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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로 살인사건을 예언하다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26> 모스크바: 범죄 소설의 태동
1866년 1월 12일 모스크바에서 대학 휴학생 다닐로프가 고리대금업자 포포프와 그의 하인을 잔혹하게 칼로 찔러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러시아 주요 일간지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고, 이듬해 2월 다닐로프의 형이 확정될 때까지 심리 과정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1866년 4월 4일 러시아 황제 암살을 시도한 모스크바대 휴학생 카라코조프의 얼굴. 초상화를 잘 그려 명성이 자자했던 ‘국민 화가’ 일리야 레핀이 그렸다.

1866년 4월 4일 러시아 황제 암살을 시도한 모스크바대 휴학생 카라코조프의 얼굴. 초상화를 잘 그려 명성이 자자했던 ‘국민 화가’ 일리야 레핀이 그렸다.

 
다닐로프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도스토옙스키였다. 그는 1866년 1월부터 ‘러시아 통보’지 에 ‘죄와 벌’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휴학생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한다는 내용을 축으로 하는 소설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다닐로프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소설을 써서 원고를 넘겼고, 다닐로프는 잡지에 게재된 1회분 소설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다. 놀라운 우연의 일치였다.  
 
독자의 호기심과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갑자기 도스토옙스키는 살인을 예고한 선지적 작가가 되었다. 이때부터 ‘죄와 벌’은 ‘러시아 통보’의 간판스타가 되었다. 사건 이후 단박에 구독자 수가 500명이나 증가했다. 독자들은 다닐로프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죄와 벌’을 읽었다. 다닐로프 사건과 ‘죄와 벌’은 내용이 많이 달랐지만 이미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되었다. 연재소설의 장점이 이때만큼 부각된 적도 없다. 독자는 매 회 실리는 소설을 이른바 ‘트루 크라임’처럼 받아들였고 현실과 소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서로를 반영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소설 『죄와 벌』의 표지

소설 『죄와 벌』의 표지

시대의 흐름에 올라탄 작가에게 운명의 여신은 계속해서 미소를 보냈다. ‘죄와 벌’이 연재중이던 1866년 4월 4일, 모스크바 대학을 중퇴한 카라코조프가 여름 정원 입구에서 황제를 향해 피스톨을 쏘았다. 총알은 빗나갔고 카라코조프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대학 휴학생이 시도한 황제 암살 사건으로 러시아는 발칵 뒤집혔다. 도스토옙스키가 연재하는 소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폭되었다. 독자는 카라코조프와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모두 휴학생에다 급진적 사상을 가졌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카페와 살롱과 대학 강의실에서 사람들은 ‘죄와 벌’ 얘기로 꽃을 피웠다. 훗날 스트라호프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1866년  한 해 동안 독자들은 오로지 하나, ‘죄와 벌’만 읽었다.”
 
이 소설로 마침내 도스토옙스키는 최고 자리에 올랐다. 모든 걸작이 다 그렇겠지만 『죄와 벌』은 오랜 시간 우여곡절을 거치며 숙성된 후에야 탄생할 수 있었다. 소설의 구상은 유형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 그 고독한 시간에 그는 ‘어느 범죄자의 고백’에 관한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 “형 기억나? 내게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았다면, 형기를 마친 후 쓰고 싶다고 했던 소설 말이야 내 가슴과 영혼을 모두 이 소설에 쏟아부을 거야. 고뇌 속에서, 나 자신이 둘로 갈라지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순간에, 나무 판대기에 누워 형기를 채우며, 그 소설을 생각했어 소설은 결정적으로 내 명성을 높여줄 거야.” 아직 형이 살아있을 때인 1859년에 쓴 편지다.  


