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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북에 ‘불변의 3가지’ 약속 … 중국판 체제보장인가

오영환의 외교노트
지난 5월 7~8일 2차 방중한 김정은 북한 국0무위원장(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랴오닝성 다롄의 휴양지 방추이다오 해안가를 거닐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지난 3월 말 이래 세 차례 걸친 김정은의 방중으로 북·중 양국은 관계 복원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5월 7~8일 2차 방중한 김정은 북한 국0무위원장(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랴오닝성 다롄의 휴양지 방추이다오 해안가를 거닐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지난 3월 말 이래 세 차례 걸친 김정은의 방중으로 북·중 양국은 관계 복원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중앙포토]

북·중 관계는 오묘하다. 사회주의 형제 국가이면서도 전통적 주종(主從) 의식이 어른거린다. 사회주의 공동체 이데올로기와 조공(朝貢)의 역사, 접경, 국력 차의 지정학이 씨줄 날줄로 얽혀 있다. 북·중은 일제 항일 시기와 국민당·공산당(국공) 내전기의 동지이자 한국전쟁의 혈맹이다. 중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나라는 북한밖에 없다. 하지만 서로 간에는 전략적 불신이 교차한다. 양자 관계는 전통 계승과 변화, 밀월·유착과 긴장·갈등의 이중주다. 지구상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특수 관계다. 그 원점은 마오쩌둥(毛澤東)과 김일성에서 비롯됐다.

 
김일성이 일으킨 6·25전쟁은 마오의 전쟁이기도 했다. 항미원조(抗美援朝) 기치 하의 1950년 10월 중국군 참전은 마오가 밀어붙여 이뤄졌다. 북·중은 전선에서 밀리자 그해 12월 작전을 일원화하는 연합사령부도 구성했다. 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 중국군지원사령관이, 부사령관은 북한군 참모장 김웅이 맡았다. 현재의 한미연합사와 같은 구조다. 펑은 53년 정전협정의 중국 측 서명자다. 전쟁을 통해 북·중 당·군부 간에 두터운 파이프가 형성됐다. 인맥은 북한에 양날의 칼이었다. 원조의 버팀목이었지만 내정 간섭의 끈이기도 했다. 56년 북한 내 ‘8월 종파 사건’ 당시 친중 연안파(延安派) 숙청에 대한 중국의 간섭은 대표적이다.

 
 
중국은 원조와 내정 간섭 ‘양날의 칼’

 
1958년 11월 방중한 김일성 주석(왼쪽)이 마오쩌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1958년 11월 방중한 김일성 주석(왼쪽)이 마오쩌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마오의 참전은 김일성에 대한 보은(報恩)이기도 하다. 58년 11월 김일성의 방중을 맞아 인민일보가 게재한 기사는 특기할 만하다. 북벌(北伐), 장정(長征), 항일, 국공 내전을 언급하면서 “조선 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생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중국 혁명과 중국 인민의 해방 사업을 원조한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북·중 관계를 두고선 “순치(脣齒·입술과 이)” “행복과 불행을 함께하는 관계”라고 표현했다. 중국은 김일성 방중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30만 명의 베이징 시민이 가도에서 징과 북을 치고 폭죽을 터뜨렸다. 김일성은 이듬해 9월 말 중국 건국 10주년 직전 인민일보에 장문의 기고를 했다. “북·중 양국 인민은 친근한 형제”라며 “양국 인민의 운명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한국전과 전후 복구 시기의 중국 지원을 상세히 나열하고 사의를 표했다. 김일성은 생전에 40여 차례 방중했다.

 
마오와 김일성 간에는 불신도 적잖았다. 1956년 11월 30일 베이징 중난하이 마오의 집무실. “김일성이 보기에 우리는 신통력이 없고, 다른 곳에 있는데 그게 바로 유엔이다.” 마오는 파벨 유딘 주중 소련 대사를 만나 김일성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북한이 한반도 통일과 정전체제 문제 논의를 위해 유엔 총회에 참석하려는 움직임을 두고서다. 마오는 김일성이 정전협정 서명국인 중국의 영향력을 벗어나 유엔 참전 16개국과 직접 협의하려는 시도에 극력 반대했다. 마오는유딘에게 김일성이 헝가리의 임레 너지 총리의 노선을 펼 가능성이 있다고도 했다. 너지는 그해 10월 말 헝가리 민주화 봉기 당시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 중립화를 선언했다가 소련군에 체포돼 처형됐다. 마오는 “너지는 (사회주의 진영 이탈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김일성은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60년. 중·소 분쟁이 본격화하자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주북한 소련대사에 당시의 마오 발언 기록을 김일성에 보여주라고 지시했다. 김일성은 기록을 보고 “이것은 거짓말”이라고 중얼거린 뒤 큰 소리를 질렀다. “중국 지도자는 앞에서 하는 얘기와 뒤에서 하는 것이 다르다.” (『최후의 천조(天朝)』, 선즈화) 이 일화는 정전협정에 대한 중국의 당사자 의식이 뿌리 깊다는 것을 일러준다.

