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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물건에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밀라노 디자인의 아이콘, 로싸나 오를란디 컨셉트 스토어
이탈리아 밀라노 가구박람회와 함께 진행되는 디자인 위크 기간 중 무조건 방문해야 할 곳으로 꼽히는 곳이 로싸나 오를란디(Rossana Orlandi)의 컨셉트 스토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벽화가 있는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근처 주택가에 있는 이곳은 디자이너들의 성지다. 디자인 위크가 열리는 일주일 동안은 무려 3만명이 방문하는 핫플레이스다. 인터넷 판매와 직거래 판매가 대세인 오늘날 디자이너들의 안목 갈증을 해소해주는, 오아시스나 다름없는 오프라인 스토어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디자이너들의 기발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로싸나 오를란디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디자이너들의 기발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로싸나 오를란디

올해 구글이 새로운 음성 제어 인터넷 인터페이스인 구글 홈의 커넥션 기기를 선보이기 위해 선택한 곳도 바로 로싸나 오를란디 스페이스다. 기술을 디자인에 접목하는 분위기를 창출하는데 이만한 공간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넥타이 공장으로 쓰이던 공간이 디자인 혼 가득한 아방가르드적 공간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이곳의 주인 로싸나 오를란디 덕분이다. 작은 체구, 예전 한국의 여인처럼 앞가르마를 타고 단정히 빗어 묶은 희고 긴 머리, 얼굴의 반을 덮을 정도로 시원하게 큰 색안경, 그리고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 가는 곳마다 엄청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여인. 디자인의 혼이 숨쉬는 로싸나 오를란디의 공간을 중앙SUNDAY S매거진이 찾아갔다.    
 
루이비통 그룹이 만드는 루이나 샴페인을 위해 제작한 샹들리에 ?부케 드 샴페인? 앞에서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마르텐 바스와 함께한 로싸나 오를란디. 사진 타티아나 우츠로바

루이비통 그룹이 만드는 루이나 샴페인을 위해 제작한 샹들리에 ?부케 드 샴페인? 앞에서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마르텐 바스와 함께한 로싸나 오를란디. 사진 타티아나 우츠로바

[Space] 디자이너들의 기발한 스토리텔링이 가득한 곳
덩쿨나무와 재스민으로 우거진 입구를 통해 이곳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비밀의 정원’을 발견한 메리 레녹스가 된 듯한 상상을 하게 된다. 검은 철창문에 붙어있는, 로싸나 오를란디의 이니셜을 빨간 글씨로 만든 ‘Ro’가 벌써 이곳이 심상치 않은 장소임을 넌지시 일깨운다. 덩쿨나무로 뒤덮인 안뜰은 간단한 식사나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쓰이는데, 새 전시를 오픈하는 날이면 이곳에 케이터링이 준비되곤 한다. 건물 1층은 오픈된 사무실로 쓰지만 가장 넓은 방은 전시장과 매장이다.  
 
2015년 밀라노 엑스포 기간 중 바레인 파빌리온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로싸나 오를란디. 사진 마르코 타바쏘

2015년 밀라노 엑스포 기간 중 바레인 파빌리온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로싸나 오를란디. 사진 마르코 타바쏘

건물 벽이 그대로 보이는 큰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가면 만화경 같은 알록달록한 디자인 세상이 펼쳐진다. 올 때마다 다른 제품들이 보이는, 발 디딜 틈 없이 물건들로 가득한 이 공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사방 벽을 가득 메운 가죽 상자다. 이전에 있던 넥타이 공장에서 제품 보관을 위해 사용하던 상자들을 버리지 않고 서류나 제품 보관용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독특함이 로싸나 오를란디 컨셉트 스토어의 또 다른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나비 전등

나비 전등

여기 전시된 제품들은 어느 하나 평범하거나 무난한 것이 없다. 거대한 모기향처럼 생긴 의자, 우그렁 쭈그렁한 감자처럼 생긴 전등에 다닥다닥 붙은 나비떼, 풍선에 매달린 의자,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듯 대충 만든 것 같은 팔찌, 다듬다 만 듯한 얼룩진 테이블 . 하나같이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탄생한 멋진 오브제와 가구들이 앞다퉈 들려주는 저마다의 스토리 텔링 덕분에 이 커다란 공간은 항상 무음의 재잘거림으로 가득하다.  