스타 작가로 떠오르자 졸속 집필 멈춰
그는 사실 “결정적으로 명성을 높여줄” 소설을 반드시 써야만 했다. 『죽음의 집의 기록』이 훌륭하긴 했지만, 언제까지 유형지 회고담을 우려먹으며 살 수는 없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평이 좋았지만, 너무 통속적이어서 걸작으로 남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지하에서 쓴 수기』는 대단한 작품이었지만, 너무 시대를 앞서가는 바람에 독자들이 어려워했다. 그러니 이제는 정말 무언가 결정적인 “한 방”, “홈런”이 나와야 했다. 그의 나이 벌써 45세였다.  
 
1866년 여름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 인근 류블리노에 있는 여동생의 별장에서 휴가를 함께 보내며 『죄와 벌』을 썼다. 19세기 초 류블리노의 풍경 스케치

1866년 여름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 인근 류블리노에 있는 여동생의 별장에서 휴가를 함께 보내며 『죄와 벌』을 썼다. 19세기 초 류블리노의 풍경 스케치

집필을 시작한 것은 1865년 비스바덴에서였다. 비스바덴 도박장을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면서도 그는 꽤 많은 분량을 썼다. 1865년 9월 28일 카트코프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상당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지금 쓰고 있는 것은 이제까지 쓴 어떤 작품보다 훌륭할 것입니다. 마무리 지을 시간만 충분하다면요.”  
 
그러나 범죄자 자신의 ‘일인칭 고백’ 형식은 문제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범죄 소설의 핵심인 서스펜스가 희석되었다. 그에게 독자의 흥미를 유지시킬 서스펜스는 생명과 같았다. 11월에 그는 절반 가까이 쓴 원고를 소각하고 완전히 새로 쓰기 시작했다.  
1148호 학교 교정에 세워진 도스토옙스키 흉상. 조각가 쉬쉬코프의 2007년 작품이다.

1148호 학교 교정에 세워진 도스토옙스키 흉상. 조각가 쉬쉬코프의 2007년 작품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졸속으로 쓰는데 이골이 난 작가로 알려져 있다. 돈 때문에 서둘러 쓰다 보니 제대로 원고를 다듬을 시간이 없었다. 부인의 회고처럼 “그는 기한 내에 원고를 보낼 수 있도록 최소한의 선에서 필사본을 검토했다. 그래야만 고료를 조금이라도 빨리 받을 수 있었으니까.” 도스토옙스키 자신도 종종 자기는 “언제나 서둘러 써야 했다”며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원고를 다듬을 수 있는 다른 작가들이 부럽다고 구시렁거렸다.  
 
그러나 『죄와 벌』 원고 소각은 다른 얘기를 한다. 그는 스스로의 글에 최고의 잣대를 들이댔고 조금이라도 미흡하면 가차 없이 파기했다. 서둘러 쓰긴 했지만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다른 기준은 엄격하게 고수했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는 도스토옙스키의 졸속 집필 스토리를 소심한 작가의 ‘발뺌 전략’이라 보기도 한다. 독자와 평론가의 평가에 극도로 예민했던 그에게 “서둘러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언제나 편리한 도피구였다는 얘기다.  
 
다닐로프 사건으로 촉발된 독자의 호응 덕분에 도스토옙스키는 다시 희망으로 불탔다. “이번 소설은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어요. 작가로서의 명성이 급상승했어요.” 그러나 호평을 유지해야 한다는 중압감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는 ‘죄와 벌’의 연재가 끝나면 당대 최고의 작가가 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될 터였다. “내 미래는 전적으로 이 소설의 성공적인 마무리에 달려있어요.”
러시아에서 학교는 별도의 이름 없이 번호로 불린다. 류블리노에 있는 1148호 학교 에는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러시아에서 학교는 별도의 이름 없이 번호로 불린다. 류블리노에 있는 1148호 학교 에는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쓰는 내내 살인에 몰입 하인도 도망쳐
1866년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지인들 대부분이 피서를 떠나 텅 빈 페테르부르크에 혼자 남아있자니 외로웠다. 스트레스는 쌓여가고 치질은 더 악화되었다. 모스크바로 갔지만 그 곳 역시 텅 비긴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너무 그리운 작가는 인근 류블리노에서 여름 한철을 보내는 여동생을 방문했다. 여동생 베라 부부의 별장은 여덟이나 되는 아이들과 하인들, 그리고 인근 별장에서 놀러온 사람들로 늘 북적거리고 활기가 넘쳤다. 도스토옙스키는 근처 셋집에서 두 달 동안 지내면서 소생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느즈막하게 일어나 여동생네 별장에 가서 식구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한 후 아이들과 문자 그대로 “뛰어 놀았다.” 조카와 질녀, 그리고 그들을 방문한 친구들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마흔다섯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청소년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온갖 여흥과 장난을 시작하는 것은 으레 도스토옙스키였다. 술래잡기를 비롯한 바깥놀이를 즐겼고, 아이들과 밤늦도록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당에 설치한 자그마한 가설무대에서 가족 공연을 하기도 했다. “내 남편은 아이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지녔다.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재능을.”
 
