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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들, 수고 많았다

성장·반공에 충정 바친 세대 ‘레드카드’  
세기의 이목이 집중된 북·미 정상의 역사적 만남, 숨가쁜 시간이었다. 10초 악수는 68년의 적대관계를 끝내기에는 너무 짧았다. 인생으로 치면 칠십 평생, 그 긴 세월의 한 맺힌 드라마, 피로 얼룩진 남북대결의 오열을 어찌 그 악수로 다 덮을 수 있으랴. 해리 트루먼과 이승만 대통령, 김일성이 맞붙은 6·25전쟁 이후 68년 동안 미국 대통령은 12번, 남한 대통령은 11번 바뀌었다. 그 아득한 시간의 후예가 서로 맞잡은 손은 냉전(冷戰)의 마지막 전선을 녹였다. 아니 녹여야 했다. 누가 뭐라 토를 달든 분명 새 시대가 개막됐다. 이젠 뒷걸음은 불가, 퇴로는 차단됐다.
 
민주당이 휩쓴 6·13 지방선거 역시 퇴로를 차단했다. 구시대로 회귀하는 통로 말이다. 보수-진보 간 정권교체의 진자운동을 말하는 게 아니다. 향후 총선과 대선에서 보수가 생환할 수 있겠으나, ‘민주화 30년’의 역사가 저물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일한 중량으로 쟀던 그 병렬의 시간은 끝났다. 1987년 후 민주화 30년은 산업화에 발목 잡힌 시간이었다. 그래서 지리멸렬했다. 그런데 지난 선거는 민주주의를 짓누른 구시대의 가치를 격렬하게 벗어 던진 작별의 예식이었다. 산업화 공적에 목맨 ‘구세대의 진지’를 초토화한 세대교체의 포격전이었다. 구세대의 진지는 붕괴했다. 고도성장과 반공(反共)의 금기를 부수는 젊은 세대에게 시대 운영의 주도권을 넘기라는 웅장한 예포 소리가 한반도에 울려 퍼졌다.
 
 
#북·미회담은 예광탄
 
북·미 정상회담이 싱겁게 끝났다고? 아니다. 북·미 관계에 새 지평이 열린 것이다. 68년간 ‘악의 축’이었던 북한이 하루아침에 동맹국가로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다. CVID(완전 비핵화)와 CVIG(완전 체제보장)의 즉석 맞교환은 우리의 환상이었지 미국의 급무는 아니었다. 건물을 올려도 설계도와 건축 공기가 있는 법. 비핵화 일정과 방식, 절차와 세부 조건 협상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물론 비핵화 선언 뒤에서 딴짓을 해온 북한의 지난 행적이 의구심을 낳기에 충분하지만 그건 엄청난 세계적 재앙을 불러올 것임을 미국과 북한 모두 인지하고 있다. 한국의 주도층은 한껏 부풀린 주관적 환상의 동굴에서 나와야 한다. 그 환상의 동굴은 고도성장과 반공 신화로 도배된 구시대의 진지다. 그 곳은 자아 중심적, 자기 충족적 예견에 복무하는 사람들이 ‘북한 악몽’을 재생산하는 방앗간이다. 이제는 구시대의 정체성을 지탱했던 ‘북한 악몽’을 덮어야 새 지평으로 나아가는 길이 보인다. 싱가포르 선언은 그것이 지극히 위험해도 그래야 한다는 전환의 예광탄이다.
 
 
#84년생 김정은
 
싱가포르에 마주 선 두 주역을 바라보는 심정은 이중적이었다. 최강대국 지도자 앞에서 어린 김정은이 과연 늠름할까 하는 연민 섞인 조바심, 비핵화에 정말 진정성을 보일까 하는 적대적 의구심이 엇갈렸다.  
 
84년생 김정은은 남한 동포들의 조바심을 보기 좋게 날렸다. 34세 청년이라곤 믿기지 않았다. “우리의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지만…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 그가 과거의 역사적 범죄를 진정 알고는 있을까. 국제무대에 데뷔하기 전 노련한 외교관들에게서 맹훈련을 받았을 터이다. 그럼에도 최강국 지도자 앞에서 저리 말할 남한의 ‘84년생 김대리’는 몇 명이나 될까.
 
 
#신지예의 ‘시건방진’ 눈
 
서울시장 선거에서 ‘90년생 신지예’가 4위를 했다. 득표율은 낮지만 안철수 다음이다. 그녀의 벽보는 자주 찢겼다. 태도와 시선이 시건방지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외려 당돌하고 야무지지 않은가?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은 40세에 대통령이, 캐나다 쥐스탱 트뤼도는 44세에 총리가 됐다. 대한민국 28세 여성은 왜 좀 건방지면 안 되는가? ‘자기 밥상 한번 안 차려본 당신의 꼰대정치를 뒤엎으려 나왔다!’ 시장선거에서 선전한 신지예의 눈빛은 미래를 향한 레이저 광선이다. 더 시건방져도, 더 당돌해도 된다.
 
‘90년생 신지예’가 대한민국 역사에 해박할 필요는 없다. ‘성장과 반공’ 신화에 발목 잡힌 그대의 시대에 ‘분배와 공존’의 깃발을 꽂으면 족하다. 꼰대정치를 매장하고 정치경제적 환경과 문법을 그대들의 필요에 맞춰 혁신하면 된다.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도 철 지난 낙수효과와 도덕적 잣대로 그대의 인생을 재단하는 ‘올드 보이’ 정치가 판치는 한 시대교체·세대교체는 어불성설이다.
 
6·13 지방선거의 변혁적 요체다. 보수가 궤멸했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상과 이념을 혼합한 불량식품을 대량 유통시켜 겨우 지탱해온 ‘관념론적 민주주의’(idealist democracy)가 끝장났다는 뜻이다. 압승한 민주당도 이 사실을 외면하면 주저앉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민주적 이상’에 봉사하라는 구호는 철 지난 공염불, 현실론적 민주주의가 개막됐다. 올해 28세 ‘90년생 신지예’도, 48세 ‘70년생 박부장’도 이념 친화성보다 실리(實利)를 따지는 ‘현실론적 민주주의’(realist democracy)로 이적한 것이다. 20대, 30대, 40대가 주축이 될 한국의 민주주의는 생활정치적 업적과 성과가 더 중요한 시간대로 접어들었다.

 
 
#올드 보이는 가라
 
6·13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민주당이 명심해야 할 새 명제다. 한국의 정치는 북한과의 공존지평을 열고, 경제는 분배주도적 전환을 꾀해도 될 만큼 성숙했다. 그것이 젊은 세대의 소망임을 확인해준 사건을 이번 주 우리는 한꺼번에 겪었다.
 
그리하여, 올드 보이즈(old boys)는 가라. 성장과 반공에 충정을 바친 구세대 지도층은 제발 정치 무대에서 물러나라는 게 두 사건의 교훈이다. 민주화 30년 동안 무던히도 기다렸다. 방탄소년단(BTS)이 세계 무대를 휩쓰는 장면을 신기하게만 바라보는 구세대는 내려갈 자격이 충분하다. ‘70년생 박부장’에게 애국(愛國), 애족(愛族), 애사(愛社)의 흘러간 옛노래를 불러 젖히는 구세대는 물러갈 자격이 차고 넘친다. 6·12 세기적 만남, 6·13 지방선거는 ‘올드보이 민주주의’의 폐막을 알리는 장엄한 예포이자, 실리와 실익을 중시하는 현실론적 민주주의의 개막을 축하하는 기념사다.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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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