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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구의 퍼스펙티브] 낭만적 기대 아닌 담대한 인내가 한반도 평화 가져온다

북한 비핵화 
진정 북한의 비핵화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언대로 조속한 시일 내에 실현될 것인가?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면서 마지막 남은 냉전의 잔설이 녹아내리는 역사적 전환점을 찍을 것인가? 북한은 진정 비핵화를 실행할 강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기존의 핵·경제 병진 노선에서 경제 개혁개방으로 그들의 생존 방정식을 확실히 재구성할 것인가? 그러나 여전히 짙은 불확실성이 동북아시아 지역을 감싸고 있는 시점이다.
 
지난달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성의 있는 비핵화 조치가 계속 지연되면서 세계 여론이 점점 냉랭해지는 가운데 지난 주말 미국 폼페이오 국무장관 일행은 평양에서 북한과 고위급 회담을 열었다. 그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고 핵심 문제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양국의 비핵화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 적지 않은 거리가 있고 비핵화 방법과 수순에서도 견해 차이가 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거리를 좁히고 차이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이제 실무급 회담이 제도화되면서 협상은 장기전 양상으로 바뀌는 조짐이 있다, 그리고 북한의 협상전술이 과거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불안 요인이다. 장기전으로 갈 경우 김정은 위원장은 제재 해제에, 트럼프 대통령은 오는 11월 의회 중간선거 등 국내 정치에 목을 매게 될 전망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전개 속에서도 문재인 정부는 남북 정상 간의 판문점 선언에 대한 후속 조치를 속도감 있게 추진해가고 있다.
 
합리적 기대, 합리적 의심, 낭만적 기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지금 세계는 북·미 정상회담 결과에 대하여 세 개의 상반된 시각이 복잡하게 얽혀가며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지금 미국 언론과 의회 내부에서는 합리적 기대와 합리적 의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부 전문가나 정치 그룹에서는 김 위원장의 선의를 믿는 가운데 매우 낭만적인 기대를 갖고 있기도 하다.
 
첫째, 합리적 의심(rational suspicion)론자들이다. 그들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미국 측 입장에서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약속과 담보 없이 끝난 실패한 회담이고 북한 측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불완전하고 불균형적인 협상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비핵화의 수순(sequence)과 방식, 그리고 속도(speed)를 추후 협상에 맡긴다면 미국은 북한의 집요한 전술 전략에 오랫동안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마치 극단적 선택권만 미국이 갖고 실리적 선택권을 북한 김 위원장이 독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혹평도 있다. 그리고 김 위원장은 중국과 밀착하면서 대북 제재를 이완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비핵화의 속도를 최대한 늦추면서 핵보유국의 위치를 굳혀 나가려 할 것이라는 우려가 배어있다.
 
둘째, 합리적 기대(rational expectation)론자들은 북·미 양국의 정보기관이 주도하는 협상의 특성을 고려할 때 공동 합의문에 담지 못한 세세한 합의 사항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즉 그들은 그동안 진행되어 온 실무협상에서 비핵화에 대한 견해 차이를 상당히 좁혔다는 것, 그리고 거의 핵보유국 단계에 이른 북한의 비핵화에는 많은 전문적 검토가 필요하고 협상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국제적 제재와 압박 수단은 비핵화가 일정 수준 이상 진전될 때까지 확실히 존치할 것이므로 북한이 오래 견디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다.
 
셋째, 낭만적 기대(romantic expectation)론자들이다. 중국과 일부 논자들은 북한의 자발적, 선의에 의한 비핵화를 기대하며 이를 촉진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로 한미 연합훈련 중단, 단계적 제재 완화를 주장한다. 그리고 북한이 땀을 흘려 스스로 옷을 벗으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북·미 간 비핵화 협상과 별도로 남북화해 협력을 속도감 있게 밀고 나가다 보면 비핵화도 견인하면서 북한 체제를 경제 발전 중심으로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보 전문가들은 비핵화의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북한이 원하는 한미 연합훈련 중지를 선언하고 심지어 주한미군의 장래에 대하여 자신의 속내를 내보인 것은 지나친 감상주의에 근거한 낭만적 기대라고 비판한다. 그들은 이러한 사태가 계속되면 국방 태세는 약화하고 허술한 전략으로 북한의 집요한 전략에 말려들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다.
 
