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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 구독신청

‘K뷰티’ 열풍에 자극 받았나 … 북 화장품은 변신 중

화장품은 북한 여성의 삶과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사회주의를 표방한 체제 특성상 화려한 색조 화장은 물론 일상적 피부 가꾸기도 사치로 여겨져 온 것이다. 그런데 최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살결물(스킨)’과 ‘물크림(로션)’, ‘눈등분(아이섀도)’은 물론 BB크림이 선보였다. 중산층 이상에선 해외 유명 브랜드는 물론 한국산 프리미엄급 화장품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북한산 화장품 업체끼리 여심 잡기 경쟁을 벌이는 양상까지 나타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부인 이설주와 함께 화장품 공장을 찾아 제품 질을 챙기고 있다. ‘평양판 뷰티 열풍’의 현장을 진단해본다.
 
금강산 관광선이 첫 출항한 1998년 늦가을. 현지 북측 여성 안내원과 가깝게 지내던 현대아산의 관광 조장 K양은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몇 살 아래인 북한 안내원이 K양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언니! 왜 멀쩡한 눈썹을 빡빡 밀었버렸습네까”라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세련된 얼굴 화장과 헤어스타일에 궁금증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K양은 “음…눈썹 끝 부분을 밀어내고 아이 펜슬로 본래보다 좀 크게 눈썹을 그려봐. 눈매가 더 서글서글해지고 예쁘게 보일 거야”라며 찬찬히 설명해줬다. 북측 안내원이 “아이 펜슬은 또 뭡네까”라고 재차 묻자 K양은 “음…뭐랄까. 눈썹 그리는 연필”이라며 갖고 있던 걸 건네줬다.
 
놀라운 일은 며칠 뒤 벌어졌다. 수십 명의 20~30대 북측 여성 안내원들이 눈썹을 다듬고 ‘남조선식’ 아이라인을 그리고 나온 것이다. 모두들 크게 만족해하는 표정이었다. 이후 북측 안내원들에게 주는 선물로 아이 펜슬과 눈썹 화장용 면도기가 인기를 끌었다. 금강산 관광은 한참 동안 북한 젊은 여성들이 또래 남한 관광 조장들의 화장법과 헤어스타일, 옷차림을 따라 배우는 현장으로 자리했다. 북한 여성의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오랜 기간 억눌려져 왔다. ‘병영 국가’를 방불케 하는 긴장되고 폐쇄적인 체제 운용에 경제난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북한이 내세운 바람직한 여성상은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한 투사였다. 고려대 남성욱(통일외교학부) 교수팀이 2016년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조사대상 탈북 여성 200명 중 북한에 살 때 ‘화장을 하지 않았다’는 응답이 16.7%였고, 눈화장이나 립스틱 같은 색조 화장을 한 경우는 6.8%에 불과했다. 진한 화장을 기피하는 풍조 때문에 티가 나지 않게 하거나 기초화장에 머문다는 얘기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물론 북한도 화장 자체를 금지하거나 제한한 건 아니다. 국가주석 김일성(1994년 사망)은 이른바 ‘항일유격대’ 시절을 회상하며 “노획한 전리품 중에 종종 분(粉)이나 크림 같은 화장품이 섞여 있을 때도 있었다. 대원들은 이를 버리거나 발로 짓뭉개 놓곤 했지만 나는 이걸 분하게 여겼다. 여성들이 일 년 내내 분도 못 바르고 고생스럽게 살아가는 게 가슴 아프게 생각됐다”(『김일성 저작집』제47권)고 밝히기도 했다. 밀영(secret camp)에 함께 머물던 여성 대원들에게 전투 중 챙긴 화장품을 쓸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신의주화장품공장이 세워졌고, 1957년에는 평양화장품공장이 문을 열었다. 치약과 화장비누·머릿기름 등을 위주로 생산했다. 중공업 위주 정책 때문에 당장 급하지 않은 화장품은 후순위로 밀렸다. 수입원료에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것도 문제였다. 김정은 국방위원장 집권 이후에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재일 조선총련과의 합작으로 일부 화장품 생산라인이 가동됐고, 김정일이 현장을 방문해 “인민들에게 질 좋은 화장품을 더 많이 안겨주라”고 촉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혁명적 변화가 닥친 건 김정은 시대 들어서다. 경공업 제품 질 향상과 함께 외국산을 선호하는 ‘수입병(病)’ 타파를 강조한 김 위원장은 화장품을 주 타깃으로 삼았다. 2015년 2월 평양화장품공장을 찾은 김정은은 “외국산 마스카라는 물에 들어가도 유지되는데 우리 제품은 하품만 해도 너구리 눈이 된다”고 질타했다. 눈 화장 제품에 방수 효과가 부족해 눈가로 검게 번지는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눈길을 끈 건 화장품과 관련해 김정은이 매우 구체적으로 문제점을 짚어낸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부인 이설주와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낙후된 화장품 생산시설과 품질에 대한 여성들의 불만족을 직언할 수 있기 때문이란 말이 나온다.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 것도 이례적이다. 2013년에는 김정은과 부인 이설주가 평양 해당화관 쇼핑몰을 둘러보는 장면이 북한 TV에 공개됐는데 한국 브랜드인 ‘라네즈’ 간판이 포착되기도 했다.
 
