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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의 퍼스펙티브] 변화하는 국제 교역 체제, 앞으로 2년이 우리 운명 좌우한다

무역 분쟁
최근 유엔 등 국제기구가 직면한 고민거리가 있다. 과거 체결된 조약들을 업데이트하는 문제다. 1960~70년대 국제 텔렉스로 교신하던 시대에 체결된 조약들이 여전히 국제관계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간 세상이 바뀐 것을 생각하면 규범과 현실의 차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 간극을 줄이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이러한 간극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곳이 통상협정과 투자협정이다. 시장과 직접 연동되어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실망의 아이콘’처럼 되어 버린 WTO협정은 어떠한가. 86년부터 93년까지 이루어진 협상(우루과이 라운드)의 산물이다. ‘마이마이’라 불리던 소형 카세트 라디오, 삐삐, 팩시밀리가 최첨단 상품이고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그린 시절이다. 드론·빅데이터·인공지능(AI)은 커녕 핸드폰과 이메일도 보급되기 전이다. 불과 30년이 지났으나 그 기간 기술의 발전 속도는 그 이전의 100년에 버금간다. 이때의 기본 골격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협정문과 현실의 차이가 얼마나 크겠는가.
 
시간이 지날수록 각국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를 진작에 간파하고 2001년 도하라운드 협상을 시작하였으나 배는 산으로 가버렸다. 남은 것은 164개 회원국의 실망과 불만이다. 작금의 국제 교역 체제의 혼돈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규범과 현실이 따로 노는 것이다. 미국의 주장도, 중국의 반박도, 다른 나라의 하소연도 한 마디로 줄이면 그리 돌아간다. 개인간의 관계에서도 당사자들이 불만이 날로 커지는 계약이 유지되기는 힘들다.
 
신뢰 무너진 국제 교역 체제
 
무역 분쟁

무역 분쟁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현 교역 체제에 대한 각국의 신뢰가 무너졌다는 점이다. 신뢰가 사라지니 상대방을 이해할 마음의 여유도 이유도 없다. 조금의 기회만 있어도 협정문의 빈틈을 헤집고 편한대로 해석하여 적용한다. 미국, 중국도, 다른 나라들도 그러하다. 우리가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수출에 사활을 건 우리로서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을’이다.
 
지금 미·중 무역 분쟁이 초미의 관심사다. 바닥까지 갔으니 아마 적절한 계기로 수습 국면에 들어갈 것이다. 그럼 우리 형편은 나아질 것인가? 한숨 돌리겠지만 잠시뿐이다. 이미 ‘신뢰’라는 철근이 녹아내리는 교역 체제는 특단의 보강 작업이 없으면 지탱하기 어렵다. 한 템포 쉰 후 미국과 중국은 ‘나 홀로 행보’를 강화할 공산이 크다. ‘국가 안보’ 이슈에 재미를 들인 미국은 자동차를 필두로 주요 산업 영역에 이 ‘전가의 보도’를 들이댈 기세다. 중국은 자기 방식대로 세몰이에 나섰다.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연계에 힘을 쏟고 이제 중동·아프리카로도 진출하고 있다. 이에 놀란 다른 나라들도 자기방어 기제를 발동하고 있다. EU는 그제 철강 세이프가드를 발동하고 미국 기업 구글에 거액의 과징금을 부과하였다. 일본이 우리 조선산업 보조금을 이유로 WTO 제소 준비를 하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다른 나라들도 자기 잇속을 차리고자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딱 ‘깨진 유리창 법칙’이 적용되는 모양새다.
 
이런 상황에서 미·중 분쟁으로 우리가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는 단견이다. 단기적으로 이익이 있더라도 국제 교역 생태계 파괴의 피해는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 더구나 지금은 미국의 무역 흑자 감시로 우리 대미(對美) 수출을 마음대로 늘리기도 힘들다. 또한 중국 수출길이 막힌 미국 상품의 그 다음 대안은 아마 한국일 것이다.
 