 
 
김정일 때 경제 종속 심화로 불신 커져

 
1983년 6월 후계자 시절의 김정일(오른쪽)이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과 환담하는 모습. [연합뉴스]

1983년 6월 후계자 시절의 김정일(오른쪽)이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과 환담하는 모습. [연합뉴스]

김정일 시기의 북·중 관계는 엷어졌다. 상대화하고 왜소해졌다. 냉전 붕괴와 한·중 수교의 여파가 컸다. 반면 북한 경제의 중국 종속 현상은 심해졌다. 덩달아 북한의 불신도 커졌다. 북한이 2006년과 2009년 1, 2차 핵실험을 하면서 양자 관계는 삐걱거렸다. 김정일은 정치국 상무위원의 후계자이던 83년 6월 처음 중국을 찾았다. 94년 집권 이후론 2000년 5월 이래 모두 8차례 방중했다. 북·중 정상회담은 김일성 시기의 친밀도나 접착력에 미치지 못했다. 2000년 1차와 2001년 2차 김정일·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간 회담은 대(代)를 이은 친선을 강조했지만 형제적 관계를 언급하지 않았다. 노동신문은 “동지적이며 따뜻하고 친선적인 분위기 속에서” 회담이 진행됐다고 전했다. 이 표현은 김정일·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간 회담에도 사용됐다. 북·중 특수 관계가 보통 관계로 바뀌고 있는 점을 상징하는 변화다. 동지는 피를 나눈 형제와 다르다. 김정일의 중국 불신은 컸던 것 같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그 사람들의(중국인들의) 경제 전략이 영토나 제도나 경제 분야에서는 동북 3성(省)이 아니라 북을 염두에 두고 동북 4성으로 생각한다”고 경계를 나타냈다.

 
김정은의 올해 3차례 방중은 극적인 반전이다. 김정은 집권 이래 2012~2017년 북·중 관계는 최악이었다. 북의 4차례 핵실험·미사일 시험 발사와 중국의 유엔 대북 제재 동참이 파열음을 냈다. 김정은 방중은 북·중의 갈등 기류를 바꿔놓았다. 올 3월, 5월, 6월의 3차례 방중 기간 시진핑과 김정은 발언은 마오쩌둥과 김일성 시대의 북·중 밀월을 연상시켰다. 김정일과 장쩌민·후진타오 시기와는 결이 달랐다. 시진핑은 1차 방중 때 “북·중 친선은 피로써 맺어진(鮮血凝成) 친선으로 세상에 유일무이하다”고 했다. 시진핑이 집권 이래 북·중 혈맹을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김정은은 “북·중 인민은 자기들의 운명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체험했다”며 “북·중 친선은 나의 숭고한 의무”라고 했다. 2차 방중 때 시진핑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북·중은 운명공동체, 순치의 관계로 정세가 어떻게 흐르든 관계를 공고히 발전시키겠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3차 때 시진핑은 ‘변하지 않는 세 가지(三個不會變)’를 약속했다. ①북·중 관계 발전에 대한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지지 ②북한 주민에 대한 중국 인민들의 깊은 우의 ③사회주의 북한에 대한 지지다. 중국판 대북 체제보장이라 할 만하다. 김정은은 2, 3차 방중에서 “혈연적 유대” “한집안 식구처럼 고락을 같이하며” “중국 동지들과 한 참모부에서 긴밀히 협력하고 협동하겠다” 등을 언급했다.

 
 
중국의 한반도 문제 개입 정당화

 
김정은 2018년 3차례 방중

김정은 2018년 3차례 방중

김정은 방중으로 1961년 7월 체결한 북·중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이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양국은 이달 초 평양과 베이징 주재 대사관에서 조약 체결 57돌 기념 연회를 열었다. 연회 개최는 5년 만이다. 7개 조항의 이 조약 핵심은 쌍방이 침략을 받았을 때의 군사적 자동 개입(제2조)이다. 이 조항 폐기설은 90년대부터 돌았고, 2014년 류젠차오(劉建超) 당시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차관보급)도 “북·중이 군사동맹 관계에 있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순치’‘한 참모부’ 등 표현이 등장하면서 제2조가 작동되고 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이 조약은 중국의 한반도 문제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다”며 “자동개입 조항은 인정된다”고 말했다. ‘한 참모부’ 발언에 대해선 “북한에서 노동당을 혁명의 참모부라고 하는 만큼 당 대 당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뜻으로, 광의로 해석하면 군사 협력도 포함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재흥 세종연구소 연구위원도 “자동 개입조항이 유효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반면 수사(修辭)의 함정을 경계하는 시각도 있다. 정재호 서울대 교수는 “북·중 간 전략적 불신은 미·중 간 불신만큼이나 심하다”며 “양국 움직임은 한·미에 몸집을 부풀려 보여주기 위한 ‘복어 작전’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과거 중소 분쟁 시기 등거리 외교로 원조를 얻어낸 것과 마찬가지의 역학 구도를 미·중 간에 투영하려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장펑(張鋒) 중국남해연구원 겸임 교수도 “김정은 방중은 2012~2017년의 북·중 간 이반과 갈등을 봉합하고 그 전으로 복귀하는 것이지만, 과거 신화적 황금기의 밀접한 동맹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며 “북·중 관계는 1953년 이래의 평균적 모습보다 못하다”고 평가했다(기고문).

 
김정은은 27일 정전체결 기념일(북한은 전승절)을 맞아 미군 유해 50여 구를 송환했다. 하루 전에는 평남 회창군의 중국인민지원군열사능원을 방문했다. 50년 11월 참전 중 숨진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의 묘소도 참배했다. 올해 국제사회 화두인 북한 비핵화 문제를 희석하면서 미·중 간 줄타기에 들어간 모습이다. 미·중은 지금 최악의 무역 분쟁을 벌이고 있다. 양자 간엔 이데올로기, 문명 충돌적 양상도 없지 않다. 이래저래 북한 비핵화 방정식은 고차원이 되고 있다. 한반도 문제(Korean question)는 복잡하고 심층적이다.
 
오영환 군사안보연구소 부소장·논설위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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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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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