고릴라 전등

고릴라 전등

지난 4월 디자인 위크 기간에는 매장 뒤 큰 정원에 만들어진 큰 천막에서 야코포 폿지니 기획으로 전등 · 가구 등 제품 전시는 물론 토크쇼와 세미나가 함께 진행됐다. 현재 환경오염의 주범인 플라스틱 쓰레기에 관한 주제로, 환경주의자들은 물론 디자인에 관심 있는 많은 참여자들이 영상 화면을 보며 열띤 토론에 나섰다. 정원 곳곳에 전시된 알록달록한 가구와 작품들을 통해 제대로 된 플라스틱 재활용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기발한 제품으로 재창조될 수 있는지도 함께 보여줬다.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지하와 주변 공간들의 문도 활짝 열었다. 공간마다 성격이 다른 인테리어 장식을 통해 디자이너와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꾸몄다.  
 
[Story] 각각의 물건들은 스스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다. 
어떻게 이 멋진 컨셉트 스토어를 만들 생각을 했나.  
“아이디어를 준 것은 레오나르도 몬다도리(이탈리아 최대 출판기업 몬다도리의 전 회장)였다. 이 공간의 매력에 푹 빠진 레오나르도와 공동사업을 계획했지만, 불행히도 이야기가 나온 지 석 달 후에 그가 세상을 떠났고 결국 혼자 이곳을 오픈하게 되었다. 2년간은 평범하게 지내며 사진 작가들에게 공간을 빌려주곤 하다가 곧 전 세계의 전시회와 박람회를 방문하며 내 취향대로 공간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이곳에서 전시하기를 희망하는 디자이너들과 회사들의 연락이 끊이지 않는다.”  
현란한 스타일의 전등이 천장을 가득 채운 1층 별관

현란한 스타일의 전등이 천장을 가득 채운 1층 별관

 
컨셉트 스토어를 열기 전에 디자인 업계에서 경력을 쌓았나.  
“밀라노 마랑고니 패션학교를 나와 패션업계에서 종사했다. 당시 반 친구 중에 모스키노가 있었는데, 천재성을 발휘하던 모스키노는 낙제했고 난 우수한 성적으로 진학했다. 하하. 어렸을 때 파리 캉봉가 스튜디오에서 코코 샤넬을 만난 적도 있고, 클로에에서 근무할 땐 칼 라거펠트를 위한 협업을 한 적도 있다. 니트 관련 일을 했고 또 이름도 날렸지만, 실험적인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 답답한 적이 많았다. 관련업계 환경이 점점 더 감당하기 힘들어져 패션업계를 떠났다. 딸이 살 집을 찾던 중 우연한 기회에 넥타이 공장이었던 이곳을 발견해 2002년 인수했다.”  
 
공간이 정말 멋지다. 구성과 디자인에 특별한 전략 같은 것이 있나.  
“무전략이 전략이다. 모두 내 직관과 취향만으로 공간을 꾸민다. 종종 기자들이 디자인 트렌드가 뭐냐고 묻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트렌드 같은 건 없다’고 대답한다. 패션계의 트렌드는 6개월마다 바뀌는 시스템으로 가지만, 집을 위한 오브제들은 삶과 함께 간다. 지금 당신이 ‘금년 트렌드가 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모른다’이다. 좋아하는 것을 애정과 직관으로 구입해라. 그게 전부다. 가치가 있는 물건, 아름답고 좋아하는 물건에게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넥타이 보관함으로 사용되던 상자들이 이제는 로싸나 오를란디 스페이스를 대표하는 인테리어 디자인이 되 었다.

넥타이 보관함으로 사용되던 상자들이 이제는 로싸나 오를란디 스페이스를 대표하는 인테리어 디자인이 되 었다.