유서 깊은 모스크바 귀족 가문 두라소 프의 저택. 지금은 박물관이다.

유서 깊은 모스크바 귀족 가문 두라소 프의 저택. 지금은 박물관이다.

류블리노의 낮이 힐링의 시간이었다면 밤은 치열한 집필의 시간이었다. 원래 그는 ‘죄와 벌’을 쓰면서 스텔롭스키와 계약한 소설도 함께 쓸 예정이었다. 안나 코르빈-크루콥스카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4개월 동안 두 편의 소설을 동시에 쓴다는 전대미문의 계획”에 대해 떠벌였다. 한편은 오전에, 다른 한편은 오후에 쓸 계획이라고 자랑했다. “확신하건대 우리나라 문인들 중 아무도, 살았거나 죽었거나, 나와 같은 조건에서 글을 쓴 사람은 없을 겁니다. 투르게네프 같은 작가는 그런 생각만으로도 아마 죽어버릴 겁니다.”  
 
그 “전대미문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악덕 출판업자와 계약한 다른 한 권, 훗날 『도박꾼』으로 출간될 소설은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가 『죄와 벌』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었는가를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동생은 소설가 오빠가 혼자 셋집에 머무는 동안 간질발작을 일으킬까봐 걱정이 되어 하인 한 사람을 딸려 보내주었다. 하인은 며칠 뒤 무서워서 그 집에 더 이상 못 있겠다며 돌아와 몸서리를 쳤다. 주인 나리가 아무래도 살인을 저지를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밤새도록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며 큰소리로 무슨 살인이니, 도끼니 하는 얘기만 떠들어댄다는 것이었다.  
 
『죄와 벌』의 흔적을 찾아 2017년 10월에 류블리노에 가보았다. 19세기에는 모스크바 근교였지만 현재는 모스크바 시에 속한 행정구역이다. 가을의 류블리노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숲도, 거울 같은 호수도, 인적이 끈긴 호젓한 오솔길도, 지금은 박물관이 된 모스크바 귀족 두라소프 장원도 모두 도스토옙스키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듯 하다. 무엇보다도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이 붙은 ‘1148호 학교’가 인상적이다. 수업 중이라 학교 안은 조용하다. 학교 마당에 세워진 도스토옙스키의 흉상이 곧 교실에서 뛰어나와 조잘거릴 아이들을 기다리는 것 같다.  
 
1860년대 중반부터 러시아 신문에는 ‘범죄 연대기’ 섹션이 따로 마련되었다. 그만큼 범죄가 차지하는 지면이 점점 확대되었다는 얘기다. 1866년 10월에는 범죄 기사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일간지 ‘공개 법정’이 창간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사회 트렌드를 반영하면서 범죄 소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류블리노 레트냐야 거리 8번지의 허름한 목조 건물 앞에는 『죄와 벌』을 집필한 장소임을 명시하는 작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그럴 만도 하다. 이 건물 1층에 세들어 살던 작가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범죄소설이 탄생했으니까.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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