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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2035] 히잡 쓴 난민이 두렵다고?

민경원 대중문화팀 기자

민경원 대중문화팀 기자

“집 앞 빵집에 갔는데 히잡 쓴 가족들이 와서 빵 먹는데 미안하지만 너무 무섭고 싫었어.”
 
얼마 전 친구 A가 단체 채팅방에 올린 글이다. 아이 키우는 엄마 입장으로서 안전하다 여긴 공간까지 낯선 사람들에게 침해되는 것이 싫다는 요지였다. 그는 청와대에 예멘 난민 인정 반대 청원까지 했다며 자신이 느낀 공포를 토로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친구 B는 학창 시절 멕시코에서 살다 왔고, 친구 C는 현재 싱가포르에 살고 있다. 나 역시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우리는 모두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본 경험이 있었다. 혹여 김치 냄새라도 풍길까 봐 눈치 보고, 동양인이라고 무시당할까 두려워했던 시간이 있기에 차마 “싫다”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A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안하지만’이라고 느꼈을 터다. 국제사회 어딘가에 존재하는 난민은 도움을 주어야 마땅한 존재지만, 내 앞에 있는 난민은 언제 공격할지 모르니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라니. 더구나 출도(出道) 제한 조치로 제주도에 발이 묶여 있는 이들이 서울 한복판에 있을 리 만무했다.
 
두려움은 무지와 상대성에서 비롯된다. 내가 지금 이 사회에서 다수에 속하는 구성원인데 소수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다른 특성이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반영된 결과다. 하지만 그들이 더 두렵지 않을까. 8300㎞나 떨어진 곳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것은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니 말이다. 인종·성별·종교 등 이들을 재단하는 대립항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그 좁은 입지마저 줄어든다.
 
우리의 준거집단은 좀 깨어질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모두가 강남 사는 고학력 전문직을 꿈꾼다 해도 그것이 모두의 주관적 지위가 될 수는 없다. 자신이 동일시하고 싶은 집단만 존재하는 세상은 불가능할뿐더러 누구나 상대적으로 약자가 될 가능성이 존재한단 것이다. 이를 인정하면 내가 속해 있지 않은 집단에 대한 평가 기준 역시 달라지지 않을까.
 
“여기선 우리가 소수자야.” 교환학생 시절 히스패닉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고 자란 미국 LA에선 인종차별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동양인이 많은 하와이에선 어딜 가나 불편한 시선을 감수해야 한단 얘기다. 자연히 그들은 남들보다 민감한 소수자 감수성을 갖게 됐다. 어쩌면 연일 페미니즘 집회와 난민 찬반 집회가 이어지는 지금이야말로 젠더 및 인권 감수성을 동시에 높일 기회일는지도 모른다.
 
민경원 대중문화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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