼죠. 그러다 보니 변화와 도전이 두렵지 않더라고요. 타격의 매력에 대해 묻는 분이 많은데 저는 이렇게 말해요. 타격은 실패가 많은 게임이라 더 매력적이라고. 3할에 성공한다면 7할은 실패하는 거잖아요. 성공확률이 낮기 때문에 안타를 쳤을 때 희열의 크기가 더 크죠.”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했다. 대나무 마디는 겨울을 나며 생긴 흔적이지만, 대나무는 그 상처 같은 마디를 딛고 자라는 법이다.
 
 
07. 준비택 | 준비를 위한 준비
 
“타격폼만 수십, 수백 가지입니다.”
 
LG 신경식(57) 타격코치는 박용택에 대해 “투수에 따라 다르고, 같은 투수라도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른 타법을 구사한다. 횟집 사장님이 생선에 따라 회를 두껍게 뜨기도 하고, 얇게 뜨기도 하듯 박용택은 그때그때 다른 타법을 들고 나간다”며 혀를 내둘렀다. “스탠스를 넓게 벌리기도 하고 좁히기도 한다. 노스텝으로 치기도 하고, 테이크백을 조금씩 달리 변화시킨다”며 “다른 팀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LG 오고 나서 왜 잘 치는지 확실히 알게 됐다”고 말했다.
 
박용택은 야구만 잘할 수 있는 길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미국 야구, 일본 야구 가리지 않고 잘 치는 타자들의 타격폼을 연구하고 따라 해본다. 후배들에게 묻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김현수는 “선배님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시는 분 같다. 트렌드에 맞춰 가려고 정말 연구를 많이 한다. 나한테도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어떤 훈련을 하는지, 연습 방법은 어떤 것이 있는지 묻곤 하신다”고 말했다. 이런 ‘불치하문(不恥下問)’의 자세는 시대의 흐름에 대응하고 세월과 싸워 나가는 박용택의 밑천 중 하나다.
 
“타자는 타석에 투수를 이기기 위해 들어가지만 수동적인 존재죠. 투수가 던지는 공의 변화를 따라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타격에 관한 기본기와 정석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그런 게 있다면 4할을 치고, 5할도 치는 타자가 나와야죠. 세상에 똑같은 타격폼은 없어요. 같은 타자가 쳐도 타이밍에 따라 다 달라요. 결국 타자는 어떤 공을 만나든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미리 준비하는 게 중요하죠. 그게 수십 개인지, 수백 개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집에 소장하고 있는 안경만 해도 수십 개에 달한다. 야구장에 올 때도 여러 개의 안경을 들고 나온다. 박용택은 이에 대해 “모자란 사람이 그런 거에 의지하고 싶은 거다”며 웃더니 “훈련을 하거나 경기를 하다가 안경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나. 안경을 여러 개 준비하는 것도 경기를 잘하기 위한 준비 중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08. 루틴택 | 구도자로 사는 법
박용택-한진영 커플의 웨딩포토. 두 사람은 2005년 12월 백년가약을 맺었다. [LG 트윈스]

박용택-한진영 커플의 웨딩포토. 두 사람은 2005년 12월 백년가약을 맺었다. [LG 트윈스]

 
일본인 스즈키 이치로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1278안타, 메이저리그에서 3089안타를 친 ‘안타 제조기’다. 합쳐서 4367개의 안타를 생산했다. 그는 선수 생활 내내 마치 구도자처럼 자신만의 루틴(routine)을 지키며 전설을 써내려 갔다. 홈경기 때는 아침에 카레라이스를 먹고, 방문경기 때는 페퍼로니 피자를 먹었다. 경기 4시간 전에 야구장에 도착하고, 발 마사지를 하고 스파이크를 닦는다. 그라운드에 나가 훈련하는 모습이나, 타석에 들어간 뒤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동작들은 선수생활 내내 한치 흐트러짐도 없이 이어졌다.
 
박용택은 오후 6시30분에 시작되는 홈경기 때면 보통 오전 11시쯤 일어난다. 식사를 하고 오후 1시쯤 잠실야구장에 도착한다.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스케줄에 웨이트트레이닝이 없는 날이면 마사지를 받는다. 언론 인터뷰 시간도 정해져 있다. 오후 2시30분~3시 사이다. 박용택은 프로야구 선수 중에서도 인터뷰를 잘하는 프로 중의 프로지만 홈경기 때는 경기 준비와 자신만의 루틴을 지켜야 하기에 장시간의 인터뷰는 하기 힘든 선수로 꼽힌다(이번 월간중앙 인터뷰도 1시간 만으로 허심탄회한 내용을 다룰 수 없어 휴식일에 전화로 보충 인터뷰를 해야만 했다).
 
3시부터는 타격훈련을 비롯한 단체훈련을 한다. 그리고 라커룸에 들어가서 가볍게 식사를 하고 반드시 30분가량 쪽잠을 잔다. 그는 “잠이 오지 않더라도 눈을 감고 있으면 피로가 풀리고 경기 때 집중력이 좋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왜 이렇게 수도승 같은 삶을 살아갈까.
 
