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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엄마 사랑…윗집 할머니의 '애주가' 딸

기자
송미옥 사진 송미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22) 
안개 낀 정원. [사진 freeimages]

안개 낀 정원. [사진 freeimages]



내가 사는 마을에 거리를 방황하는 모녀가 있었다. 어느 날 밤 정적이 이 세상을 감싸고 있을 때 잠든 채 걷던 어머니와 딸이 안개로 뒤덮인 집 정원에서 만났다.
 
어머니가 말했다. “드디어 드디어 여기서 만났구나. 이 원수. 너는 내 청춘을 짓밟고 내 허물어진 육체 위에 너의 생명을 꽃피웠다. 죽여 버리고 싶어.” 그러자 딸이 말했다. “아아--- 이 꼴 보기 싫은 늙어빠진 여자! 내 자유를 산산이 부수어 버린 계집, 내 인생을 별 볼 일 없는 네 인생의 복사판으로 만들었잖아. 너 같은 건 죽어 버리는 게 나아.”
 
그때 수탉이 때를 알리자 두 사람은 눈을 떴다. 어머니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 너였니?” 딸이 얌전하게 대답했다. “응, 엄마.”
-칼릴 지브란의 철학 우화집 중에서
 
꽃밭에 물을 주고 있자니 윗집 할머니와 며느리가 꽃단장하고 내려온다. 이 댁 며느리는 오래전 혼자돼 시어머니와 친구같이 서로 기대며 지낸다. “에고~ 예쁘게 차려입고 어딜 가세요?” 했더니 “자네가 다 아니 말하지만 주정뱅이 딸 집에 가는 길이야. 오랄 때 안가면 혼낸다우~”라고 말한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나가는데, 전혀 혼날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다.


딸네 집으로 행차하는 윗집 할머니와 며느리
지리산 나물(내용과 관련없는 사진). [중앙포토]

지리산 나물(내용과 관련없는 사진). [중앙포토]

 
다리가 아프다면서도 ‘끙끙~’ 지팡이에 의지해 새벽부터 며칠을 온 산을 헤매고 다니며 캔 고사리랑 산나물이 들어있어선지 등에 짊어진 배낭이 묵직해 보인다. 분홍색 재킷에 이쁜 보랏빛 모자까지 쓰고 며느리도 한껏 멋을 내어 나서는 길이다. 지금 한창 농번기라 너무 바쁠 때지만 딸이 호출 안 했으면 또 밭일을 나가는 길일 텐데 속 깊은 딸이 엄마 일 못 하게 부른 것 같다.
 
막내 남동생이 파산해 이곳을 떠난 후 홀로 남은 엄마 때문에 딸은 자주 친정에 들른다. 어느 땐 술을 많이 먹고 주정을 부리며 한바탕 정신없이 만들어 놓고 가는 폭군이 된다. 그러나 어느 땐 조용히 와서 종일 집안을 청소해놓고 냉장고 가득 먹거리랑 이것저것 세심히 챙겨주는 예쁜 딸이 되기도 한다. 가끔 지나는 길에 그 집에 들르면 냉장고 가득 쌓인 먹거리를 자랑하며 좋은 점만 챙기시는 할머니를 볼 땐 애잔한 모정을 느낀다.


한때 마을에서 가장 부자였던 윗집
이곳에서 온 가족이 살 땐 마을에서 가장 부자였던 그 집의 환경을 이웃에서 말해줘 알았다. 경매에 넘어간 금액이 수 억원이 넘었다고 한다. 노후에 편안하게 살 줄 알았던 엄마의 삶이 초라하게 변한 게 자기 탓은 아니지만 그냥 초라한 엄마가, 혼자 있는 엄마가, 힘든 밭일 하며 꼬부라진 엄마가, 손가락질받는 엄마가…. 
 
그렇게 마음이 아파 넘치면 술에 취해 불쑥 찾아와서는 한바탕 허공에 대고 ‘쇼’를 했다. 누구든 자기 엄마 무시하면 가만 안 둘 거라며 듣는 사람 없어도 혼자 소리쳤다.
 
술에 취해 불쑥 찾아와선 누구든 자기 엄마 무시하면 가만 안 둘 거라며 소리쳤다. [중앙포토]

술에 취해 불쑥 찾아와선 누구든 자기 엄마 무시하면 가만 안 둘 거라며 소리쳤다. [중앙포토]

 
낯선 사람을 보면 짖는 것이 개의 습성인데 어느 날은 “우리 집 개가 할머니만 지나가면 짖는다. 개XX까지 엄마를 무시한다”며 그날 그 딸에게 엄청 쥐여 박혔다.
 
이사 와서 전후 사정을 몰랐던 나는 말 못하는 개를 붙잡고 다투는 그를 이해 못 해 같이 소리소리 질렀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할머니는 당신 딸자식 흉을 안 본 게 무척 고마웠는지 무엇이든 생기면 나눠 챙겨 준다.
 
수줍음 많고 조용한 성격의 할머니는 긴 세월 할아버지의 술주정과 행패를 마음으로 다 삭이고 살아왔다. 그러나 자기표현이 강하고 시원시원한, 때론 너무 과격해서 겁나는 돌연변이 딸의 행동이 가끔은 속을 후련하게도 하고, 때론 애물단지가 되어 속을 끓이기도 한단다.
 
그래도 술을 먹으나 안 먹으나 가장 살갑고 정이 많아 팔 남매 중 엄마를 가장 잘 챙기는 그 딸을 가장 좋아한다. 살아가는 긴 세월, 모녀가 함께 이겨내야 하는 인고의 세월이 평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젊은 시절 나도 겪었던 아픈 일이라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고 이야기 동무만 되어줄 뿐이다.
 
저녁 해거름에 할머니가 두손 가득 딸이 챙겨준 선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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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