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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보다 사람” 외친 나혜석, 80년 지난 지금 무엇이 달라졌나

기자
손민원 사진 손민원
[더,오래] 손민원의 성·인권 이야기(13)
조선의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貞操)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 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에게 정조를 유린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 (삼천리, 이혼고백서, 신생활에 들면서, 1930)
비운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왼쪽). [사진제공=나혜석학회]

비운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왼쪽). [사진제공=나혜석학회]

 
이 글은 1934년 ‘삼천리’ 8~9월호에 실린 나혜석의 ‘이혼고백서’의 일부다. 80여 년 전에 쓰인 글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선 사회의 가부장제가 갖는 차별적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부친이 군수를 지낸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1913년 진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해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신여성이다. 나혜석은 유학 중 시인 최승구를 만나 사랑했지만 1916년 그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다.
 
조선 남성의 정조관념은 이상하외다
당시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결혼 조건으로 네 가지 약속을 요구했는데 이 또한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일생을 두고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의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줄 것’, 그리고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이었다. 이 요구를 모두 받아들인 김우영은 신혼여행 길에 실제로 최승구의 묘에 들러 비석을 세워주었다고 한다.
 
나혜석(왼쪽 첫째)과 그녀의 남편 김우영(왼쪽 둘째). [중앙포토]

나혜석(왼쪽 첫째)과 그녀의 남편 김우영(왼쪽 둘째). [중앙포토]

 
결혼 후 7년 뒤 부부는 유럽으로 떠났다. 3년 동안 유럽에 체류하며 나혜석은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김우영은 독일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프랑스는 나혜석에게 서구 여성의 삶을 경험할 기회가 됐고, 새로운 영감을 주기도 했지만 파리의 연인 최린을 만나게 되는 장소가 됐다.
 
한때 사랑에 빠진 최린과의 편지가 남편에게 알려지게 되고, 남편 김우영은 이혼을 요구한다. 최린도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나혜석은 ‘이혼고백서’를 발표하고 최린을 상대로 ‘정조유린죄’로 고소하기도 한다. 이 사건들로 나혜석은 세간의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비난받았을 것이며, 조소와 냉대를 받았을 것인지 상상이 간다.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화랑에서는 그녀의 그림을 냉대했으며, 모든 학교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나혜석은 가난에 시달리고 병들어 갔다. 사람들에게 나혜석은 재능 있는 예술가라기보다 그저 ‘바람피우다 이혼당한’ ‘모성의 역할을 하찮게 여긴’ 죽을 때까지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정조를 팽개친 부도덕한 신여성일 뿐이었다.
 
1948년 12월 10일. 서울 원효로 서울시립 자제원(慈濟院) 무연고자 병동에 한 여성 행려병자가 있었다. ‘신원미상, 무연고자’, 사망 원인은 ‘영양실조, 실어증, 중풍’, 추정 연령은 65~66세(사망 당시 실제 나이는 52세). 이 행려병자가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 여권운동의 선구자, 독립운동가, 문필가였던 나혜석이었다.
 
초당대 서정자 명예교수가 공개한 나혜석의 육필편지. [사진제공=우라카와 도쿠에]

초당대 서정자 명예교수가 공개한 나혜석의 육필편지. [사진제공=우라카와 도쿠에]

 
나혜석은 ‘남녀평등’이 무엇인지 단어 자체가 없던 당시 억압된 조선 여성의 권리에 주목했고, 가부장적 성차별의 덫에 갇힌 여성을 대변하고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라는 주장을 글로만 쓴 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몸소 실천한 것이다.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질타했던, 글과 그림으로 ‘여자도 사람’임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그는 남자, 여자 이전에 사람이라며, 여자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며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해 줄 것을 거듭 주장했다.
 
만약 나혜석이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태어났더라면 그 당시 사회에선 어떤 시각으로 평가받았을까? 아마 능력과 재능을 갖춘 호탕한 성품의 남성으로 한 생을 살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정조를 목숨보다 소중히 지켜야 한다며 여성을 짓눌렸던 조선 시대의 ‘정조 이데올로기’는 현대에도 여성이 끊임없이 성폭력 피해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한국판 카사노바’ 재판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한다”
1955년 70여명의 여성을 농락해 혼인빙자간음죄로 기소된 댄스교사 박인수. 1심 법원은 "법은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한다."며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중앙포토]

1955년 70여명의 여성을 농락해 혼인빙자간음죄로 기소된 댄스교사 박인수. 1심 법원은 "법은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한다."며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중앙포토]

 
1955년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에서 박인수는 70여명의 여성을 농락해 혼인빙자간음죄로 기소됐다. 그때 박인수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그들 중 누구와도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었고, 70명 중 단지 1명만 처녀였노라”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1심 법원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한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2심 법원은 “댄스홀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내놓은 정조가 아니다”며 징역 1년 형을 선고한 사건이었다.
 
1988년 당시에는 강간범을 ‘가정파괴범’으로 지칭해 처벌했다. 여성의 정조는 여성이 가정을 위해 지켜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어, 피해자가 겪은 고통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0여 명의 여성을 살해한 유영철은 자신의 범행 동기를 말하며 “여성이 함부로 몸을 놀리거나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고…”라며 자신이 살해한 여성이 마치 몸을 함부로 놀려 자신이 처단했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에서 보듯 우리 사회가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절대적 가치로 여겼음을 드러내고 있다.
 
젠더 감수성은 ‘나혜석의 조선’에서 못 벗어나
그가 사망한 지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국 여성은 조선사회의 여성에 비해 나아졌는가? 1995년 형법이 개정되면서 제32장의 제목은 ‘정조에 관한 죄’에서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뀌어 ‘정조에 관한 죄’는 사라졌다. 다양한 법‧제도가 만들어졌고, 남성의 역차별을 운운할 만큼 여성의 목소리는 커졌다.
 
우리 생각을 지배하는 젠더 감수성은 여전히 크게 변화하지 못했고, 수많은 데이트 폭력 사건이 지금도 진행중이다. [중앙포토]

우리 생각을 지배하는 젠더 감수성은 여전히 크게 변화하지 못했고, 수많은 데이트 폭력 사건이 지금도 진행중이다. [중앙포토]

 
올해 초에는 젠더 혁명이라고까지 칭하는 ‘미투 운동’의 진행 선상에 우리는 있다. 그러나 우리 생각을 지배하는 젠더 감수성은 나혜석의 조선과 그리 큰 변화를 발견하지 못하겠다. 아직도 성폭력과 관련된 법 집행 과정에서 ‘처음이었느냐’의 여부를 묻는 경우도 많고, 과거의 성 경험 같은 모욕적 질문들, 꽃뱀으로의 색안경을 낀 발언들로 2차 피해를 보는 일이 많은데, 이는 정조관념에 따라 보호의 여부를 나누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나혜석이 살고 있던 조선의 성 불평등, 성차별적 사회 규범은 너무나 천재적이었던 한 사람을 ‘여성의 규범’이라는 사회가 만든 굴레에 가두어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 시절의 많은 사람은 거기에 동조했다. 그리고 강남역 사건, 수많은 데이트 폭력 사건들 등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혜석이 주장한 여성의 인권은 ‘여성’이란 존재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은 구분되지 않아야 한다. ‘여성’ ‘남성’ ‘노인’ ‘장애인’ ‘성 소수자’ ‘난민’ 등으로 분류하지 말고 그냥 ‘사람’으로 보자. 평등의 가치를 저해하는 것에 대한 다른 목소리가 있을 때 무슨 목소리인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손민원 성·인권 강사 qlov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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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