“이치로만큼 철저하게 루틴을 지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방망이 감이라든지, 몸 상태라든지, 눈 피로도라든지 최상의 경기력이 발휘되도록 나만의 준비를 하는 거죠. 나이가 들면서 루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 같아 간소화하고 있어요. 그러나 지금도 자기 전에 반드시 지키는 루틴은 있어요. 다음 날 선발투수가 발표되면 방망이를 들고 그 투수를 상상하며 타이밍을 그리는 작업이죠. ‘이렇게 타이밍을 맞추면 되겠어’라는 그림이 그려져야 잠을 자요. 그 투수를 상대로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플랜이 없으면 잠을 못 자요.”
 
09. LG택 | LG는 나의 운명
박용택은 1996년 제30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휘문고 2학년 때의 박용택.

박용택은 1996년 제30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휘문고 2학년 때의 박용택.

 
 별명이 많기로 유명한 박용택에게 붙은 별명 중 ‘눈물택’이 있다. 감수성이 예민해 감동적인 장면이나 고마운 이름이 나오면 남자의 체면 무시하고 울먹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다. 최다안타 기록을 깬 날 양준혁을 야구장으로 초대해 90도로 인사했다.
“17년 전 오키나와 캠프에서 첫 룸메이트로 인연을 맺었던 양준혁 선배가 준 선물 중에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게 있어요. 2㎏이 넘는 연습용 방망이죠. 가끔씩 타격이 안 될 때 그 무거운 배트를 휘두르면서 기를 받곤 해요. 신인 때는 주전이 목표였지만 사실 특별한 목표 없이 앞만 보고 달렸어요. 그런데 두 번째 FA가 되는 순간 양준혁 선배의 안타(2318안타) 기록이 제 야구 인생의 1차 목표가 됐어요. 선배는 무심코 한 말이었는지 모르지만 17년 전 캠프를 떠나면서 제게 ‘좋은 타자가 될 거다’라고 해주신 그 한마디는 큰 용기를 심어줬어요. 그 선배 앞에서 제가 선배의 기록을 넘어섰으니 영광이죠.”
 
세월은 바람개비처럼 돌았고, 양준혁의 전설도 역사의 저편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양준혁은 “내 안타 기록이 영원불멸의 기록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난 하나의 다리가 돼 준 걸로 만족한다”며 “17년 전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 박용택이라는 좋은 타자가 3000안타를 꼭 쳤으면 좋겠다. 난 3000안타를 이루지 못했다. 박용택을 통해 대리만족하고 싶다. 박용택 역시 누군가에게 목표가 되고 다리가 돼주지 않겠나. 내가 박용택 안타 신기록 순간에 현장에 가서 축하해줬듯이, 박용택도 훗날 자신의 기록을 넘어서는 후배에게 축하를 해주면 좋겠다. 우리도 이런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나에게 신기록 순간 꽃다발을 받고 싶다고 잠실로 초대해준 박용택이 고마웠다”고 말했다.
 
박용택에게 남은 목표는 무엇일까. 그는 “이제 LG 우승과 3000안타”라고 말했다. ‘어떤 게 2차 목표냐’고 묻자 “당연히 우승이 먼저다”고 했다. “3000안타를 기록한다면 눈물이 안 날지 몰라도 LG가 우승한다면 지금까지 흘렸던 눈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릴 것 같아요. 다시 말하지만 LG 우승하기 전까지는 저 은퇴 못합니다.”
 
그는 야구를 하기 전부터 LG 전신 MBC 청룡 팬이었다고 했다. 서울팀이기도 했고, 이름에 용용(龍)자가 들어가 더더욱 끌렸다고 한다.
 
“1990년 제가 처음 야구를 시작할 때 LG가 청룡을 인수해 첫 우승을 했어요. 당시만 해도 제 주위 친구들은 다 LG 팬이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 LG와 OB가 번갈아 고졸 우선순위를 뽑았는데 LG가 때마침 그해 우선순위 차례였고 저를 선택해줬어요. LG 야구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저는 그 꿈을 이뤘죠. LG는 운명입니다. 저만큼 야구 하고 싶은 팀에서 그 팀 유니폼만 입고 이렇게 오래 야구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겠죠. 전 복 받았어요. 그런데, 그런데, 우승을 해야 하는데….” ‘울보택’은 우승을 말하는 순간 다시 목이 메는지 말을 잊지 못했다. 야구 인생의 모래시계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우승에 대한 간절함의 크기는 더 커지고 있다.
 
노송(김용수)도, 야생마(이상훈)도, 적토마(이병규)도 모두 떠나간 잠실벌. 그는 LG 팬들의 마지막 자부심이다. 그리고 어쩌면 마음 둘 곳 없는 LG 팬들의 황량한 가슴을 채워주는 마지막 애틋한 이름인지 모른다. ‘안타택’ ‘기록택’ ‘역사택’ ‘전설택’…. 그가 바로 줄무늬 유니폼의 심장 ‘LG 박용택’이다.
 
이재국 MBC 스포츠플러스 ‘야구중심’ 전문패널 keystone7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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