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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 일꾼 하벨, 체코 ‘벨벳혁명’ 이끌어 대통령 됐다

백경학의 맥주에 취한 세계사
 
맥줏값을 올리는 나라는 망한다. - 체코 속담
 
 1994년 1월 11일 바츨라프 하벨(1936~2011) 초대 체코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만남이 성사됐다. 두 대통령의 회담 장소는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맥줏집 ‘우즐라테호티그라(황금 호랑이)’이었다. 200년이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이 맥줏집은 뾰족한 첨탑과 빨간 지붕을 얹은 중세 건물이 가득한 프라하 구시가지에 자리하고 있다. 하벨은 자신의 단골 펍인 우즐라테호티그라에서 89년 체코 공산당의 붕괴를 이끈 ‘벨벳 혁명’을 준비한 바 있다. 
체코 민주화를 이끈 바츨라프 하벨 체코 초대 대통령(오른쪽)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교류한 매개는 '맥주'였다. 1994년 체코 프라하에서 카렐교를 걷고 있는 두 정상. [중앙포토]

체코 민주화를 이끈 바츨라프 하벨 체코 초대 대통령(오른쪽)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교류한 매개는 '맥주'였다. 1994년 체코 프라하에서 카렐교를 걷고 있는 두 정상. [중앙포토]

 주문한 맥주가 나오자 하벨은 “맥주에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신이 담겨있다”며 클린턴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맥주를 몇 모금 들이켠 뒤 어느새 코가 빨개진 클린턴의 답사가 이어졌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유학 시절부터 체코의 민주화를 이끈 하벨을 존경해왔다.”  
 그 옆에는 훗날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이 된 매들린 올브라이트 유엔(UN) 대사가 앉아 있었다. 나치가 체코를 침공하자 가족과 미국으로 망명한 올브라이트에게 고향 프라하에서의 맥주 파티는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체코인의 자부심으로 통하는 맥주, 필스너 우르켈. [사진 체코관광청]

체코인의 자부심으로 통하는 맥주, 필스너 우르켈. [사진 체코관광청]

체코 프라하의 구 시청사 시계탑에서 내려다본 구시가 광장의 풍경. [중앙포토]

체코 프라하의 구 시청사 시계탑에서 내려다본 구시가 광장의 풍경. [중앙포토]

 체코의 국민작가 보후밀 흐라발(1914~97)도 이 자리에 초대됐는데 맥주 애호가인 그는 “펍은 맥주를 통해 언어가 움직이고 창조되는 곳”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클린턴은 이날 독일식 돈가스 슈니첼을 안주 삼아, 체코 맥주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을 석 잔 마셨다. 그리고는 숙취로 다음 날 아침 조깅을 취소했다. 훗날 체코를 방문한 영국 출신 록그룹 ‘롤링스톤스’도 하벨의 다른 단골 맥줏집에 초청됐다. 하벨이 롤링스톤스와 교류했던 매개는 역시 필스너 우르켈이었다.
 
 해외 순방 때 펍 암행한 대통령
 48년 공산당은 체코(당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권력을 장악했다. 조국이 공산화되자 유명 식당 주인의 아들로 풍족한 삶을 누리던 하벨의 인생도 순식간에 뒤집혔다. 재산을 몰수당했고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원했던 인문학조차 전공할 수 없었다. 간신히 공대에 입학했지만, 학업을 포기한 하벨은 연극을 통해 공산주의의 모순을 고발하면서 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벨벳혁명 20주년 기념 공연 무대에 오른 미국 포크가수 조안 바에즈(왼쪽)와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이 관객석을 향해 손을 번쩍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벨벳혁명 20주년 기념 공연 무대에 오른 미국 포크가수 조안 바에즈(왼쪽)와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이 관객석을 향해 손을 번쩍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소련의 침공으로 독재정권이 들어서자 하벨은 펜 대신 맥주 통을 들었다. 프라하에서 폴란드 국경의 작은 도시로 이사한 뒤 양조장 일꾼이 되었다. 추운 겨울날 200㎏이 넘는 맥주 오크통을 옮기는 것이 그의 업무였다. 허리가 끊어질 듯했지만, 하벨은 육체노동에서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공산당의 압력으로 결국 양조장에서도 쫓겨났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관객’이라는 단막극을 만들었고 연극이 유명해지면서 반체제 운동의 기수로 떠올랐다. 당연히 정권의 탄압도 거세졌다. 하벨은 79년부터 4년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하벨의 곁에는 늘 맥주가 있었다. 소련의 개방정책으로 체코 민주화운동에 숨통이 트이자 새로운 조국을 꿈꾸며 토론한 곳이 단골 맥줏집이었다. 역사상 수많은 사람이 맥주를 사랑했지만, 하벨은 진정한 맥주 마니아였다. 93년부터 대통령 재임 10년 동안 프라하의 단골 펍이 그의 만찬장이었다.  
 해외 방문 때도 수시로 맥줏집을 찾았다. 대통령이란 사실을 숨기고 맥줏집으로 출격해 현지인들과 어울리곤 했다. 90년 대통령 당선 직후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혼자 맥줏집을 찾은 하벨은 옆자리 미국인에게 자신을 체코 대통령이라고 소개했다. 상대는 폭소를 터뜨리며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열심히 대통령직을 수행하라”며 하벨의 등을 두드린 뒤 술값을 계산했다. 하벨의 흡족한 얼굴을 경호원들은 멀끔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맥주 필스너 우르켈  
 체코의 자존심 필스너 우르켈은 1842년 체코의 서부 플젠(Plzen)에서 제조됐다. 과거 프로이센의 영토였던 플젠을 독일에서는 필젠(Pilsen)이라고 부르는데 필젠에서 제조된 맥주라는 뜻에서 ‘필스너 비어’가 유래했다. 필스너 우르켈은 필스너의 ‘원조(Original)’란 뜻이다.  
하벨 대통령은 체코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맥주 필스너 우르켈을 즐겨 마셨다. 필스너 우르켈 공장의 발효실 모습. [사진 체코관광청]

