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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군대 신화와 병역의 양심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오늘의 나는 군대를 다녀와 사람이 됐다’는 ‘군대 신화’가 있다. ‘세월을 때우러’ 가서 ‘청춘을 썩힌’ 군대지만 사람됨을 터득했다는 사회적 믿음이다.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군가 ‘진짜 사나이’)를 불러젖히며 애국심과 사명감을 주입했다. 숨 막히는 규율, 부당한 얼차려, 얼토당토않은 부조리를 견뎌내는 게 사람됨의 숙명적 과정이라고 스스로 세뇌했다. ‘병역필(兵役畢)’이란 훈장을 사회에 내밀고 비로소 ‘사나이’가 됐다.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부모·형제·자식·친구·애인에게 병역은 선택이 아니라 숭고한 의무이자 거역할 수 없는 신화였다.
 
군대 신화가 해체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게 대체복무의 길을 터준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변화의 태풍을 몰고 올 나비의 첫 날갯짓일지 모른다.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한 입영이나 집총 거부를 무작정 처벌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 침해”라고 헌재는 선언했다. 이 결정이 매년 500명씩 총 대신 감옥을 택하는 ‘여호와의 증인’에 국한한 거라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신화를 지탱해 온 징병제(徵兵制)를 뒤흔들 혼돈의 전조일 수 있다.
 
헌재는 종교적 신념을 양심으로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했다. 대법원과 헌재는 양심을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파멸될 것이라는 절박한 마음의 소리”라고 했다. 그 양심의 자유를 헌법은 보장한다. ‘마음의 소리’에 반(反)하는 행위를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가 양심의 자유다. 마음의 소리가 양심이라면, 종교뿐 아니라 정치적·윤리적·철학적 양심도 있을 터이고, 그 자유도 보장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건 양심이 아니다’고 타인의 내면에 숨겨진 마음의 소리를 어떻게 판단하겠는가.
 
양심은 예민한 국민 정서를 자극했다. 총을 잡지 않는 게 양심적이고 총을 드는 게 비양심적이라는 모순의 비약을 불러 왔다. 누구는 양심을 지킨 영웅으로 미화되고, 군필자와 그들을 격려한 누구는 비양심적 인간으로 추락했다. 이 양심, 저 양심, 별의별 양심이 다 나올 빌미를 제공했다. 현역병을 모면하려고 온갖 핑계를 들이댈 사이비·위장 양심이 혼돈의 틈을 마다할 리 없다. ‘군대 가지 않을 양심의 자유’를 볼 날도 머지않았다. ‘동족의 가슴에 총구를 겨눌 수 없다’며 통일주의자가 설치고 전쟁 없는 세상을 요구하는 반전주의자, 성적 소수자, 인도주의자 등이 양심을 앞세워 군대 신화를 끌어내릴 것이다.
 
고대훈칼럼

고대훈칼럼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대체복무를 놓고 논쟁이 시작됐다. 기간을 현역보다 2~3배로 늘리느니, 고된 일을 시키는 징벌은 되니 안 되니, 양심과 비양심을 가려내는 일을 누가 맡니 하며 갑론을박이다. 연간 30만 명의 입영 자원 중 0.2%에 불과한 특정 종교인의 대체복무를 위해 떠는 호들갑은 아니리라. 앞으로 수천~수만 명의 양심 좀비가 어슬렁거릴 것을 국회도, 국방부도, 국민도 지레짐작하는 건 아닐까. 인구는 뚝 떨어지고 군대로 뽑아갈 청년은 팍팍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비 양심에 기댄 대체복무의 꼼수까지 판친다면 징병제의 근간이 휘청댈 수 있다.
 
헌재 결정 후 “대체복무는 모병제(募兵制)로 가는 길목”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청년 4명 중 1명꼴로 최악의 실업 위기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직업 군대가 신규 일자리를 창출해 실업을 해소하고, 30만 명의 청년을 군대 밖으로 풀어줌으로써 출산 절벽도 완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왕성한 20대에게 선택의 기회를 줘야 할 필요는 있다. 내년 입대가 예정된 손흥민 선수에게 군에서 동네축구를 하도록 강요하는 건 너무 잔인하다.
 
모병제에는 돈이 많이 든다는 반대가 있다. 현재 월 30만~40만원을 받는 39만 명의 장병(이병~병장)을 절반인 20만 명으로 감축하고 연봉 2000만원대의 공무원 9급 초봉을 준다고 가정할 때 대략 3조~4조원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한다. 올해 ‘일자리 안정 자금’에만 3조원을 푼 게 문재인 정부다. 돈은 걸림돌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방의 의무’를 바꾸는 일은 헌법 개정 사안이다. 국민적 합의가 없는 한 불가능하다.
 
시간 때우기에 급급한 오합지졸의 머릿수가 북한 핵 위력 앞에서 어떤 의미일까. 밥벌이의 무거움을 아는 직업 군인이라면 더 강한 군대를 만들 수 있을까. 모병제로 전환한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100여 국가는 성공적일까. 병역을 양심에 맡기는 세태라면 모병제를 포함해 병력 충원 제도를 두루 재검토해봄 직하다. 이제 낡은 군대 신화에 작별을 고하면서.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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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