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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분노와 도덕의 정치를 넘어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

삶은 고단하고 일상은 우울하다. 전직 대통령들이 감옥에 가고, 당장 세상이 뒤집힌 것만 같지만 새삼 돌이켜보면 바뀐 것도, 바뀔 것도 없다. 정치는 계속 너절하게만 지속될 것이며, 여전히 우리는 어제의 그 전철과 그 버스를 타고 각자의 무거운 짐을 진 채 서로를 애써 외면하려고 애꿎은 전화기만 무의미하게 손가락으로 긁어댈 것이다. 정치로부터 소외되고 무관심한 시민들의 모습은 기존 어느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후세의 사가(史家)들이 오늘의 한국 정치와 대중 여론을 평가한다면 가위 “분노의 시대” 혹은 “도덕의 시대”라 부를지 모른다. 조용한 무관심의 수면 아래 잠복하고 있는 대중적 분노의 신경절(神經節)을 누가 어떤 형태로든 건드리게 되면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파괴력을 지니고 폭발한다. 그 폭풍의 경로에 서 있는 것이 누구이건 일단은 피하고 볼 일이다. 대중적 분노를 촉발하는 뇌관은 거의 예외 없이 도덕적 기준인 것으로 보인다.
 
좀 지난 이야기지만, 한진그룹 ‘패밀리’의 각종 불법과 비리가 파헤쳐지고 알려지게 된 계기는 사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물컵을 던진 사소한 사건이 그 발단이었다. 엄밀하게 말해 단순 폭행에 지나지 않던 조그마한 사건이 한 재벌그룹 전체의 총체적인 문제로까지 비화한 데에는 사실 ‘인성’, 즉 도덕적 기준이 가장 큰 관건이었다. 가족력(家族歷)이라 할 만한 인격 장애의 일화들이 누증되고 양념처럼 버무려져 톱뉴스를 장식하던 때를 생각한다면 정작 재벌 지배·상속의 구조적 문제들은 오히려 부차적이었고, 이들을 대상으로 청구된 구속영장이 네 번이나 기각된 후 최근의 반응은 조용하기만 하다.
 
이를 단순히 포퓰리즘이라 불러버리기는 조심스럽다. 지난 박근혜 정권을 탄핵했던 핵심 동력도, 오늘의 정치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그리고 미투 운동을 필두로 한 기득권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가능케 한 것도 이런 대중적 분노와 도덕적 기준이 아니었던가. 가장 중요하게는 사법부의 권위와 법과 절차의 지배가 신뢰받지 못하는 곳에서 도덕적 기준이라도 없으면 무엇이 남아 있을 것인가.
 
박원호칼럼

박원호칼럼

그런 의미에서 지난 지방선거는 분노와 도덕의 선거이기도 했다. 많은 후보가 ‘응징’되었고, 몇몇 선거는 후보자의 도덕성 검증과 이를 둘러싼 상호 비방으로 일관된 바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작 ‘지방정치’에 대한 논의는 얼마나 이뤄졌던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부패하고 부도덕한 정치지도자를 선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지도자에게는 도덕성 이외에도 필수적인 덕목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이다. 나는 무능하고 청렴한 군자, 수신제가(修身齊家)만 겨우 한 사람을 뽑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분노와 도덕의 정치는 사실 망각과 허무의 정치이기도 하다. 불과 2년 전 “민중은 개·돼지”라고 언급했던 어느 고위 공무원에 대한 당시의 대중적 분노는 결국 정부로 하여금 최고의 중징계인 파면을 내리게 했지만, 사실 그 판단은 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매우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망각되는 것도, 그 결말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도 필연적이지 않을까. 아마 2년 전 그 당시, 개인에 대한 분노와 도덕으로 징벌하는 대신, 교육부와 관료 일반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근대적 정치라는 것은 사실 도덕을 초월하는 정치, 혹은 도덕이 필요 없는 정치라고도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정치라는 것이 타락하고 비도덕적인 사람들의 일이란 뜻이 아니라 타락하고 비도덕적인 최악의 이기적인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같이 기거할 수 있는 집을 어떻게 지을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집을 정말 애써 지을 수만 있다면, 막상 평균적인 사람들이  이곳에서 같이 살아가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며, 가끔은 천사들이 기분 좋게 이웃에 보너스처럼 깃들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적 정치의 최고 화두는 공동체의 지속과 공존이 아닌가 생각한다.
 
분노와 도덕의 정치만큼 시원한 정치는 없겠지만, 명백한 악당이 누구이며 손쉬운 정답이 무엇인지를 역설하는 이는 대체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삶은 고단하고 일상은 우울하겠지만 그래도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때로는 예기치 않은 장면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한화 이글스가 갑자기 연승을 거두기도 하고, 지지하는 야당이 여당으로 탈바꿈하기도 할 것이며, 느닷없이 북한의 지도자는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다음 게임, 다음 선거, 다음 수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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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