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이하경 칼럼] “돼지 립스틱” 저주에 반대한다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가 비핵화 협상을 “돼지에게 립스틱 칠하기 같은 포장”이라고 조롱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3차 평양방문(6~7일) 이후 미국의 유력 언론과 전문가들로부터 쏟아진 “속은 것 아니냐” “빈손이다”류의 비판과는 차원이 다른 독설이다. 그는 트럼프 정부에서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돼 한국 정부의 아그레망(임명동의)까지 받았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내정이 취소된 인물이다. 이제 겨우 출발점에 선 협상에 사망 선고를 내린 건 지나쳤다.
 
물론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태평양을 건너 평양으로 날아온 폼페이오를 만나지 않고 백두산 삼지연 감자가루 생산공장에서 현지지도를 한 장면은 무례하고 황당했다. 폼페이오가 “회담이 건설적이고 진전을 이뤘다”고 말한 직후에는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강도적 비핵화 요구”라고 반발하는 담화를 발표했고, 워싱턴 여론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오죽하면 폼페이오가 “언론이 어떻게 보도하는지 신경을 쓴다면 나는 미쳐버릴 것(If I paid attention to what the press said, I’d go nuts.)”이라고 했겠는가.
 
김정은의 비핵화 진정성에 대한 워싱턴의 의구심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시진핑 주석과의 세 차례 북·중 정상회담, 미·중 무역전쟁 격화로 중국 쪽의 대북제재망이 느슨해졌다. 대북제재의 기둥인 미·중 공조가 흔들리면서 비핵화 압박의 강도도 약화됐다.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두 번째 친서에서는 각하(Your Excellency)라는 미사여구(flowery language)가 6번이나 등장하지만 비핵화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비핵화 이행 방안을 더 구체화할 것을 북한에 당부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북한의 진심이 무엇이길래 “북한이 협상에 찬물을 끼얹었다”(CNN)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김정은이 소극적 자세를 보인 것일까. 미국과의 계산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에 비핵화를 위한 실질적 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반면 북한은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의 우선순위가 1.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2. 항구적 한반도 평화체제 3.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4. 미군 유해 송환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하경칼럼

이하경칼럼

비핵화 이전에 과도적 체제보장 조치인 종전선언부터 하자는 것이다.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중단했으니 비핵화 조치에 나서라는 미국의 요구는 수용하지 않고 있다. 자기들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중지했고, 풍계리 핵실험장에 대한 불가역적인 폭파·폐기 조치를 했는데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했다고 압박하지 말라는 것이다.
 
김정은은 “핵을 포기하고 중국·베트남보다 성장하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진심일 것이다. 그러나 군부는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한 핵무장을 포기하는 데 대해 주저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협상파·온건파의 입지를 넓혀줘야 한다. 필요하다면 김정은과 제2, 제3의 빅딜을 추진하고 북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에 귀 기울이면서, 완전한 비핵화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설득하고 도와줘야 한다.
 
김정은도 분명하게 결단해야 한다. 이번이 하늘이 내려준 마지막 기회다. 진정한 비핵화를 통해 체제보장을 받고 잘살 생각을 해야 한다. 한국과 미국은 여론이 지배하는 사회다. 비핵화의 초기 이행 조치가 미뤄지면 문재인과 트럼프가 여론의 압력을 견뎌낼 수 없다. 특히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는 심각한 상황이다.
 
최빈국인 북한이 정상국가로 일어서려면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공조가 필수적이다. 베트남도 1986년 개방·개혁 정책인 도이머이를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경제가 살아난 것은 95년 미국과 국교정상화를 한 뒤부터였다. 비핵화를 걷어차고 미국과 등 돌리면 안 되는 이유다.
 
비핵화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난한 과정이다. 북·미 정상이 만나 잘해보자는 정치적·포괄적 선언을 한 지 이제 겨우 한 달 지났고, 후속 실무협상도 한 차례 열렸을 뿐이다. 첫 번째 흥정에서는 일단 최고의 호가를 제시하고 상대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게 거래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난관은 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희망가격의 차이는 좁혀질 것이다.
 
초반에 실패를 선언하고 대결 상태로 돌아가기보다는 어떻게든 협상의 불씨를 살리는 게 낫다. 더구나 북·미의 정상이 모처럼 신뢰를 바탕으로 협상을 이끌고 있지 않는가. 핵을 버리는 일은 북한 혼자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트럼프는 지난주말 "평화를 보길 원한다”며 "우리는 전쟁에서 빠져나오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북한을 악마화할 때가 아니다. “돼지에게 립스틱 칠하기” 식의 성급한 저주에는 단호히 반대한다. 
 
이하경 주필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