70년 이어온 교역 체제 변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일단 급한 불을 꺼야 한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정부가 뒤늦게나마 주요국 정부를 접촉하며 다각도로 나서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작금의 상황은 비상한 각오로 대처해야만 돌파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동시에 차분히 현 상황을 돌아보자. 중요한 것은 지금의 상황이 단지 보호무역주의 성향의 발로 내지 G2 지도자간 감정적 대립의 산물이 아닌 국제 교역 체제의 구조적 변화의 결과라는 점을 간파하는 것이다. 2008년 이후 근 10년에 걸쳐 진행된 환경 변화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그 진행 속도가 갑자기 빨라진 것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도, 시진핑 주석의 ‘중국몽’도 관련은 있으나 그 본질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어 온 국제 교역 체제가 바뀌고 있다. 아쉽지만 우리가 국제 교역의 판을 짤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전력투구하여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자. 먼저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우리 입장에서는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일단 FTA 체결에 매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FTA의 진정한 의미와 그 한계를 인식하자. 신뢰 붕괴의 시대에는 FTA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외면한다는 것은 이미 목도하였다. 미국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추가 관세를 남발하여도 한미 FTA는 별다른 견제 장치가 없다. 중국의 이어지는 사드(THAAD) 보복에도 한·중 FTA는 꿀 먹은 벙어리다. EU발 철강 세이프가드에 한·EU FTA는 묵묵부답이다. 오히려 양자 체제는 결정적인 순간에 소위 ‘갑을’  관계만 더욱 부각하며 우리에게 아픈 교훈을 남기고 있다. 주요국과의 FTA가 갑을 관계를 고착화하는 기제로 전락하는 현상을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
 
FTA, 결정적 순간 한국에 도움 안 돼
 
변화된 생태계를 염두에 두고 향후 체결되는 FTA는 내용 면에서도 크게 손 볼 필요가 있다. 비관세장벽, 무역구제제도, 디지털 교역, 상호협의, 분쟁해결절차에 관련된 조항을 대폭 강화하여야 한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이 부분이 느슨한 협정은 관세 철폐의 효과를 순식간에 무력화시켰다. 이러한 작업은 결국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FTA 표준문안(template)을 요구한다. 기존 체제는 ‘자유 교역’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유지된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전제가 사라진 상황에서 과거의 FTA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 국내 법령은 어떠한가? 이 역시 새로운 생태계에 비추어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의 무역제한 조치에 대해 우리나라가 적절한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이 이미 우리 법령에 도입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내용이 소략하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아마 한 번도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하여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그 발동 가능성을 염두에 둔 체계적 정비가 필요하다.
 
또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제도를 갖고 있다. 바로 통상협정 협상 개시부터 발효 후 10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국회가 해당 협정의 우리 국내시장 ‘개방 효과’를 감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관세 철폐를 통한 국내 시장 개방 효과가 핵심이 아니라 우리의 통상 협정상 이해관계가 제대로 보호되고 있는지가 그 핵심이다. 과거의 통상환경에 터잡은 이러한 부분들은 이제 정비되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제 여러 현안에 대해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 것이다. 기존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러 협정과 협상의 문제점만을 부각하면 하면 정부는 이도 저도 못하게 된다.  정부를 철저히 감시하고 책임을 엄격히 따지되 현안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권한을 위임하여 재량과 창의성을 발휘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현안에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향후 2년, 교역체제 내 한국 운명 결정
 
어려운 상황이지만 우리에게는 두 전환점이 있다. 먼저 기술 개발의 저력이다. 독보적인 기술력은 이 모든 문제의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다. 자동차·철강과 달리 반도체가 아직 무역 분쟁의 파고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를 선점할 수 있는 대규모 투자와 연구개발(R&D) 사업이 이루어진다면 새로운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한 정부 지원과 규제 완화가 시급하다.
 
북한과의 경협,  나아가 신북방정책은 또 다른 활로다. 제대로만 추진된다면 막힌 활로를 뚫을 수 있다. 다만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산 넘어 산이다. 정치적 환경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남북 경협 문제만 하더라도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서면 법적인 장애물도 만만치 않다. 대북 경협 특혜 및 지원이 초래하는 통상·투자협정 저촉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지가 관건이다. 그 준비 작업을 시작하여야 한다. 국가적 역량을 모으고 또 운이 따른다면 두 전환점은 현재의 난국을 극복하기 위한 도약의 발판이 될 수 있다.
 
재선 도전을 선언한 트럼프 대통령은 앞으로 2년간 지금의 정책 기조를 지속할 것이다. 올해 말 또는 내년 초 북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마련되고 남북 경협이 본격화되면 그 과실을 느끼는 데에 대략 지금부터 2년여의 시간이다. 위기에 처한 WTO가 앞으로 어떠한 모습을 갖게 될지 2019년 12월 각료회의를 거치며 윤곽이 나타나고 이에 따른 주요국의 후속 움직임은 그 이듬해 나타난다. 지금 광풍처럼 퍼져나가는 여러 보호무역조치와 보복조치의 수명도 얼추 2년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강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기간도 대략 향후 2년이다. 이래저래 앞으로의 2년이 국제 교역 체제에서 우리의 운명을 가를 중요한 시기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을지, 아니면 ‘을’의 위치가 더욱 공고화될지 이 시기에 결정될 것이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리셋 코리아 통상분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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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