떠오르는 위험 요소들
 
우리는 지금 가치적·정신적 대혼란기에 처해있다. 일련의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에 견줄만한 대변혁을 몇몇 정상들이 하향식으로 모호하게 합의하고 이를 성공적인 회담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아직 서로 신뢰는 쌓이지 않고 합의를 뒷받침할 기초 하부구조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따라서 앞으로 북한 비핵화를 위한 북·미 협상 과정은 길고도 험난할 것이고 많은 위험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예상되는 가장 위험한 요소는 첫째,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이해 계산의 기준에 관한 것이다. 비록 냉전 해체 이후 미국이 처해있는 처지와 고민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가 동맹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를 중시한다면 비핵화의 길은 멀어지고 한미동맹은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지금 미국 의회 내 여론이 급격히 악화하고 있어 트럼프 행정부의 협상 전략에 제동이 걸리거나 북한과의 협상에 반대하는 매파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셋째, 중국의 방해 공작과 김 위원장의 감춰진 전술 전략이 영합하는 가운데 그들이 잘못된 계산에 빠지는 경우이다. 넷째,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의 대야에다 리트머스 시험지를 담그며 북한 김 위원장이 구두로 약속한 사항들이 조속히 시행되는지를 예의 주시할 것이다. 그러나 상당 기간 신뢰 축적에 실패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불가피하게 정반대의 행동에 나서게 될 수도 있다. 만일 비핵화 협상이 암초에 부딪힌다면 비핵화를 전제로 한 남북교류협력의 확대는 많은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비핵화에 많은 불안 요인 도사려
 
지난 4월 말 서울에서 열렸던 제3차 NEAR 한·중·일 서울프로세스에 참석한 20여명의 세계 석학은 김 위원장의 태도 돌변과 약속에 대하여 믿음보다는 합리적 의심에 더 기우는 듯한 분위기였다. 지금 북한이 보통국가로서 새로운 생존 방정식을 모색하고 있기는 하나 그 방법, 순서와 속도는 그들 방식대로 설정되고 외부에 쫓기듯 밀려서 서두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김 위원장은 제재 해제와 비핵화를 연계시키면서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미국의 다음 대통령 임기까지 상황을 끌고 가려고 할 것이다.
 
또 그는 임기 없는 젊은 지도자로서 북한의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마치 바다 간척지 땅에서 소금기 빼듯 오랜 시간을 가지고 서서히 개혁·개방의 길을 가겠다는 속셈인 것 같다. 한편 중국은 북한이 친미 국가가 되지 않도록 모든 방안을 강구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는 많은 불안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로 가는 길은 험하고 멀지만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킨다면 이것은 세계 문명사에 큰 전환점을 찍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세대의 역사적 소명인 생존 방정식과 통일 방정식을 푸는데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평화로의 담대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에는 응분의 비용과 위험 부담이 따르는 것이다. 또 우리는 상호 간 신뢰 자산의 축적과 국력의 지속적인 신장 없이 평화를 지키기 어렵다는 엄격한 현실의 실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담대한 선택에 따른 담대한 인내
 
실로 모든 담대한 선택에는 담대한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 한반도의 큰 그림 속에서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가며 담대한 인내심을 견지하는 일이다. 낭만적 기대 속에 너무 앞서가지 말고 한발 한발 진지하게 걸어가야 할 것이다. 물론 앞으로 북한의 개혁·개방이 이루어질 때를 상정하면서 선점 효과를 노릴 필요성도 있고 남북대화의 모멘텀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현실적 불가피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북한 내부의 변화와 수용 태세가 가시화되지 못했고 유엔 제재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너무 빨리 서두를 경우 스스로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남북 스포츠·문화·인적 교류를 확대하는 것은 좋으나 사회간접자본 등 방대한 자본 투입이 필요하고 국내·국제사회에서 충분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할 무거운 협력 사업에 대하여는 연구 검토를 넘어서는 실질적 진척에는 속도 조절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 우리 모든 국민이 한반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한 점(點) 한 점의 일들이 한국의 미래에 선(線)이 되고 면(面)이 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상황을 예의 주시해야 할 때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는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너무 일찍 서둘러서는 안 되고 (not hasty) 너무 주저하고 두려워해서도 안 되며 (no hesitation) 비핵화 협상, 북한의 변화 등 주변 여건과 조화를 이루면서 (harmonization) 평화 정착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야 할 것이다. 이제 이러한 담대한 인내를 뒷받침할 기초 자산은 튼튼한 경제력이며 앞으로 누구도 믿고 의지할 나라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자력자강(自力自强) 할 때이다.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전 산업자원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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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