북한 경제 사정으로 볼 때 화장품은 사치품에 가깝다. 평양의 쇼핑센터인 광복거리상업중심에선 스킨과 로션 등 6개 품목으로 구성된 ‘미래’ 브랜드 화장품 세트가 북한 돈 36만5100원에 팔린다. 일반 근로자 월급(3000원 수준) 10년 치를 꼬박 모아야 하는 돈이다. 달러 당 8000원 안팎인 암달러 시세로 환산해도 45달러 수준이다. 달러를 손에 만질 수 있는 특별한 계층이 아니고서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 그런데도 화장품 수요는 고급 수입품을 중심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9년 132만 6000달러 수준이던 북한의 화장품 수입액은 2014년 1138만 달러로 크게 늘었고, 대북제재가 한창이던 2016년에도 990만 달러 선을 기록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랑콤과 샤넬·시세이도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를 언급하면서 북한 화장품의 품질향상을 주문하고 있다. 2015년 2월 평양화장품공장 방문 때는 “은하수 화장품 인기가 괜찮은데 여기에 만족 말고 세계적으로 이름난 제품과 당당히 경쟁할 수 있도록 투쟁하라”고 말했다. 선두를 지키고 있는 신의주화장품공장은 ‘봄향기’ 상표를 내세워 스킨·로션은 물론 안티에이징 제품과 향수·립스틱 등으로 품목을 넓혀가고 있다. 최근 북·중 변경 지역을 다녀온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개성 고려인삼 성분의 자외선 차단 기능 제품과 미백·주름 개선을 내세운 분 크림이 팔리고 있었다”며 “특히 분 크림의 경우 한국과 서방 국가에서 통용되는 ‘BB(blemish balm)’란 명칭을 그대로 표기해 해외시장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의 화장품 시장 규모는 2016년 기준 7200만 달러로 한국의 0.6%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이설주·김여정 따라 하기’ 풍조에 신흥 부유층인 ‘돈주(錢主)’의 등장, 개방 풍조에 힘입어 성장세가 점쳐진다. 불가리 향수는 ‘뇌물 1호’로 자리 잡았다는 게 고위 탈북 인사의 전언이다. 여기에 한국 화장품의 우수성이 뒷받침 된 ‘K-뷰티’까지 가세했다. ‘아랫동네(한국) 화장품을 예물로 받으면 시집 잘갔다고 입소문이 난다’고 할 정도다. 장마당에선 한국산 BB크림이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인기다. 평양 진출을 꿈꾸는 우리 관련 업계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움직임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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