하벨 대통령은 체코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맥주 필스너 우르켈을 즐겨 마셨다. 필스너 우르켈 공장의 발효실 모습. [사진 체코관광청]

 이 맥주의 기원은 중세 유럽을 통일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루스 대제(742~812)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전쟁터에 오크 맥주 통을 들고 다닌 전설적인 황제였다. 유럽 곳곳에 수도원을 세운 뒤 이 중 30곳에 맥주 양조장 설치를 지시했다. 이 전통이 체코에도 전해졌다. 하지만 맥주의 질이 떨어지자 1838년 플젠 시민들은 맥주 통을 엎어버리며 시위를 벌였다. 놀란 양조업자들은 우수한 맥주를 만들기 위해 독일 바이에른 출신 양조기술자 요제프 그롤(Josep Groll)을 초빙했고, 이때 출시된 맥주가 바로 필스너 우르켈이다.  
맥주 도시 필젠의 구시가. [사진 체코관광청]

맥주 도시 필젠의 구시가. [사진 체코관광청]

 맥주는 처음 마실 때의 향과 맛보다 마신 뒤 혀와 목젖, 코에 남는 여운이 중요하다. 필스너 우르켈만큼 보리의 고소함과 홉의 쓴맛이 어우러져 강한 여운을 남기는 맥주는 많지 않다. 투명한 황금색과 진한 쓴맛이 일품이다. 필스너 우르켈은 2002년 핀란드 헬싱키 맥주 축제에서 올해의 맥주로 선정된 이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맥주 회사 사브밀러(SABMiller)가 소유했던 필스너 우르켈은 2016년 아사히 맥주에 의해 인수돼 현재 일본 회사가 됐다.
 독일이 맥주로 유명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맥주를 많이 마시는 나라는 사실 체코다. 2014년 통계에 따르면 체코 국민 1인이 연간 142.6ℓ의 맥주를 소비한다. 체코 다음으로 세이셸 (114.6ℓ), 오스트리아(104.8ℓ), 독일(104.7ℓ)이 따르고 있다. 체코인은 한국인(45.8ℓ)의 세 배가 넘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맥주를 외교 수단으로 삼았던 초대 대통령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하다.
오크 향 가득한 도시 플젠에서 노는 법
웅장한 개선문(비어게이트)을 지나 필스너 우르켈 공장에 들어설 수 있다. [사진 체코관광청]

웅장한 개선문(비어게이트)을 지나 필스너 우르켈 공장에 들어설 수 있다. [사진 체코관광청]

체코 플젠은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성지 같은 여행지다. 황금색 맥주 필스너 우르켈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플젠을 방문한 해는 97년이었다. 독일 뮌헨에서 차를 타고 출발했다. 도로의 움푹 파인 웅덩이를 피해 체코제 자동차 ‘스코다(Skoda)’가 매연을 내뿜으며 달렸다. 93년 건국된 체코의 미래가 곡예 운전을 하는 스코다처럼 불안하게 느껴졌다.   
플젠 시내로 접어들자 그제야 활기가 느껴졌다. 구시가지 레프블리카 광장을 상가가 빙 두르고 있었다. 1층은 대개 식당이었다. 손님들 손에는 거짓말처럼 필스너 우르켈이 들려 있었다. “왜 이 맥주만 마시느냐?”고 묻자 “황제가 마시던 최고의 맥주”라는 답이 돌아왔다.   
황금빛 필스너 우르켈 맥주. [중앙포토]

황금빛 필스너 우르켈 맥주. [중앙포토]

2014년 다시 플젠을 찾았다. 필스너 우르켈 공장 투어 프로그램이 신설됐다는 소식에 당장 공장으로 향했다. 공장 입구에 웅장한 개선문이 눈에 띄었다. 필스너 우르켈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1892년 세운 건축물이다. 개선문을 지나 공장으로 들어서면 가이드와 함께 내부를 견학할 수 있다. 2004년 공장은 자동화 시설을 완비했다. 라벨링과 맥주 주입 과정을 지켜봤다. 미로 같은 통로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자 150년이 넘은 대형 오크통들이 서 있는 발효실이 나타났다. 13세기에 지어진 맥주 저장고는 플젠의 맥줏집들과 연결됐다. 연결 통로 길이만 20㎞에 달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투어를 마치고 필스너 우르켈 직영 맥줏집으로 향했다. 코에 잔뜩 거품을 묻히고 필스너 우르켈을 들이켰다. 해마다 2만 명이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공장을 견학하려면 홈페이지(prazdrojvisit.cz)를 통해 예약하고 방문해야 한다. 입장료 1인 250코루나(1만3000원).
 
 
백경학 맥주칼럼니스트 stern100@hanmail.net 
독일 뮌헨 슈바빙의 맥줏집과 중세 양조술의 전통을 계승한 유럽 수도원을 순례하며 맥주를 배웠다. 2002년 국내 최초의 하우스 맥주 전문점 ‘옥토버훼스트’를 창업했다. 현재 장애 어린이 재활을 위한 ‘푸르메재단’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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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