 
올해 디자인 위크 때는 지금 세계적으로 가장 큰 환경문제가 되고 있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주제로 ‘죄책감’이라는 타이틀 아래 이벤트를 진행했다. 성과는 어땠나.  
“디자인 위크를 준비하던 막판에 이벤트 진행이 결정됐다. 아티스트들에게 부랴부랴 연락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이들 중 불참자는 한 명도 없었고, 오히려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싶어해 큰 감동을 받았다. 네덜란드 디자이너 디르크 판데르 코이, 누클레오, 마씨밀리아노 아다미, 알레산드로 멘디니, 펜타토닉, 알카롤, 두치오 마리아 감비, 안드레우 카루야 등 정말 많은 아티스트들이 와주었다. 이들은 플라스틱 재활용의 천재들이었다. 플라스틱 생선상자, 혹은 서프보드 등을 재활용해 제품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작가들도 있다. 이들의 작품 덕분에 정말 멋지고 의미있는 정원을 만들 수 있었다.”  
둥근 기 둥 형태의 서랍장

둥근 기 둥 형태의 서랍장

 
입구 옆에 있는 레스토랑을 리모델링해서 새로 오픈했던데.  
“원래 있던 레스토랑의 실내 디자인을 바꾸고 밀라노의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아이모&나디아와 협업해 최고의 요리를 맛 볼 기회를 만들었다. 이름은 ‘비스트로(BistRo)’(러시아어로 빠르다는 뜻으로, 신속하고 저렴하고 가볍게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을 말함)의 끝에 로싸나 오를란디의 로고인 Ro를 삽입해 지었다. 공식 오픈 전에는 남편과 매일 점심을 먹으며 고객들에게 제공될 음식을 미리 맛보았다. 벽지, 가구 등 인테리어 디자인은 홈 라인이 있는 패션브랜드 에트로의 스폰서십으로 완성도를 높였다.”  
 
뒷마당의 휴식공간

뒷마당의 휴식공간

당신에게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모두 무(無)에서 생겼다. 그 후에 훌륭한 디자인, 예술작품 등을 언급할 수 있다.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그 안에 담긴 하나하나의 요소들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어떤 분야의 어떤 물건이라도 상관없다. 각각의 물건들은 스스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개개인이 다르게 느끼는 지극히 주관적인 아름다움이다. 그것이 디자인이다.”
입구 철창에 장식된 로고

입구 철창에 장식된 로고

 
디자인과 아트는 무슨 차이가 있나.  
“종종 화랑들이 디자이너들의 제품을 예술작품으로 강력히 추천하기도 한다. 이들은 유일한 작품이거나 한정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디자이너들이 만든 작품도 예술품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디자이너 본인이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 그들의 창조물이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것이지 이들이 예술품이 되지는 않는다. 개인적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다루기 민감한 문제다. 그런 까닭에 난 화랑들이 예술품이라고 소개하는 작품들에 동의하지 않을 때도 있다.”  
 
뒷마당에 놓인 형형색색의 디자인 가구들. 플라스틱 폐기물을 재활용해 만들었다.

뒷마당에 놓인 형형색색의 디자인 가구들. 플라스틱 폐기물을 재활용해 만들었다.

어떤 디자이너, 아티스트와 협업을 선호하나.  
“재능있는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것을 좋아한다. 젊은이들과 나누며 뭔가를 창조하고 기획하는 것은 정말 신난다. 초창기에는 유럽 전역에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젊은 신인들을 발굴해 작품과 함께 스스로를 소개할 기회를 마련하곤 했다.”
 
그래도 꼭 협업하고 싶은 디자이너나 아티스트가 있다면.  
“셀 수 없이 많지만 나로부터 언급되지 않아 섭섭하게 느끼는 디자이너가 있을까봐 이름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정말 내가 좋아하고 기회만 있었다면 꼭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물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불가능하지만.” ●
 
 
 
밀라노(이탈리아) 글·사진 김성희 중앙SUNDAY S매거진 유럽 통신원 sungheegioiell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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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