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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 ‘궁합’ 맞춘 12초 악수, 천금 같은 첫걸음 뗐다

지난 12일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에서 열린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세기의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싱가포르 정보통신부]

지난 12일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에서 열린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세기의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싱가포르 정보통신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회담의 역사적 성격과 회담의 성과로 나누어 평가해야 한다. 전자가 빠지면 후자는 역사적 맥락을 잃고, 후자가 빠지면 전자는 공허한 거대 담론이 된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은 김정은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공상과학영화라고 생각할 것이다.” 과장이 아니다. 70년을 적대관계로 지내 온 북한과 미국, 국내총생산(GDP)이 1000 대 1인 미국과 북한, 작년까지만 해도 한반도를 핵전쟁의 벼랑으로 몰아가던 미국과 북한이었다. 그런 두 나라의 정상이 6월 12일 오전 10시 5분, 인공기와 성조기 앞에서 12초간 손을 굳게 잡는 순간 새로운 북·미 관계가 설정되었다. 그건 초현실적(surreal) 그림이었다.
 
이 순간을 문서로 요약한 것이 공동합의문 제1항이다. “평화와 번영에 대한 두 나라 국민의 열망에 따라 북한과 미국은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기로 약속한다.” 악수하고 잠시 소파에 앉아 외교적인 수사를 교환할 때 트럼프는 미국과 북한의 훌륭한 관계 발전을 기대한다는 의례적인 말을 했다. 그러나 김정은은 가슴에 응어리진 소회를 직설적으로 피력했다.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에 눈과 귀가 가리었지만 모든 것을 이겨내고 어렵게 여기까지 왔다.”
 
세계의 언론들은 흥분했다. “불과 몇 개월 전 서로를 조롱하고 핵으로 위협하던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했다. 세계 최대 핵 강국과 은둔 국가 간에 새로운 장을 여는 중대한 첫걸음이다”(뉴욕타임스), “과거를 덮고 출발한다”(CNN)…. 김정은은 이번 회담을 “평화의 전주곡”이라면서 세계는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0년간 북·미 대결 구도에 맞춰져 있던 북한인들의 사고의 틀, 논리구조를 어떻게 “미제 웬쑤”가 없는 화해·협력의 시대에 적응시킬 것인가는 김정은의 어깨에 얹힌 무거운 짐이다.
 
 
북한 ‘미제 웬쑤’ 없는 시대 적응이 과제
 
합의문만 가지고 보면 북·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는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회담 전날까지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가 아니면 미국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합의문에 CVID는 없다. 합의문 제3항에 ‘북한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한 4·27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한다’고만 되어 있다.
 
트럼프는 합의문 서명 후 기자회견에서 CVID가 빠진 데 대해 김정은에게 너무 큰 양보를 한 게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다. 트럼프가 귀국 후에 보수진영으로부터 받을 비판의 전조다. 트럼프는 “결코 그렇지 않다. 김정은은 비핵화를 분명히 약속했다”고 응수했다. 트럼프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합의문 전문에 나와 있는 이 구절이다. “김 위원장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그의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약속(commitment)을 재확인했다.” 뉴욕타임스는 북한 외무성 부상 최선희를 상대로 비핵화의 사전조율을 맡은 성 김 주필리핀 대사가 백악관으로부터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말라는 견제를 받아 CVID를 쟁취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사실이라면 네오콘 매파인 존 볼턴 안보보좌관의 강경론이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온건·대화론에 밀렸다는 의미다. 김정은을 두 번 만난 폼페이오는 김정은이 합리적이고 말이 통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트럼프에게 각인시켰다.
 
6자회담 수석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은 “CVID 실현에 맥주 한 잔 값도 걸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워싱턴의 싱크탱크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한반도·일본 문제 전문가 마이클 그린은 자기는 CVID를 기대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부 외교안보라인에 친구가 많은 워싱턴의 ‘마당발’ 그린의 말이어서 트럼프의 앞길에 험로를 예고한다. 트럼프가 싱가포르로 떠날 때 미국 전문가들의 80% 이상이 북·미 회담에 회의적이었다. 트럼프에 의하면 그들은 가짜 뉴스 생산·소비자들이다.
 
북·미 정상회담의 성과가 빈약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김정은과 트럼프 사이에 조성된 신뢰 관계라는, 천금 같은 자산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김정은을 “병든 강아지”“꼬마 로켓맨”이라도 매도한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단독회담, 확대회의, 업무오찬을 마치고는 그를 존경할만한 인물, 몇만 명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한 재능 있는 협상가라고 칭찬했다. 만나서 1분이면 상대의 진정성을 간파하는 “감”(感)과 직관력을 자랑하는 트럼프의 말이다.
 
