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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예배당 같은 그녀의 연주

WITH 樂: 피아니스트 잔 보베
프랑스 피아니스트 잔 보베가 연주한 피아노 솔로 음반

프랑스 피아니스트 잔 보베가 연주한 피아노 솔로 음반

라디오 진행자가 반쯤 높아진 목소리로 묻는다. “최근 가장 설렜던 일은 무엇인가요? 문자 메시지 기다립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춘다. ‘설렜던 일? 최근에?’ 뭔가 있을 법도 한데, 좀처럼 떠오지 않는다. ‘너무 무감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자성과 ‘나이 들면 다 그렇지 새삼스럽게 설렘은 무슨’ 하는 변명이 반반씩 일어난다. 최근 일들은 떠오르지 않고 오히려 예전 기억들만 선명해진다. 대학 합격자 명단을 보러 가던 겨울날, 첫사랑에게 사귀자고 고백했던 날, 첫 차를 사고 운전대를 잡던 날, 아이가 태어나던 날 .  
 
클래식 음반 한 장에 설렜던 때가 있었다. 록이나 재즈를 듣다가 클래식 음악을 넘보던 시절, 나는 대학로에 있던 바로크레코드를 주로 갔다. 학생 신분에 이것저것 만지작거려 봐야 결국 손에 쥘 수 있는 건 한두 장이 다였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내내 음악을 상상하며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그런데 그때보다 벌이가 나아진 지금, 음악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은 그 시절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만 아주 가끔 우연히 숨은 연주자를 발견하고 어렵게 음반을 구할 때나 되어야 조금 얼굴에 홍조를 띤다.  
 
몇 년 전 잔 보베(Jeanne Bovet·1917~2010)라는 피아니스트를 알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동영상 사이트를 오가다 우연히 그녀의 연주를 들었다. 보베는 스위스 출신으로 에드윈 피셔, 알프레드 코르토 등을 사사했으며 디누 리파티, 삼송 프랑수아 등과 동문 수학했다. 독주자보다 교육자로 생의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에 인지도는 낮다.  
 
1965년 그녀는 친구와 함께 프랑스 중남부 아르데슈 시골마을의 중세 예배당을 구입한다.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자 설레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후 2005년까지 ‘음악의 헌정’이라는 이름으로 800명 정도가 참석하는 크고 작은 무료 음악회를 개최한다. 그녀의 노력으로 이곳은 음악가뿐 아니라 시인, 작가, 철학자들이 모이는 지역 예술의 명소가 된다.  
 
잔 보베의 음반을 구한 것은 행운이었다. 국내에는 이름조차 등록되어 있지 않아서 외국 사이트를 뒤적였다. LP는 고가여서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한 매장에서 한 장 남은 중고 CD를 10달러에 구했다. 그녀의 음반이 바다를 건너오고 있을 때는 오랜만에 조바심이 났다.  
 
그녀의 독주 음반에는 1685년 태어난 세 명의 작곡가 바흐, 헨델, 스카를라티의 피아노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바흐의 파르티타 1번이 첫 곡이다. 그녀의 바흐는 수수하고 담백한 것이 작은 시냇물 같다. 청빈했던 그녀의 삶이 연주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어떠한 장식이나 꾸밈없이 바흐 음악이 가진 경건하고 금욕적인 내면과 직접 소통한다. 파르티타 1번 연주에서는 종종 두 사람이 연주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왼손과 오른손의 대화가 정겹다. 고택의 돌담길을 보는 듯한 리듬감도 좋다. 돌담의 무늬들이 보이지 않는 패턴을 이루어 운율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불규칙한 가운데 안정감이 있다.  
 
스카를라티는 좀 낯선 느낌이다. 옅은 채도의 연주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본다. 기존에 듣던 스카를라티의 화려한 장식음과 기교에 익숙해서인지도 모른다. 화사한 연주에 익숙하다면 적응에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마지막 수록곡은 헨델의 ‘샤콘느’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바흐보단 못하지만 스카를라티보단 낫다.  
 
그나저나 아직도 처음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최근에 가장 설렜던 일은 무엇입니까?” 두려움 때문에 가슴 뛰는 일들을 짐짓 모른 체하며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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