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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김광한(1946~2015),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

김환영의 책과 사람 (19)
《다시 듣는 김광한의 팝스다이얼》 최경순 & 박현준 
 
DJ 김광한, ‘영원한 17살 아저씨 DJ’ 꿈꿨다

'음악은 아름다운 세상을 낳는다'고 믿었다
 
16개 직업 거치며 DJ 꿈꿔
‘힘들어도 끝까지 하면 이룬다' 깨달아  
 
8세 연하 여자 후배에 ‘흑심’ 품고 접근
평생 ‘꽃님아, 꽃님아’ 부르며 손잡고 다녀
 
후배에게 베풀고 자료에 재투자하느라…
재산 모으지 못했지만, 우리 팝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 남겨
 
“아름다운 세상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생겨난다고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순수한 마음, 아름다운 마음은 음악을 자주 들을 때 생겨나지 않을까요? 음악을 많이 들으십시오. 김광한은 언제나 ‘열일곱 살 아저씨 DJ’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김광한

김광한

김광한(1946~2015)이 남긴 말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연소 팝송 DJ, 국내 최초 쇼비디오 자키였다. 라디오와 TV, 지면을 오가며 MC∙DJ, 팝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최근 우연히 발견된 그의 글이 ‘유고 자서전’ 형식으로 출간됐다. 박현준 경인방송 PDJ와 록 전문 잡지 ‘파라노이드’의 송명하 편집장이 유고를 발견했다. 
유고를 정리한 김광한 DJ의 아내 최경순 작가와, 제자 박현준 PDJ를 인터뷰했다.  
 
다시 듣는 김광한의 팝스다이얼

다시 듣는 김광한의 팝스다이얼

《다시 듣는 김광한의 팝스다이얼》김광한 지음, 북레시피
  
책의 서문 ‘남편은 여행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남편은 팝 음악의 본고장 영국, 그중에서도 리버풀을 가보고 싶어 했다. 2주기가 지난 어느 날 나는 그의 뜻을 이뤄주고 싶은 생각에 두 가지 준비를 했다. 우선 남편 앞으로 편지 한 통을 썼다. 그리고 그가 평소 즐겨 입던 티셔츠와 함께 나름의 ‘의식’을 치른 뒤, 그것을 태운 재를 작은 통에 담아 영국으로 가져갔다. (……)  
남편과 함께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준비해간 ‘재’를 매슈 스트리트 곳곳에 뿌렸다. ‘당신은 지금 나와 함께 리버풀에 온 거예요. 보고 있죠?’라는 말과 함께. 그랬는데…… 같은 시각쯤 후배의 꿈에 나타나 ‘지금 나 여행 중인데, 여기 너무 좋다!’고 활짝 웃으며 이야기했다니! 그는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여행한 게 분명했다.”
이 대목이 궁금했다.  

 
김광한

김광한

김광한 선생이 후배 꿈에 나타났다고 했다. 그 후배는 리버풀에 가신 것을 몰랐는지.
 최경순: “전혀 몰랐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최경순: “영혼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도 깜짝 놀랐다. 그 이야기를 듣고.”
 
책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최경순: “남편은 살아오면서 많은 힘든 일을 겪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꿈을 갖고 살았다. 남편은 기록을 통해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힘을 내시고 끝까지 하면 이루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지 않았을까.”  
 
최경순 & 박현준

최경순 & 박현준

김광한 선생은 ‘DJ가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에 병아리 팔기, 신문 배달, 보험회사 외판원 등 16개 직업을 거쳤다. 하지만 자리 잡은 다음에는 괜찮지 않으셨나.
 최경순: “자리 잡았다는 게 결국은 방송을 시작하면서부터 였는데 성격이 돈에 집착을 너무 안 했다. 일하는 그 자체만을 좋아하다 보니까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았다.”
 박현준: “주변 후배들도 다들 ‘10여년 동안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하셨으니까 집이 몇 채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생전에 후배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셨다. ‘재투자’라고도 할 수 있는데… DJ로 번 돈을 DJ 활동을 위해서 쓰셨다. 자료를 구입한다거나 판을 사신다거나 하는 그런 것들에 아낌없이 투자하셨다. 사람들이 약간의 오해 아닌 오해를 했을 수도 있다.”
 최경순: “제게 생활비 주는 것 외에는 국내외 자료 사고 책 사는데 다 썼다. 자기 신발도 잘 안 사서 신었다. 청바지에 티셔츠, 부츠 차림으로 평생 살았다.” 
 
김광한 선생이 남긴 방대한 자료(약 2만장의 LP∙CD 등)는 한국 팝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어디 기증하시거나 기념관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최경순: “제 꿈이다. 제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다. 자료와 유품을 전시해 많은 사람에게 ‘아 이런 사람이 이렇게 살아왔구나’를 보여주고 싶은데 아직 여건이 되지 않았다.”
 
