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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지식인 키운 서당이 신분해방의 요람이었다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⑧ 실학-동학 계승 관계 맞나 
1866년 프랑스 해군 소위 후보생이었던 장 앙리 쥐베르가 극동 원정(병인양요)에 참여한 후 남긴 『조선 원정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조선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문자를 가지고 있다.… 극동의 모든 국가들에서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하나의 사실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집안에 책이 있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높은 교육열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 현상인데, 그 배경으로 서당 교육의 대중화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18세기 중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조선의 서당 수는 2만1000여 개, 훈장은 2만1000여 명, 학생은 26만여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8~19세기 서당 2만개, 학생 26만명 추산
 
조선후기 사회 풍속을 사실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 묘사한 화가 김홍도의 ‘서당’. 훈장 아래 9명의 학생이 둘러앉아 있는데, 연령과 신분이 제각각이다. 양반집 자제, 장가든 사람, 어린아이, 평민이 섞여 있다. 양반과 평민이 함께 다니는 신분 혼합형 서당이 보편화하지 않았다면 김홍도가 이를 그려 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도 되돌아보게 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 사회 풍속을 사실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 묘사한 화가 김홍도의 ‘서당’. 훈장 아래 9명의 학생이 둘러앉아 있는데, 연령과 신분이 제각각이다. 양반집 자제, 장가든 사람, 어린아이, 평민이 섞여 있다. 양반과 평민이 함께 다니는 신분 혼합형 서당이 보편화하지 않았다면 김홍도가 이를 그려 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도 되돌아보게 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잘 안 가는데,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기 7년 전(1887) 강원도 정선 지역의 서당 기록은 당시 상황을 체감하는 데 참고가 된다. 정원군수로 부임한 오횡묵의 조사에 따르면, 정선 읍내의 마을 2개동(95가구)에 설치된 서당은 4개였고, 학동 수는 110명이었다. 깊은 산속에 위치한 마을이었음에도 1가구당 1명 이상의 학생이 서당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정선문화원 편, 『정선총쇄록』)
 
조선후기 사회 변화를 서당의 대중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문중이나 동족마을에서 일종의 조합처럼 만든 서당이 크게 늘었다. 이전에는 군현 단위에서 운영되던 서당이 이제 동리 단위에도 설치됐다. 기금(서당계)을 형성함으로써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했다. 18~19세기에는 양반뿐 아니라 중인과 평민, 나아가 천민에게도 서당이 확대되었다. 예컨대 1755년 춘천 복중면에서 조직된 교영계(敎英契)는 농민 등 하층민을 위주로 운영된 서당계였다. 의식이 성장한 평민들은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출하기도 했다. 유교 경전의 언해본 간행도 큰 역할을 했다. 훈장 수요도 늘어 직업으로서의 훈장과 평민 출신 훈장이 등장했다. 조선후기의 마을서당들은 과거시험 공부를 넘어 지역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지역 지식인의 사랑방인 동시에 타지의 지식인들이 묵고 가는 공간이기도 했다. 홍명희 소설 『임꺾정』의 주요 인물 이장곤이 유배지에서 도망친 후 서당에서 숙식하는 장면을 연상해볼 수 있겠다. (송찬섭, 『서당,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서』·정순우, 『서당의 사회사』)
 
서당은 19세기 들어서도 계속 확산되는데 장편가사로 전해지는 ‘거창가(居昌歌)’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여리(閭里·일반 백성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도 모두 서당을 두어 십실잔동(十室殘洞, 열 집 한촌)이라도 현송(弦誦·책 읽는 소리)을 들을 수 있다. 일곱 살배기 아이도 공맹을 외우니 그 애친충군의 마음은 조야를 구분할 필요가 없으며 아울러 예(禮)에도 통달해 있다.” 문학적 과장을 어느 정도 고려한다 해도, 이 가사는 우리가 잘 주목하지 않았던 사실을 전해준다. 서당의 확산 실태와 함께 조야·노소 구분 없이 공맹 철학과 충효·충군 사상, 예법 등에 대한 체득 수준이 상당했음을 유추해볼 수 있게 한다.
 
조선시대 서당의 교육 수준은 다양했다. 단순히 아동 교육장이 아니었다.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뿐 아니라 중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의 역할까지 했다. 상당한 수준의 지식인까지 포괄할 정도로 그 폭이 넓었다. 국가교육기구인 성균관·사부학당·향교, 사족들이 만든 서원의 기능과 구별되는 서당의 영역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넓어져 갔다.
 
교육과 책은 떼어 놓을 수 없다. 책을 만들려면 인쇄술과 제지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서당의 급증은 서적 간행과 출판유통의 발달로 이어졌다. 책사(冊肆)·방사(坊肆)·서방(書坊)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서점은 서울에서 정릉과 육조 두 지역에 펼쳐져 있으면서 ‘지식의 유통체계’를 뒷받침했다. 직업적 ‘책장수’도 나타나 희귀본을 구해주고 구전을 받는 이를 ‘책주름(冊牙人)’이라고 불렀다.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貰冊家)’도 18세기 초 등장했다. 서울 중부에는 목각본이나 방각본 서책을 찍어내는 출판사가 즐비했다고 한다. 지방에도 출판사들이 나타났는데, 특히 완판·태인판·금성판 등을 찍어내는 호남 출판사들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서당의 대중화와 지식유통체계의 확산과 함께 특별히 주목해야 할 현상은 ‘새로운 지식층’의 등장이다. ‘평민 지식인’ ‘일반 유생’ ‘농민 지식층’ 등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평민들도 사서삼경이나 제가백가서 같은 고등서책까지 비교적 쉽게 구해 독서할 수 있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이 새로운 지식층은 농업·훈장·법률대서·사주점술·지관·의업(醫業) 등의 직업을 겸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전통적 지식층과 구분되었다. 성리학적 양반 사족과 구분되는 것은 물론이고 소위 근대지향의 실학으로 20세기에 규정된 이들과도 달랐던 것이다.
 
