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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보수의 가치에 진보의 정책을 섞어보라

보수의 길을 묻다 ④ 
신상목 전 외교관 일식집 ‘기리야마’ 대표

신상목 전 외교관 일식집 ‘기리야마’ 대표

1936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압도적인 표차로 연임에 성공한다. 그는 기록적 압승을 계기로 뉴딜 정책에 박차를 가하면서 연방 대법원을 손보려 한다. 연방 대법관에 진보 인사를 충원할 요량으로 대법관 정원을 9명에서 15명으로 증원하는 법안을 추진한다.
 
하지만 민주당 텃밭이면서도 보수 성향이 강한 남부 지역 민주당 의원들이 공화당 의원들과 ‘보수연합’을 결성해 대법관 증원을 무산시켰다. 37년 남부 민주당 의원들은 ‘보수 강령’을 발표해 루스벨트와 선 긋기에 나선다. 작은 정부 추구와 기업의 자율 보장이 미국의 핵심 가치이면서, 동시에 국민의 부와 행복 증진에 가장 효과적인 정책 방향임을 선언했다. 이후 보수 강령에 동조하는 정치인들로 결성된 보수연합은 당적과 관계없이 지나친 정부 권한 확대 또는 민간 개입 법안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뉴딜 정책을 견제했다.
 
지금의 한국인 정서로 보면 루스벨트는 선(善), 보수연합은 악(惡)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반전(反轉) 스토리가 이어진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44년 미 의회는 퇴역 참전군인 단체인 ‘아메리칸 레전(Legion)’의 요구를 받아들여 ‘참전군인 사회복귀 지원법(G.I. Bill)’을 통과시킨다.
 
당초 루스벨트는 이들의 요구에 미온적이었다. 그는 의례적인 참전 수당 및  일부 엘리트 대상 학자금 지급에 정부 지원을 국한하려 했다. 이때 보수연합은 ‘미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헌신한 참전군인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가장 기초적 의무’라는 참전군인 단체들의 호소에 공명(共鳴)해 법 통과에 앞장선다.
 
참전군인 지원법의 영향은 엄청났다. 200만 명이 넘는 참전군인이 장학금 혜택을 받아 대학과 직업학교에 진학했다. 예전에는 대학 진학을 꿈꿀 수 없었던 빈곤·소수 계층이 대학 교육을 마치고 생산성 높은 인적 자원으로 사회에 재충원됐다. 400만 명이 넘는 참전군인 가구가 주택담보 대출을 통해 내 집을 마련하고 안정적 삶의 기반을 마련했다. 창업 자금 지원으로 많은 소규모 비즈니스가 탄생했고, 이는 다시 지역경제 활성화와 세수 기반 확대로 이어졌다.
 
시론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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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 효과도 컸다. 많은 흑인 참전군인들이 대학을 졸업해 고소득 직종에 진출할 수 있었다. 참전군인 지원법은 기회 평등, 중산층 양성, 시민의식 제고를 통해 경제·사회 모든 층위에서 미국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왔다. 미국이 50~60년대 풍요와 번영의 황금기를 구가하는 원동력이 됐다.
 
참전군인 지원법은 개혁성·실용성·효율성 면에서 뉴딜 정책보다 미국의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진보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신의 한 수’였다. 이토록 막대한 재원을 동원해 인종·계층을 불문한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지원이 가능했던 것은 국가에 대한 기여와 헌신에 국가가 보답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공감대가 인종·계층·지역·정파를 초월한 미국 보수의 정신적 기초이며, 미국이 존재하는 한 소멸하지 않을 미국적 가치의 핵심이다.
 
한국 사정은 어떠한가. 2010년 젊은이들이 즐겨 찾던 한 웹사이트를 시끌시끌하게 한 이슈가 있었다. 학자금을 대출받은 대학생들이 입대 기간에도 이자를 계속 내야 해서 월급의 절반이 이자로 나간다는 내용이었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동안 학자금 이자를 낸다는 것이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런 나라에 태어난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갖거나 소속감과 애정을 가질 리가 없다는 허탈감마저 들었다. 2013년이 돼서야 법이 개정돼 군 복무 중 학자금 이자가 면제됐다. 물론 당시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도 법 개정에 나서기는 했다. 하지만 개정안 마련, 정부 압박, 여론 형성, 대국민 홍보 등에서 주도권을 쥐고 치고 나간 것은 진보를 표방하는 민주통합당이었다.
 
무엇이 보수 정당인가. 보수 정당은 무엇으로 입증되는가. 그때 느꼈던 한국 보수 정당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이후에도 가신 적이 없다. 유사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보수 정당이 아니다. 보수의 가치를 존중하고 실현하는 정치 세력이 필요할 뿐이다. 미국의 44년 참전군인 지원법은 보수의 가치에 가장 충실한 정책이 가장 진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보수와 진보는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 보완적일 수 있음을 실증한 사례다. 보수의 가치 실현에 진보 정당보다 둔감하고 행동도 뒤따르지 않는 보수 정당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국민은 왜 그러한 정당을 지지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이 한국 보수 정당의 과제일 것이다.
 
신상목 전 외교관·일식집 ‘기리야마’ 대표
 
◆ 알림=보수의 재탄생을 모색하기 위한 기획 시론 ‘보수의 길을 묻다’를 시리즈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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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