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사람의 숲을 떠나 시베리아 바이칼호로 가다

책이 있는 여름
희망의 발견

희망의 발견

희망의 발견
실뱅 테송 지음
임호경 옮김, 까치
 
열대야의 잠은 익숙한 골목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기분이다. 어리둥절한 채 끔쩍 깨어나면 여전한 새벽, 이 시간에 아직 혹은 벌써 30도라니 너무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토막 난 잠을 잇는 대신 머리맡을 더듬어 한밤의 기온이 영상 30도가 아니라 영하 30도인 세상의 이야기를 펼친다. 시베리아, 바이칼. 발음하는 순간 내뿜는 숨이 하얗게 얼어붙는 모습이 그려지는 단어다. 게다가 한국판 제목이 희망의 발견이라니, 영혼의 시원(始原)에 팬 어웅한 동굴처럼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한 그것을 찾는 여정일 듯하다. 한더위를 피하기에는 제대로인 독서다.
 
한마디로 말하면 『희망의 발견: 시베리아의 숲에서』는 프랑스 여행작가 실뱅 테송이 37세가 되던 해 2월부터 7월까지 세계 최대 담수호인 바이칼 호숫가의 시베리아식 오두막에서 머무른 기록이다. 사람의 마을과 100㎞ 떨어져 있고 이웃이며 접근도로가 없는 툰드라의 호숫가에서 혹렬한 겨울과 봄을 홀로 견디며 매일 스쳐 가는 시간을 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영혼의 시원 바이칼호. 프랑스 여행작가 실뱅 테송의 산문집 『희망의 발견』에서 치유의 장소로 그려진다. [사진 W0zny]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영혼의 시원 바이칼호. 프랑스 여행작가 실뱅 테송의 산문집 『희망의 발견』에서 치유의 장소로 그려진다. [사진 W0zny]

“나는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숲속 깊은 곳에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는 첫 문장의 결기에도 불구하고, 기실 책의 소재 자체는 대단히 새롭지 않다. 이미 로키산맥을 탐사하는 데 평생을 바친 인류학자 로렌 아이슬리의 에세이 『광대한 여행』이나 북구의 창백한 삶과 죽음을 다룬 페터 회의 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통해 광대무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독과 차가운 비애가 소개되었음은 물론, 호숫가의 오두막이라면 이제는 고전 반열에 오른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나이가 들면 경험을 통해 성숙하여 참을성이 길러진다는 말은 거짓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에 대해 참기 어려웠던 기억 때문에 더 빠르게 참지 못하고 진력을 낸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래서 여정의 초반에는 저자에 대한 불신으로 엉두덜거렸다. ‘추위와 정적과 고독은 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설이 무색하도록 식량과 장비가 한 트럭에 독서 목록까지 휘황하고, 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명백히 독자의 시선을 의식한 기록이 너무 수다스럽고 행간마저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도저한 방랑벽으로 산맥을 넘고 사막을 건너고 온갖 험지를 쏘다니던 여행작가가 고작 6개월 만에 ‘은둔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하긴 ‘자연주의 철학자’의 대명사인 소로도 정작 월든 호숫가에서 생활한 시간은 2년 2개월하고 이틀뿐이지만). 미문(美文)과 성찰의 깊이를 극찬하는 메디치 상(償)의 심사위원들은 알 바 아니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저자가 내건 ‘은둔’의 펄럭이는 플래카드 이면이다. 무엇이 과잉 행동에 발광하듯 살아온 떠돌이를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숨게 했는지.
 
막된 독자라 저자의 집필의도 따위는 아랑곳 않는다. 서른일곱, 단테가 말한 ‘인생의 반 고비’인 서른다섯을 막 넘어선 그때는 떠나기에 맞춤한 나이다. 더 이상 젊지 않은 듯 아직 늙지도 않아, 모든 것을 알아버린 듯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이다. 실뱅 테송의 ‘은둔’ 또한 멈춰 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곳으로 떠난 것에 다름 아니다. 아마도 마음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질문에 대답할 의무에서 해방’되기 위해 사람의 숲을 벗어나 삼나무 숲으로 숨어들었으리라. 문득 안톤 체호프의 단편 ‘내기’가 떠오른다. ‘내기’의 주인공인 젊은 변호사는 늙은 은행가와 200만 루블을 걸고 15년 동안 수감 생활을 견디기로 내기한다.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소설과 현실의 두 사람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김별아

김별아

강풍, 눈보라, 청동색 벽 같은 삼나무 숲, 눈사태와 빙판. 바이칼 호숫가의 2월은 혹서의 한가운데서 떠올리기에도 오싹하다. 낯설고 무서운 추위를 견디는 저자의 힘은 알 수 없는 시공간에 놓인 자신을 설득하는 은둔 생활에 대한 진지한 허세다. 환영일까, 조우일까? 3월의 어느 날 빙판의 물구멍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익사자의 흰 손을 본 뒤로 과장은 점차 눅어든다. “나는 나 자신을 견뎌낼 수 있을까? 나는 서른일곱의 나이에 다른 존재로 바뀔 수 있을까? 왜 나는 그리운 것이 전혀 없을까?” 비로소 잠언과 아포리즘의 휘장 너머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겨울이 계속되는 4월에 눈에 띄는 것은 노동이다. 오두막을 덥히기 위한 장작 패기를 비롯해 낚시와 물구멍을 뚫는 행위가 한층 듬쑥해진다. 툰드라의 은둔자는 5월부터 이웃에게서 얻은 개 두 마리와 함께 조용히 봄을 기다린다. 7월이면 끝나는 ‘사서 고생’에, 종내 기다리던 일이 6월에야 벌어진다.
 
“내 삶에서 남는 것은 내가 쓴 글뿐이다”라고 비장하게 선언하지만, 삶은 삶이고 글은 글일 뿐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이별을 통보했다. 그녀는 부평초같이 떠도는 남자를 더 이상 원치 않는다고 한다. 걸핏하면 달아나고, 의무를 회피하고, 결국에는 이 오두막으로 숨어버린 나는 분명 죄인이다.” 소설 ‘내기’의 주인공은 15년 동안 온갖 책을 섭렵하고 내기에서 승리하기 하루 전 책과 세상의 모든 지혜를 사랑하면서도 경멸한다는 고백과 함께 떠나버리지만, 우리의 저자는 개털에 얼굴을 묻고 운다. 그는 이별을 피해 모든 것이 얼어붙은 극한의 땅에까지 다다랐지만 삶의 문제는 살아서 도망칠 수 없는 법이다.
 
6월 16일, 그날부터 책은 새롭게 읽힌다. 박새가 박새가 되고, 곤들매기가 곤들매기가 되고, 고독과 행복이 비로소 고독과 행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간명한 슬픔 때문에 독자들은 이 책을 치유의 이야기로 읽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 즈음엔 보드카가 간절했고, 지금 지치고 아픈 (나를 포함한) 누군가에게 독주의 숨결로 속삭이고 싶어졌다. “저기, 이 세상의 어느 숲에, 삶의 행복과 아주 멀지 않은 무엇인가가 가능한 오두막 한 채가 있다는 사실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김별아 소설가

관련기사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