평민 지식인들은 훈장·법률대서·민란지도자·사주가 등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평소에 글을 가르치던 훈장이 글을 잘 못 쓰는 농민들을 위해 합법적 청원(정소·呈訴)을 대서하곤 했다. 여러 번의 청원에도 백성의 고충이 해결되지 않을 때 농민들은 이 소장 대리인을 앞세워 봉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평민 지식인들은 민란의 주모자가 되곤 하였다. (고동환, ‘조선후기 도시경제의 성장과 지식세계의 확대’)
 
 
동학농민전쟁 이끈 전봉준도 서당 훈장 출신
 
지난 4월 24일 종로 1가 영풍문고 앞에 세워진 동학 농민전쟁 지도자 전봉준 동상. 일본군에 붙잡혀 수감됐다가 처형된 전옥서(典獄署 )가 있던 자리다. [뉴스1]

지난 4월 24일 종로 1가 영풍문고 앞에 세워진 동학 농민전쟁 지도자 전봉준 동상. 일본군에 붙잡혀 수감됐다가 처형된 전옥서(典獄署 )가 있던 자리다. [뉴스1]

서당은 역모사건에 자주 연루되곤 했다. 영조시대 서당 훈장 곽처웅 사건(1733년 일명 ‘남원괘서사건’)에서 나온 ‘남사고(南師古) 비결’에는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내용이 담겨 있기도 했다. “우리도 평민에 있을 날이 오래지 않을 것이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종자가 있는가?”와 같은 주장이다. (이영재, 『근대와 民』)
 
‘남사고 비결’ 같은 주장이 나오는 것은 “천하에 나면서부터 귀한 자 없다(天下無生而貴者)”(『예기』)는 것을 말하는 공자 사상의 근원적 명제가 대중화되는 현상이기도 했다. “백성은… 하대(下待)해서는 안 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民惟邦本)….”(『서경』) 같은 민본사상의 대중적 표출이기도 했다. 영조와 정조가 공자의 ‘민유방본’에서 유래한 ‘민국(民國)’ 용어를 특히 많이 사용했던 것은 ‘남사고 비결’같은 아래로부터의 체제위협 압력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측면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근대지향의 선도적 역할을 소위 18세기 실학자들에게서만 구했다면, 이제 평민 지식인들의 역할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평민 지식인을 주축으로 한 아래로부터 백성의 신분해방적 요구, 그리고 이에 대한 영·정조 같은 탕평군주의 적극적 대응이 어우러지면서 조선은 근대민족국가의 틀을 형성해나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김홍도 그림 ‘서당’은 조선후기의 풍속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훈장 아래 9명의 학생이 둘러 앉아 있는데, 연령과 신분이 제각각이다. 오른쪽에는 양반집 자제로 보이며, 특히 갓을 쓴 이는 장가를 갔음을 알 수 있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나이가 어리다. 왼쪽 학생은 평민으로 보인다. 양반과 평민이 함께 다니는 서당의 모습인데, 당시 이런 신분 혼합형 서당이 보편화 되지 않았다면 김홍도가 이런 그림을 그려 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서당의 기초 과목은 『천자문』이고 그 다음으로는 『동몽선습』 『소학』 등이 꼽힌다. 학생 개인이나 서당의 형편과 수준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대개 어느 정도 문리를 터득하면 사서삼경을 배우고, 아울러 『통감』 『사기』 등의 역사책을 읽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평민 지식인들은 초시 과거에 응시해 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훈장과 의업, 소장 대리인 등 다른 생업을 겸했기에 사단칠정론 같은 복잡한 주자학 이론에 빠질 시간이나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양반 사족들이 세운 서원이나 사림·산림의 저명한 유학자들과 개인적 사승 관계도 맺을 수 없었을 것이기에 그들의 이론 속으로 포섭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의 고충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고, 그러했기에 공자의 핵심 이념, 즉 동학농민전쟁의 격문에도 등장하는 “민유방본”이 평민지식인에게 다가온 의미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존의 정통 성리학자들이나 실학자들이 과거 시험 답안지를 작성하기 위해 암기했던 “민유방본”의 형식적 의미와 달리 보다 실질적인 ‘혁명 구호’로 다가왔을 것이다. (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진주민란을 조사한 박규수는 민란 지도자 유계춘에 대해 “읍과 감영에 정소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던 자”라고 보고했다. 동학을 창출한 수운 최제우와 동학농민전쟁 지도자 전봉준은 서당 훈장이었다. 동학의 격문에 유교의 기본 소양과 충군애국 사상이 담겨 있는 것은 그들의 평민 지식인적 이력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18세기 실학과 19세기 동학농민전쟁을 연결시키는 시도가 그동안 있어왔는데, 이 같은 ‘실학-동학’의 계승관계는 이제 근원적으로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자문 전문가=한영우·오금성·김영식 서울대 명예교수,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장득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참고자료
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청계, 2018.
이영재, 『근대와 民』, 모시는사람들, 2018.
송찬섭, 『서당,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서』, 서해문집, 2018.
김영식, 『정약용의 문제들』, 혜안, 2014.
정순우, 『서당의 사회사』, 태학사, 2013.
이태진·김백철 엮음,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 상·하권, 태학사, 2011.
한영우 외,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 푸른역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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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