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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제도 개편, 기존 지식에 대한 반성적 사고에 답 있다

빠른 삶, 느린 생각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요구되는 것은 일반론보다 구체적인 사항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저런 구체적 대안에 끌려, 문제의 큰 테두리를 잊어버릴 수가 있다. 그리하여 문제와 해답의 저 편에 놓여 있는 근본적인 목적 또는 삶의 근본적인 지향을 놓쳐버린다.
 
요즘 교육제도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대학의 입시제도 또는 특별한 성격의 고등학교의 특권적 성격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교육의 큰 문제들이 해소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교육의 근본에 대한 고려가 사라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자명하다고 할 수 있는 근본적 전체를 돌이켜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근본적인 주제를 생각하는 일은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와 정치의 많은 정책적 결정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질 수 있다.
 
우선 이 큰 함축을 잠깐 생각해본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다원적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이 반성적 사고라고 말한 일이 있다. 마르크시즘에서 출발했지만, 그가 지향한 것은 민주주의의 체제 안에서 사회적 균형이 실현되는 사회이다. 그것은 오늘날 많은 사회가 포용하고 있는 사회 정치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참으로 토론과 숙의에 입각한 사회의 기초에 그러한 반성적 사고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사고 능력은, 감성 교육 또는 정치적 구호로 전락한 용어를 사용하건대, ‘인성 교육’의 틀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교육 목표는 지식 습득과 인간 형성
 
반성적 사고는 쉽게 눈에 띄는 인간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의식화되지 않으면서 문화의 지평을 이룬다. 그러면서 많은 사회적 작업은 이 지평에 들어있는 전체적인 지향을 함축한다. 그러기에 그것은 의식적 설명으로 재확인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지평을 재확인하는 일 또는 현실 전체를 재확인하는 일은 인간 현실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기 쉽다. 그러기 때문에, 한 가지 더 설명을 보탠다면, 반성적 사고는 그 자체에도 적응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반성의 반성을 포함하여야 한다. 이 복합적 과정은 불필요한 사변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사고가 독단(獨斷)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너무 거창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여기의 글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교육에 대한 원론적 전제들, 특히 대학 입시와 고등 교육부분에 전제된 사항들을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교육은 지식습득과 인간 형성을 목표로 한다. 지식의 측면에 한정하여 말한다면 기술 습득과 연마, 일정 범위에서의 삶의 정보 학습, 그리고 반성적 사고 능력의 함양을 목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중 가장 막연하고 불확실한 것이 반성적 사고의 능력이다. 반성적 사고의 근본은 물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되돌아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사고의 경위를 되돌아보는 것인데, 그것은 추론이 합리적 절차를 따랐는가를 되돌아보는 일이고, 여러 관련 사항들을 두루 참조하였는가를 검토하는 일이다. 또 하나, 당면한 문제를 사회와 삶의 전체적 지향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일이다.
 
반성적 사고는 그 외에도 사실적 과제를 처리하는 데에도 중요한 동인(動因)이 된다. 주어진 과제와 그에 대한 믿을 만한 해답은 문제와 해답 두 항목 사이의 자동적인 연계의 보류 그리고 재고(再考)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반성은 사고가, 머리에 자동적으로 연계되어 각인된 문답사항을 잠깐 멈추고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말하자면 거기에 사고의 휴지(休止)가 필요한 것이다. 바른 사고는 이 사고의 휴지(休止)를 동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어느 경우에나 진정한 반성은 반성의 반성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사고의 한없는 연속을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고가 현실을 스치면서 무한과 초월의 차원에 근접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보면, 초월적인 차원 앞에 묵묵하게 멈추어 서는 것이 반성적 사고이다.
 
인공지능의 발달이 인간 사고의 많은 부분을 대체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 인공지능은 사고에 작용하는 여러 요인들을 빠른 속도로 연결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연결의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그 움직임을 중단할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한 연결을 총 망라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이 초월적인 것에 이르면서 멈추는 일은 없지 않을까 한다.
 
