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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한 홉의 물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생수를 주문했는데 배달 예정일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날이 하도 더워 생수 대란이라도 벌어진 건가 싶어 문의해 보니, 그쪽의 실수로 주문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속히 가져다준다고는 했지만 미안하단 말도 없어 나중에 한 마디 해줘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결국 아무 말 못 했다. 무거운 생수통을 쿵 내려놓고 고객과는 눈길 마주칠 여유조차 없다는 듯 홱 돌아서 가는 택배기사의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늦어진 배달을 기다리며 내가 준비해야 했던 건 한 마디 질책이 아니라 시원한 물 한 잔이었단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내 어릴 적 어른들은 더운 날 힘들게 오가는 행상을 보면 일단 시원한 냉수 한 사발을 내주셨다. 동네 아주머니들 거의 다가 그러셨다. 서울하고도 중심지에서 자란 나도 그런 풍경이 익숙했으니 아마 전국이 다 그랬을 거다. 열린 대문 밖에서 찬물 한 잔 마시자며 고개를 들이미는 행상이 있으면 잠시 들어와 앉았다 가라고도 하셨다. 그러다 생각지 않은 물건을 사기도 했으니 그게 당시의 장사 수완인 경우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한 잔의 물과 휴식 정도는 제공하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더운데 먹고사느라 얼마나 고생이냐는 게 서로의 당연한 인사말이었다.
 
요즘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예전엔 쌀이나 물 등의 양을 잴 때 ‘한 홉, 두 홉’ 이라고들 했는데, 그럴 때 ‘한 홉’은 목마른 사람이 단숨에 마실 수 있는 물의 양이었다는 설이 있다. 같은 부피의 물질이어도 비중은 다르기 때문에 쌀과 보리와 콩의 ‘한 홉’은 일치하지 않고, 한 홉 어치 물의 양도 마찬가지다. 신체 조건이나 그 간절함에 따라 단숨에 들이킬 수 있는 양도 다를 테니, 그야말로 주먹구구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기준이 지극히 인간 중심인 사고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매력적이지 않은가.
 
삶의 향기 7/28

삶의 향기 7/28

논과 밭의 넓이를 이르던 ‘마지기’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한 마지기’는 ‘한 말’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땅의 넓이를 일컫는 단위로, 논은 200평, 밭은 100평이 ‘한 마지기’에 해당된다고 한다. 지금은 ‘평’이란 말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아파트 넓이 같은 건 아직도 ‘제곱미터’보다는 ‘평’으로 들어야 더 쉽게 이해되는 건, 그동안 오래 사용해 왔기 때문이겠지만 그만큼 인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니 더욱 친근감이 간다.
 
물론 사람마다 단숨에 들이켤 수 있는 물의 양은 조금씩 다르고, 체력과 기술에 따라 한 사람이 온종일 해낼 수 있는 일의 양도 제각각일 것이기 때문에 혼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누군가는 속이며 악용하는 폐단도 있었을 테니, 근대화 산업화에 따라 국제도량형 기준을 따르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과거의 도량형이 지극히 인간 중심인 사고에 기반했고 그렇게 통용되었다는 점에는 주목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갈증을 단숨에 풀 수 있는 물의 양이 ‘한 홉’이라니, 그 말만으로도 더위가 조금은 가시는 것 같지 않은가.
 
기상 관측 기록을 연일 갈아치우고 있는 올여름, 아스팔트가 녹아내리는 폭염 속에서도 계속 일해야 하는 분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다는 소식에 안타깝기만 하다. 온열질환자 삼 분의 일 이상이 건설현장 같은 실외작업장의 노동자들인데, 폭염 특보 발령 때 물과 그늘과 휴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실외 작업장 폭염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는 현장은 드물다고 한다. 건설 사업은 시간이 돈인지라 이 더위에도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는데….
 
오늘도 숨 막히는 더위가 예고돼 있다. 땡볕에서 안전모까지 쓰고 일하실 그분들 모습이, 문 앞에서 눈길 한번 안 주고 돌아섰던 택배기사의 젖은 뒷모습과 겹쳐진다. 지나는 행상에게 냉수 한 사발 건네던 시절처럼, 한 홉의 물만큼의 인지상정으로 이 여름을 함께 통과했으면 좋겠다.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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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