트럼프는 비핵화를 실현하겠다는 김정은의 약속을 신뢰를 바탕으로 의심하지 않는 것 같다. 한 번의 회담에서 비핵화의 일괄타결을 주장하던 트럼프는 비핵화는 긴 과정(process)이라는 현실에 눈을 떴다. 그 과정의 첫걸음을 싱가포르에서 뗀 것은 큰 성과다. 김정은과 트럼프 사이에 생긴 궁합(chemistry)과 비핵화는 긴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라는 현실 인식이 없다면 싱가포르 합의문에 CVID가 들어갔다고 해도 그 실현은 담보되지 않는다. 신뢰가 생명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2일 카펠라 호텔에서 산책하고 있다. [사진 싱가포르 정보통신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2일 카펠라 호텔에서 산책하고 있다. [사진 싱가포르 정보통신부]

처음부터 정상회담에서 개념적, 포괄적 합의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CVID는 단숨에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 외교는 국내 정치의 연장선에 있다. 김정은이 귀국 후 국내 사정으로 약속한 비핵화의 초기 조치를 주저하거나, CVID 따위를 처음부터 믿지 않는 볼턴이 싱가포르 합의를 뒤흔드는 반김정은 발언을 하는 일이 일어나면 싱가포르의 공든 탑이 무너질 위험도 있다. 트럼프의 말대로 김정은은 단 한 번의 기회(one time shot)를 놓쳐서는 안 된다.
 
트럼프는 싱가포르 기자회견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CVID의 ‘I’(irreversible·불가역적)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비핵화가 전체 과정의 20%만 진전되면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비핵화가 양적으로 20%만 진척되면 그 지점에서 질적 변화가 일어나 원점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말로 해석된다. 그래서 시작이 중요하다.
 
비핵화의 동력을 살리고 김정은-트럼프 간 신뢰를 키우기 위해서는 김정은의 조기 방미와 트럼프의 방북이 실현되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작년 7월 독일 베를린의 쾨르버 재단 초청 연설에서 한반도 평화와 협력 논의는 한 번으로 되지 않을 것이며 시작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이제 자리에서 일어서서 발걸음을 뗐을 뿐이다.
 
 
합의 비판하기 전 작년 전쟁 위기 기억을
 
우리는 CVID가 빠진 김정은-트럼프 합의를 비판하기 전에 작년의 전쟁 위기를 기억해야 한다. 선제공격론자들은 미국이 북한의 핵·미사일 기지를 외과수술적으로 공격해도 한국과 일본은 큰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북한의 산악지대 지하 동굴이나 야산에 은닉된 핵탄두와 이동식 발사대 위의 단·중거리 미사일은 외면했다.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은 휴전선 북방에 전진 배치된 장사정포의 사정권에 있는 수도권이 주유소, 가스관, 송전 설비 같은 것으로 가득 찬 사실상의 화약고라는 사실에는 주목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한국의 동의 없는 전쟁은 안 된다는 점을 거듭 분명히 했다.
 
북한이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개발한 이후, 특히 작년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 시험발사에 성공한 뒤로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북한 공격이나 북한의 한국 공격으로 시작되는 전쟁은 한반도에 국한될 수가 없다. 트럼프는 싱가포르 기자회견에서 한국인들에게 고무적인 말을 했다. 그는 북한을 공격하면 인구 2800만 명이 몰려있는 수도권에 엄청난 인명피해가 난다고 말했다. 볼턴 같은 네오콘 잔재들이 주위에 있는데도 트럼프의 뇌리에 그런 인식이 심겨 있는 것을 보면 충동적인 사람으로만 알고 있던 트럼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고쳐야 할 필요를 느낀다.
 
올 상반기에 벌써 문재인-김정은 회담 두 번, 김정은-시진핑 회담 두 번, 김정은-트럼프 회담 한 번, 시진핑-푸틴 회담 한 번 열렸다. 하반기에도 문 대통령의 평양과 러시아 방문, 김정은의 미국 방문 아니면 트럼프의 북한 방문이 예정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 정상회담 러시다. 하반기에 한반도 평화 정착으로 가는 두 가지 의미 있는 진전이 예상된다.
 
하나는 트럼프가 싱가포르 기자회견에서 밝힌 대로 북한이 미사일 엔진 시험장을 폐쇄하는 것이다. 핵과 미사일은 실과 바늘의 관계다. 운반수단 시험장의 폐쇄는 넓은 의미의 비핵화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남·북·미 간의 종전선언이다. 북한이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 한·미 합동군사연습을 중단하는 것과 종전선언은 비핵화의 초기단계에서 북한의 안보 우려를 제거해 주는 중요한 조치다.
 
평창에서 시작된 한반도 평화의 여정은 판문점과 싱가포르를 거쳐 다시 한반도로 돌아왔다. 김정은-트럼프 간에 신뢰가 생겼다. 이 자산을 키워 평화 여정의 동력을 살려나가는 것이 문재인 대통령의 역사적인 도전과제다.
 
김영희 전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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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