유고를 읽으며 고인에 대해 모르던 것을 발견한 게 있는지.
 최경순: “남편에 대해 제가 몰랐던 것도 많이 알았고, 남편이 힘들었을 때 옆에서 위로해주지 못했던 부분도 여러 가지가 너무 마음이 아팠다. 정리하다가 울다가 덮어 놓다가 다시 정리하다가… 한 4개월에 거쳐서 제가 파일 작업을 끝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는지.
 최경순: “연애결혼인데 제가 사회 초년생일 때 팝음악 클럽에서 만났다. 음악을 같이 듣는 모임에 남편이 고문으로 왔다. 같이 활동하면서 결혼하게 됐다.”
 박현준: “책에 보면, 두 분이 처음 만나는 대목이 나온다. 선생님이 ‘흑심’을 품고서 모임에서 사모님을 끌고 다니신 것 같다.(웃음) 마음을 숨기고, 자료조사 핑계 삼아 매일 데리고 다니며 ‘작업’을 했다.”
 
그 대목을 읽으며 새로웠을 듯.
 최경순: “저도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처음에는 너무 순수하게 다가왔다. 정말 음악적으로 대선배라 감히 그런 생각을 못 했다. 다니면서 ‘아 인간성이 굉장히 따뜻하다’고 느끼면서 저도 좀 더 마음이 갔다.”
 
부록에서 이양일 선생이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애처가”라고 썼다. 그냥 ‘애처가’는 또 모르지만,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것인데.
 박현준: “항상 사모님 위주로 여러 가지 계획을 짜셨다. 본인 방송 활동도 욕심을 낼만한데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같이 보내려고 했다. 생전에 항상 애틋하게 ‘꽃님아 꽃님아’라고 사모님을 불렀다. 오랫동안 함께 사셨지만, 항상 연애하시는 것 같았다. 손잡고 다녔다.”
 최경순: “나이 차이가 좀 나다 보니까. (8살 차이) 아무래도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풋풋했겠는가. 귀여워서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평생 ‘꽃님아’라고 불렀다. 애를 안 낳고 살았기 때문에 아마 더 그랬을 것 같다.”
 
최경순

최경순

애칭을 예컨대 ‘이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꽃님이’를 선택한 이유는?
 최경순: “처음엔 남편이 살아가는 모습이 삭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음악적인 감정은 풍부한데… 제가 늘 같이 다니면서… 그때가… 2월에 만나서 다니다 보니까… 봄이 되면서 꽃이 사방에 피었다. 제가 ‘이 꽃은 무슨 꽃인데 꽃말은 뭐고…’ 하면서 계속 꽃 이야기를 해줬다. 어느 날 남편이 ‘아 이제는 꽃님이라고 불러야겠다’고 한 그때부터 끝끝내 꽃님이가 됐다.”
 
한용길 선생이 “권위의식이 없는 자유로움의 소유자”라고 했다. 무슨 뜻인지.
 최경순: “어려워하는 후배들에게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라’고 했다. 권위의식이 별로 없었다. 그 대신에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자기랑 마인드가 맞지 않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이 들면 과감하게 쓴소리도 많이 했다. 제가 그 부분을 조심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 ‘바른말 하는 사람이 있어야지 이 사회가 좋아지지 좋은 소리만 하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
박현준: “항상 젊은이들 생각과 마인드에 관심을 기울이셨다. 그리고 항상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까 어떤 권위의식 같은 것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지셨다. 새로운 것에 항상 문턱을 맞추시다 보니까 후배들을 편안하게 대해 주셨다.”  
 
고인이 가장 좋아하신 말씀 두 가지가 책에 나온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 하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바뀐 행동이 몸에 익으면 습관이 바뀐다.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이다.
 박현준: “굉장히 많이 말씀하셨다. 심지어 ‘No pain, no gain’은 한 때 사무실 벽에 붙여놓았다. 그 정도로 항상 강조했다. ‘힘들어야 한다. 고통을 느껴야 한다. 그래야 방송을 하는 사람으로서 DJ로서, 고통 안에서 뭔가 느끼면서 자신이 어떤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깨닫게 된다’고 강조하셨다.”  
 
마지막으로 해주실 말씀은?
 박현준: “DJ 김광한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다. 80년대 ‘팝스다이얼’을 기억하는 분들의 추억 속에는 DJ 김광한이라는 이름이 있다. 그런 분들에겐 이 책이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추억의 한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최경순: “남편을 많은 분이 오랫동안 기억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매년 추모 음악회를 열었고 이번에 자서전을 정리해서 펴냈다. 정말 착하게 살았다. 남편이.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오래 기억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마음속 영원한 DJ 김광한은…
- 1946: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5남 2녀 중 4남으로 출생  
- 1966: 서울 FM(FBS) DJ로 데뷔  
- 1979: 방송작가 최경순과 결혼
- 1982~1994: KBS 2FM 〈김광한의 팝스다이얼〉 〈김광한의 팝스 투나잇〉, 〈김광한의 골든팝스〉 진행; 그 밖에 KBS 2TV 〈가요 Top 10〉, TBS 교통방송 〈밤과 음악 사이〉, TBN 인천교통방송 〈낭만이 있는 곳에〉, CBS 표준FM 〈김광한의 라디오 스타〉 진행  
- 1987~1991: KBS 2TV 〈쇼 비디오 자키〉 진행  
- 2015: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입원, 3일 후 별세
- 2018-07-07: 서울 종로구민회관 대강당에서 3주기 추모 음악회. 이치현∙유현상∙양하영∙김준원 등 후배 가수들이 출연해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  
 
김환영 지식전문기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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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책과 사람〉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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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