 
교양 교육은 내면의 발견과 수련 담당
 
또 하나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열림, 즉 반성적 사고가 무한성 그리고 초월성에 열리는 것은 사고의 주체적 자각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반성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것이고 그것은 저절로 주체적 자각에 관계되게 마련이다. 이것은 반성적 사고의 소재지(所在地)를 확인하는 것으로, 진정한 사고의 수련은 교육자나 피교육자가 내면의 발견과 수련으로 얻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교양 교육은 이러한 내면의 발견과 수련을 담당한다.
 
오래전부터 교육과 관련하여 창의성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아 왔다. 이것은 흔히 기술 그리고 경제 또는 ‘문화 콘텐트’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발명에 연관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참으로 반성적인 사고는 그러한 기존의 가치와 목적의 테두리를 벗어난다. 과학이나 문예에 있어서 참다운 혁신은 그러한 창의성으로 간단히 규정되지도 아니하고 정당화되지도 아니한다. 진정한 창의성은 기성의 지식 체계를 넘어간다. 또는 그것에 기초한 경우라도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예외적인 인간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교양 교육이 기존의 지식 체계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교양은 궁극적으로 배움에 추가하여 주체 안에 일어나는 깨우침을 요구한다. 깨우침은 학습을 넘어가는 여유 속에서 일어난다.
 
전통적으로 인간 계몽을 지향하는 교육은 사고 능력 그리고 전체적인 감성과 지성의 가능성을 해방하는 교양 교육을 그 기초로 삼았다. 서양에서의 전통적 대학 교육이 일단 교양 교육을 기초로 한 것은 이러한 이유로 인한 것이다. 더 전문적인 지식 정보의 습득과 기술적인 연마를 필요로 하는 교육은 교양 교육이 끝난 다음에 시행되었다. 물론 인간성 개발을 기초로 한 다음의 전문교육이 아니라 그것을 지나쳐 가는 전문 교육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 나라에서 대체로 전문화된 고등학교, 전문대학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산업 경제의 압도적 지배하에서 이러한 양분된 교육 제도가 사라지고 직업 교육으로 통일되어 가는 것이 오늘의 세계 현실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 이것은 특히 너무 쉽게 수용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산업 사회의 가치에 지배되는 지적인 작업에서 인간의 사고 능력 그리고 이성적 인간 능력의 모든 것이 실현된다고 할 수는 없다. 진정한 지적 탁월성은 그것을 넘어 또는 그 바깥에 존재한다.
 
 
지식 전달만으로 인간성 함양 어려워
 
사실 뛰어난 사람들은 반드시 학교 교육에 충실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 이후 우리나라에서 명성이 높아진 19세기 미국의 사상가 헨리 조지는 마르크스와는 다른 각도에서 토지 보유 문제를 비롯하여 자본주의에도 적용될 수 있는 정당한 분배의 이념과 정책 제안을 남겼다. 존 듀이는 그를 플라톤 이후 손꼽을 만한 사상가라고 평가하였다. ‘흙수저’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헨리 조지도 고등학교를 중단하고 선원(船員), 인쇄공, 신문인 등의 직업을 두루 거치면서 저술가로 성장하여 『진보와 빈곤』 등의 중요한 저서와 논문 등을 내놓았다. 과학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물론,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의 탁월한 문학인들은 대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미국의 교육을 말하면서 한국의 교육을 좋은 모범으로 들었다. 한국의 근대화 그리고 민주화가 그 교육열에 깊이 관계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사항일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는 교육이 국가의 인간적 능력을 키우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 자체로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성 함양에, 그리고 깊이 있는 전문적 지식의 획득에 이어지고 정치와 정책의 바른 지향과 실천에 자산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입시 경쟁에서 보는 바와 같은 지적 정보와 그 계산에 치중하는 교육이 참다운 인간적 사회와 정치의 기초가 될 수는 없다. 대학 입학시험이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맹렬한 지식추구를 촉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촉구로 조장되는 학문에 대한 태도가 진정한 의미에서 학문의 정신이 되지는 아니할 것이다. 입학시험은 지적 능력의 소유자를 선발하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비슷한 능력의 학생과 그 가족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해소하는 편의 수단이다. 다시 대학 입시와 관련하여 교육제도의 여러 면에 대한 새로운 제도들이 논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참으로 깊은 사고의 능력과 인간성의 함양 그리고 사고의 과정에 관련된 여러 사항들과 그 전체적인 의의를 고려하는 것이 되기를 희망해본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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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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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